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때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가 제자를 가르치며 청빈한 선비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세상을 뜨자 그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는데,
우복은 요즘의 노마드(nomad·유목하는 인간)를 연상케할 정도로 벼슬에 집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그 후손들에게 땅이 내려졌다(이를 '사패지'라고 한다).
종손은 현대 속에서 과거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가족해체를 말할 정도로 급변하는 요즘 추세에 비춰볼 때
종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게 아닐 것이다.
특히 직업을 쫓아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잡 노마드(job nomad)'의 시대에 그는 오히려 전통사회의 '수행자'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400여년 앞서 한곳에 얽매이지 않는 노마디즘을 실천하며 초가를 지었는데,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고향에 돌아가 종손으로 살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서구화에 밀려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더러 저를 원숭이처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하하거나 업신여기면
결국 그 손해는 우리 자신들에게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외국의 황실(왕실)과 명문가에 대해서는 예찬을 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조선왕실과 명문가에 대해서는 폄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고향을 지키는 '마지막 종손'이 되더라도 선조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고향에 돌아와
그들의 자유로운 정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의 삶을 되새기며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의 나이 25살때인 1991년.
그러자 그의 고향행을 되레 말린 사람은 친족인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이었다.
'경제력'이 좌우되는 시대에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신세대 종손의 안부를 걱정했던 것이다.
이전회장은 그에게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종손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며 적극 서울행을 권유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향후 그의 생활은 이전회장의 예상대로였다.
농사를 짓고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고
고향사람들조차 별난 그의 선택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마흔이 된 지금도 동네에서 술동무들은 환갑을 지낸 할아버지들이다.
그는 몇년 전부터 두집 살림을 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모두 이곳에 살다 몇년 전 상주시내에 아파트를 얻었기 때문.
종손 역할을 본격적으로 해온 지 15년.
이제 그는 종손으로서의 자세가 잡혔다.
그 전통에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고 본받아야 할 가치들이 많다"며
그가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아쉬움 때문.
그의 먼 선조인 우복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낙향길에 들른 이곳에 초옥을 짓고 살며 '노마드적 자유정신'을 실천했다.
반면 그는 우복이 실천한 청빈한 삶을 기리며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잡 노마드'의 맹렬한 기세 속에서도
의연하게 종손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진정 인간다운 삶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수백년 전에도 우리의 선조들이 지낸 설 명절을 다시 맞으면서
새삼 전통의 중요성을 되새겨본다.
▲우복종가란?
진주 정씨인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낙향하다 이곳에 들어와 여생을 보낸 곳으로, 우복동천이라고도 한다.
이곳 초옥에서 청렴하게 살았다.
영조가 남북 10리와 동서 5리의 '우복동천' 구역을 하사함으로서
5대손인 정주원 때부터 대대로 살게 되었다.
현재 우복이 살던 초옥을 비롯해 우복종가와 서원 등이 있다.
〈상주|글 최효찬·사진 김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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