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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지킴이로 나선 신세대종손 정춘목씨

강개토 2010. 4. 12. 00:16

 


경북 상주시 외서면에 있는 우복종가 입구에는 방 한칸의 초옥이 있다.

 

단촐한 초옥은 서애 류성용의 수제자로

인조때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가 제자를 가르치며 청빈한 선비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그는 스승인 서애가 집 한칸 남기지 않고 가난하게 살다

세상을 뜨자 그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역시 서애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 셈.

우복은 요즘의 노마드(nomad·유목하는 인간)를 연상케할 정도로 벼슬에 집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당쟁이 격화되자 서울을 훌쩍 떠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다시 벼슬길에 오른 우복은 반대파에게 탄핵을 받자 또다시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물려받은 유산이 변변찮았던 후손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며 가난하게 살았다.

영조 때에 이르러 그 후손들에게 땅이 내려졌다(이를 '사패지'라고 한다).
후손들은 이곳에 새집을 짓고 우복을 추모하며 대대로 살아왔다.
 지금 이곳에는 우복의 15대 종손인 정춘목씨(40)가 어머니 이준규씨(63)와 함께 종가를 지키고 있다.

종손은 현대 속에서 과거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운명을 타고 났다.
신세대 종손인 정씨는 "반은 조선시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가족해체를 말할 정도로 급변하는 요즘 추세에 비춰볼 때

종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게 아닐 것이다.
특히 직업을 쫓아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잡 노마드(job nomad)'의 시대에 그는 오히려 전통사회의 '수행자'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먼 선조인 우복이

400여년 앞서 한곳에 얽매이지 않는 노마디즘을 실천하며 초가를 지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후손은 그의 노마디즘의 '유물'을 지키느라 고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고향에 돌아가 종손으로 살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등에 떠밀린 것처럼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는 서구화에 밀려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자긍심마저 내팽개칠 정도로 우리의 정신마저 서구의 정신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면서 유럽·미국의 왕실이나 명문가, 귀족에 대해서는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미디어가 앞장서 그렇게 유도를 하고 있죠.
반면에 우리나라에는 명문가가 없다고 조장할 정도예요.
 사람들도 명문가나 종가를 말하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니까요.

 

더러 저를 원숭이처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거나 업신여기면

결국 그 손해는 우리 자신들에게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잘못된 전통이 있다는 것.

외국의 황실(왕실)과 명문가에 대해서는 예찬을 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조선왕실과 명문가에 대해서는 폄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고향을 지키는 '마지막 종손'이 되더라도 선조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고향에 돌아와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의 삶을 되새기며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의 나이 25살때인 1991년.

그러자 그의 고향행을 되레 말린 사람은 친족인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이었다.

 

이전회장은

'경제력'이 좌우되는 시대에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신세대 종손의 안부를 걱정했던 것이다.

종손 역시 경제력이 없으면 무시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전회장은 그에게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종손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며 적극 서울행을 권유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재령이씨 영해파의 종손인 이전회장도 이심전심으로 그 고충을 알고 있었던 것.

귀향후 그의 생활은 이전회장의 예상대로였다.

농사를 짓고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고

 고향사람들조차 별난 그의 선택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보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말동무할 친구조차 없었다.
참고 견디다 정 안되면 그는 술친구들이 많은 대구로 나갔다.

마흔이 된 지금도 동네에서 술동무들은 환갑을 지낸 할아버지들이다.

그는 몇년 전부터 두집 살림을 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가 지키고 있는 종가에는 거의 매일 출퇴근한다.
2남1녀를 둔 그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두 이곳에 살다 몇년 전 상주시내에 아파트를 얻었기 때문.

시내 아파트에서는 21세기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종가에 돌아오면 조선시대 사람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종손 역할을 본격적으로 해온 지 15년.

이제 그는 종손으로서의 자세가 잡혔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수백년된 전통이 있고

그 전통에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고 본받아야 할 가치들이 많다"며

"우리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전통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아쉬움 때문.

그의 먼 선조인 우복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낙향길에 들른 이곳에 초옥을 짓고 살며 '노마드적 자유정신'을 실천했다.

반면 그는 우복이 실천한 청빈한 삶을 기리며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잡 노마드'의 맹렬한 기세 속에서도

의연하게 종손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언뜻 상반된 것 같은 우복과 그 후손의 삶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

 진정 인간다운 삶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수백년 전에도 우리의 선조들이 지낸 설 명절을 다시 맞으면서

새삼 전통의 중요성을 되새겨본다.

 

 

 

 

 



▲우복종가란?
진주 정씨인 우복 정경세(1563~1633)가
38세 때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다 이곳에 들어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우복동천이라고도 한다.

우복은 경상관찰사와 대제학을 지냈지만

이곳 초옥에서 청렴하게 살았다.

영조가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하사함으로서

5대손인 정주원 때부터 대대로 살게 되었다.

현재 우복이 살던 초옥을 비롯해 우복종가와 서원 등이 있다.
〈상주|글 최효찬·사진 김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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