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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도굴당한 조조, 中 희대의 도굴꾼
강개토
2010. 1. 1. 18:15
(선양=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
도굴 기구 둬 고분 파헤쳐..확보한 보물 군자금 활용
최근 중국 허난(河南)성에서 발견된
위(魏) 무왕(武王) 조조(曺操.155-220)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진위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이는 가운데
이 무덤이 이미 수차례 도굴됐던 것으로 드러나 중국 고고학계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이 무덤이 조조의 진짜 무덤으로 확인된다면,
이 무덤이 조조의 진짜 무덤으로 확인된다면,
72개의 가묘(假墓)를 만들라는 유언을 남겨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천하의 지략가 조조 역시 도굴꾼들의 집요함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 된다.
조조는 그러나 자신의 무덤을 파헤쳤던 도굴꾼들을 책망하거나 원망할 처지가 못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조조야말로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희대의 도굴꾼이었기 때문이다.
동진(東晋)의 역사학자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를 시작으로
동진(東晋)의 역사학자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를 시작으로
후한(後漢)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명인 진림(陳琳)의 '삼국지 위서(三國志 魏書)',
남조(南朝) 송대(宋代) 학자 배송지(裵松之)가 저술한 '삼국지' 등
중국의 고대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조조의 도굴 전력을 상세히 기록해 후세에 전하고 있다.
특히 진림의 삼국지 위서는 조조가 도굴을 위해
특히 진림의 삼국지 위서는 조조가 도굴을 위해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모금교위(摸金校尉)'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전문 도굴 기구까지 조직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 고대 고분 가운데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 고대 고분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서한(西漢) 양효왕(梁孝王)의 무덤을 파헤쳐 금과 보물 수만 근을 챙긴 것도 조조였다.
조조는 양효왕의 무덤에서 확보한 보물로 휘하의 군인들을 3년간 먹여 살렸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현장을 직접 찾아 도굴을 지휘했고
그는 현장을 직접 찾아 도굴을 지휘했고
도굴한 무덤은 잔혹할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뜨려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조조가 군자금 확보를 위해 고분을 파헤쳤다면
조조가 군자금 확보를 위해 고분을 파헤쳤다면
춘추시대 합려(闔閭)왕을 도와 오(吳)나라를 강대국으로 키웠던
오자서(吳子胥)는 복수를 위해 파묘(破墓)한 것으로 유명하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오나라가 초(楚)나라를 함락하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오나라가 초(楚)나라를 함락하자,
그는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에 300번의 채찍질을 가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큰 형을 죽인 것을 분풀이했다.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됐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천하를 다투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살한 항우(項羽)는 진시황(秦始皇) 무덤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유방이 진시황 무덤을 도굴한 항우의 행위를 큰 죄로 간주해 천하에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자들은 진시황 무덤이 훼손된 흔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항우가 유방에 의해 '누명'을 썼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무덤을 파헤친 것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천하를 다투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살한 항우(項羽)는 진시황(秦始皇) 무덤을 도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유방이 진시황 무덤을 도굴한 항우의 행위를 큰 죄로 간주해 천하에 알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자들은 진시황 무덤이 훼손된 흔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항우가 유방에 의해 '누명'을 썼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무덤을 파헤친 것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청(淸)의 건륭(乾隆)황제는 명(明)나라 영릉(永陵)을 새로 짓도록 해 능의 규모를 축소했을 뿐 아니라
영릉 전각의 값나가는 대들보들을 확보, 청나라 궁전 건립에 썼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 황제들이 궁전을 지으려고 명나라의 건축물을 훼손한 경우는 있었지만
청나라 황제들이 궁전을 지으려고 명나라의 건축물을 훼손한 경우는 있었지만
명조(明朝)의 능에까지 손을 댄 것은 건륭황제가 유일하다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은 적고 있다.
민간에서는 이를 두고 '건륭도목(乾隆盜木)'이라 부르고 있다.
pjk@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haohaor/
pjk@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haohaor/
"조조 무덤, 관광수익 노린 가짜일수도”
[한겨레] 창·베개 등 핵심증거 조작 의혹
허난성 "직접 발굴한 것" 반박
< 삼국지 > 의 '간웅' 조조 무덤의 진위를 둘러싼 공방전이 뜨겁다.
허난성 "직접 발굴한 것" 반박
< 삼국지 > 의 '간웅' 조조 무덤의 진위를 둘러싼 공방전이 뜨겁다.
중국의 유명 역사·고고학 전문가들까지 나서 발굴된 무덤이 가짜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허난성 문물국이 지난 27일
허난성 문물국이 지난 27일
안양현에서 조조의 진짜 무덤인 '고릉'을 발견했다고 발표( < 한겨레 > 28일치 13면)하면서 제시한
6가지 증거 중 핵심인 '위 무왕이 쓰던 창' 명문(사진)과
'위 무왕이 쓰던 돌베개'가 이 무덤에서 출토된 진짜 유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논쟁의 중심이다.
위진남북조 문학 전문가인
인민대학 국학원 위안지시 부원장은 <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 등에 출연해
"이 무덤이 이미 여러번 도굴됐으며,
이 명문과 돌베개도 이곳에서 출토된 진짜 부장품인지 도굴범의 손에서 회수한 유물인지 단정할 수 없다"며
이번 발표는 학계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여러 증거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죽은 이와 함께 반드시 매장했던 묘지명이나 추도문이 출토되지 않았고,
당시 죽은 이와 함께 반드시 매장했던 묘지명이나 추도문이 출토되지 않았고,
조조가 생전에 위공 또는 위왕으로 칭했지만 위 무왕이라고는 칭한 적이 없으며,
조조가 숨진 뤄양이나 고향 초군이 아닌 안양에 묻힌 이유 등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가짜 조조 무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인터넷에서는 가짜 조조 무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조조의 후손을 찾아 무덤에서 발굴된 남성의 유골과 대조해 디엔에이(DNA) 검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조조가 자신의 무덤이 도굴될 것을 우려해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민간전승이 사실이라면, 그 중 하나라는 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허난성 당국은 올해 10월부터 발굴 작업을 하면서 조조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에 대해 허난성 당국은 올해 10월부터 발굴 작업을 하면서 조조의 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역사, 고고, 고문학 방면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수십차례의 현장 검증과 토론을 거쳐 조조의 묘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반박한다.
발굴 책임자 판웨이빈도 핵심 증거인 명문과 돌베개를 자신이 직접 무덤 안에서 발굴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허난성이 관광 수입 등을 겨냥해 엄격한 고증 없이 발표를 했다는 여론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허난성이 관광 수입 등을 겨냥해 엄격한 고증 없이 발표를 했다는 여론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 베이징청년보 > 는 30일 "조조 무덤의 매년 입장료 수입이 최소 4억2000만위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며
"경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가 학술적 양심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떨칠 수 없다"며 디엔에이 검사 등 과학적 실증을 요구했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