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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만화로 다시 태어나다
김은희는 단순히 만화에 색을 입히는 데 그치지 않고 「온화한 하루」에서 보듯이 미술을 만화 안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피카소의 원화를 그대로 빌려와 만화 용지에 색을 입히고, 원화의 이미지에 이야기를 더하여 단편 미술 소설을 완성한 것이다. 미술을 만화에 옮겨 심는 작업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 있다. 코흘리개 꼬마한테까지 간편하게 먹고 버리는 맥도날드 햄버거 취급이나 당하던 만화에 미술이라는 왕관을 씌워준 화가. 그가 바로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다. 만화를 미술로 보는 그의 눈이 없었다면 만화의 예술성은 훨씬 더 늦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만화를 미술로 옮긴 팝 아트 팝 아트는 1950년 영국에서 먼저 조짐을 보였다. 비평가 로렌스 앨러웨이와 리처드 해밀턴 등이 그 씨앗을 뿌렸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팝 아트는 영국보다 미국에서 더 지지를 얻는다. 영국과 미국에서 받아들이는 견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영국 팝 아트는 자본주의가 낳은 인간 소외와 물질주의를 비판했다. 미국 팝 아트는 자본주의를 비판의 대상이 아닌, 함께 가꿔 나가야 할 사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미국 팝 아트는 자본주의 구조를 예술 소재로 삼는다. 미국 팝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이들을 비난했지만 미국 팝 아트는 대중 문화의 욕조 속에 미국인들을 몰아넣었다. 미국 팝 아트의 가장 큰 특징은 자본주의의 꽃인 대중 매체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이다. 팝 아트는 TV와 영화에서부터 만화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소재를 가리지 않았고 제작방법에도 제약이 없었다. 실크 스크린, 신문ㆍ잡지 광고,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코카콜라, 미키마우스, 교통 표지판, 포스터 등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이것들은 시각적으로 분명하고 쉬운 이미지인데다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팝 아티스트들의 눈길을 끌었다. 팝 아트는 대량 복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었으나, 그러한 특징은 팝 아트를 키치 문화로 낙인찍히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팝 아티스트들은 넘쳐나는 상품들과 대중 매체가 가져온 혼란 속에 발딛고 선 대중 예술가였다. 그들은 팝 아트가 저속한 자본주의 대중 문화의 쓰레기라는 비판에 대해 나름의 대안을 마련하느라 고심했다. 대표적인 작가로 마릴린 먼로의 얼굴과 코카콜라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앤디 워홀, 거대 광고판을 이용한 제임스 로젠키스트, 헝겊으로 햄버거나 아이스크림을 만든 클래스 올덴버그, 만화를 미술에 응용한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이 있다.
만화로 미술을 배운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192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림은 14세 때 파슨즈 디자인 학교에서 토요일마다 배웠는데, 그냥 취미 삼아 그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관심사는 재즈 음악가와 피카소의 그림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1961년 아들한테서 팝 아트에 만화를 응용하는 계기를 얻는다. 아빠 직업을 묻는 친구들에게 아들이 추상표현주의 화가라고 했더니, 한 친구가 추상표현주의 화가는 데생을 못한다고 놀린 것이다. 화가 난 아들이 리히텐슈타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아들에게 미키마우스를 그려주었다. 이 작품이 그를 최고의 팝 아트 작가로 올라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세 작품을 보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술은 이제 만화다워져 가고, 만화는 더욱 미술다워져 간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정지 화면이며, 흑백이 아닌 컬러 그림이다. 글과 그림, 색채가 만났으니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관객도 그림이 뿜어내는 자극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은 만화인가? 의외로 이 의문은 쉽게 풀린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를 그린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만화를 회화로 다시 구성한 것이다. 만화를 회화의 소재, 즉 오브제로 삼았을 뿐이다. 당연히 재료나 표현 방식은 만화와 다르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라는 매체'가 아니라, '만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렸다고 할 수 있다.
강성수의 <뻘건 눈>은 유화를 사용하고 컴퓨터로 작업했다. 이 만화는 다소 난해하고 성적이다. 암탉과 수탉이 나누는 성교 장면을 몰래 훔쳐보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남의 은밀한 사랑놀이를 엿보는 관음증 환자들. 그들의 눈매가 지나치게 초롱초롱하여 음침하기까지 하다. <뻘건 눈>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짙은 녹색이 인물의 표정과 눈동자를 대신한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자. 누가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미술이라고 단정하고, 강성수의 그림을 만화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제 미술은 만화다워져가고, 만화는 더욱 미술다워져간다. 김은희의 「온화한 하루」가 미술 만화다운 매력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 그림에 공존하는 미술 요소와 만화 요소. 그 경계선은 어디쯤에 있을까?
리히텐슈타인이 말하는 일상, 미국 지상주의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지극히 미국적이다. 팝 아트가 영국에서 먼저 조짐을 보였지만, 시대 조류를 주도한 것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들이다.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미국에 있고 예술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아메리카니즘은 여실히 드러난다. 리히텐슈타인의 <나는 자유를 사랑합니다>는 자유의 여신상을 통해 미국이 얼마나 자유를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영국과 유럽의 팝 아트가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철학에 골몰해 있는 동안 미국 팝 아트는 이미지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이미지가 모든 것을 삼키고 만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다양한 자본주의 문화를 소재로 삼는다. <TAKKA TAKKA>는 자본주의 산업의 추앙을, <차 안에서>는 남녀의 애정 행각을 표현하고 있다. 이같은 미국 성향은 미국 중상류 생활을 상징하는 인테리어를 소재로 한 작품에서도 곧잘 드러난다.
[글 : 박창석(만화이론가,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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