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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킹 우드스탁] 이안감둑

강개토 2010. 8. 14. 12:26
 

이안 감독의 열한 번째 장편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은 우리를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뒤안길로 안내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공연 현장을 재현하거나, 광란의 축제를 스케치하는 식의 '뻔한 수'는 두지 않는다.

이안 감독은 자신이 항상 이야기했던 가족과 정체성과 갈등의 이야기를 40년 전의 사건 속에 오롯이 담는다.

이안 감독을 구성하고 있는 10개의 테마.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을 위한 작은 가이드가 되길 바란다.


글 |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  네이버영화

섬세한 이방인의 시선, [테이킹 우드스탁]의 이안 감독
테마 1. 중국의 전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결혼 피로연]은 이안의 가족사가 그대로 반영된 영화다.
아버지는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숨겨진 이야기를 한다(왼쪽 사진).
이 영화의 피로연 장면은 이안의 실제 경험이 묻어난 것이다(오른쪽 사진).
 
이안 감독은 1954년 10월23일 대만 핑둥 현에서 태어났고, 후알리엔과 타이난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족사는 [결혼 피로연](1993)에 잘 나타난다.
아들 웨이퉁(윈스턴 차오)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으로 온 아버지(랑웅)은 말한다.
자신의 부모는 중국 본토에서 사형 당했고, 자신은 공산당을 피해 대만으로 왔다는 사실을.
이것은 이안의 가족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이안의 아버지 이승은 유교 사상을 중시하는 전통주의자이며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이안은 전형적인 중국 가정의 아들로 살아가는 데 큰 부담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아버지는 이안이 중국 사회의 '전통적인 장남'이길 바랐다.
하지만 이안은 대학 시험에 두 번이나 떨어졌다(특히 수학을 못 했다).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를 다녔다는 걸 감안하면 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도피처는 극장이었으며,
결국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대만예술학교(현재는 대만국립예술대학)의 연극 영화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당시 대만 사회에서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배우가 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무대 위에 섰던 순간에 대해 "내 영혼이 처음으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 감정은 그가 [색, 계](2007)의 원작을 읽었을 때 환기되기도 했다.
왕치아즈가 처음 무대에 섰을 때의 희열을 그리는 대목에서 이안은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소설은 매우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나는 무대 위에서 전기 충격과도 같은 짜릿함을 경험한 왕치아즈가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하는 폭풍 같은 과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색, 계]에 표현된 무대의 감격은, 이안 감독이 20대 초반에 경험했던 감정의 재현이다(왼쪽 사진).
[헐크](오른쪽 사진) 이후 이안 감독은 깊은 실의에 빠졌다. 이때 그를 구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안은 뛰어난 배우였다.
국립 연극제에서 최우수 배우상을 수상했고,
졸업반 시절엔 [토요일 오후의 게으름](1976)이라는 8mm 단편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이후 그가 NYU에 들어갈 때 포트폴리오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부끄러웠다.
이안이 영화감독으로서 명성을 떨쳤을 때도, 아버지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그랬던 아버지는 이안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큰 힘이 되었다.

[헐크](2003)의 실패 이후, 이안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으려 했다.
이때 고령의 아버지는 이안에게 계속 영화를 만들라고 했다.
"아버지는 [헐크]를 매우 좋아하셨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중략) 나는 아버지께 영화감독을 그만두거나, 긴 시간 동안 휴식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내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거냐고 물으셨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영화를 그만두면 매우 침울한 상태에 빠질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계속 정진하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영화를 만들라고 독려하신 건, 그때가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이전엔 항상 영화 만드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으니까." 이 말을 남기고 2주 후에, 이안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테마 2. 원동력이 된 6년의 백수 생활

 

이안 감독과 아내 제인 린(왼쪽 사진).

 
이안 감독은 아내의 인내심이 없었다만 자신은 절대로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오른쪽 사진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할 때의 모습. 감격의 포옹을 나누고 있다.
이안은 1978년에 유학 길에 오른다.
일리노이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는데, 영어에 서툴러 연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연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결정이 그의 인생을 바꾼다.
 
그는 브레히트, 해롤드 핀터,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의 희곡을 연구하면서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내공을 쌓았고,
1980년엔 뉴욕 대학(NYU)으로 옮겨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이 시기 그는 많은 단편을 만들었는데
[호수의 그림자](1982)는 대만의 골든하비스트영화제에 출품되어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1983년에 이안은 결혼한다.
아내인 제인 린(Jane Lin)은 일리노이 대학 시절 만난 여성으로,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당시 린의 어머니는 공대생이나 평범한 직업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제인 린은 이안을 선택했다.
결혼 후에 그들은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뉴욕에 있었고, 제인 린은 일리노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당시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다.

NYU 시절 이안은 2년 동안 졸업 작품인 [파인 라인 A Fine Line](1985)에 매달렸다.
어린 중국 소녀와 이탈리아 남자의 이야기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그의 초기 테마가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NYU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했고, 이후 비영리 채널인 PBS에서도 방영됐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거대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의 관심을 받은 것이다.
중국인으로서 미국 영화 시장에서 활동하는 덴 너무나 많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귀향을 결심했던 이안은,
6개월만 미국에 더 머물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6년의 백수 기간이었다.

 
[결혼 피로연]엔 이안 감독의 둘째 아들 메이슨과 아내 제인 린이 출연한다(왼쪽 사진).
이안 감독과 프로듀서 제임스 셰이머스(오른쪽 사진). 그들은 20년 가까이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1984년에 첫 아들 '한'이,
1990년에 둘째 아들 '메이슨'이 태어났지만 그의 데뷔작은 소식이 없었다.
결국 그는 1985년부터 1991년까지 6년 동안 기회를 엿보며, 육아와 가사 일에 전념한다.
남는 시간엔 시나리오를 썼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미친 듯이 테니스를 쳤다.
이때 이안의 평생 지기 파트너인 프로듀서 제임스 셰이머스가 찾아왔다.
당시 굿 머신(Good Machine)이라는 영화사를 차린 그는 신인 감독을 발굴 중이었고,
뒤늦게 이안 감독의 졸업 작품인 [파인 라인]을 보고 찾아온 것이다.

"6년 동안 이안은 결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거대한 영화의 데이터베이스를 쌓고 있었고, 열 개가 넘는 시나리오를 동시에 작업하고 있었다.
" 셰이머스의 말처럼 이안은 이미 수많은 영화를 만든 상태였다.
 머릿속에 있는 그 영화들을 현실화시켜 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6년을 기다린 끝에 셰이머스를 만나게 되었다.



테마 3. 아버지께서 가장 잘 아신다

[쿵푸 선생]과 [결혼 피로연]. 대만의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하면서 영화화의 길을 찾았다.
 
셰이머스를 만날 무렵, 이안은 대만의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했다.
고향에서 영화를 만들 기반을 닦기 위해서였다.
출품작은 [쿵푸 선생]과 [결혼 피로연]. 두 편은 공모전의 최고 상들을 휩쓸었고, 16,00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이 시기 대만영화협회를 이끌던 수리콩은 이안의 은인과도 같은 인물.
차이밍량을 발굴해 데뷔시켰던 그는 새로운 대만 영화를 위해 전력을 다했던 인물로,
이안에게 40만 달러를 지원하며 [쿵푸 선생](1991)을 영화화할 수 있게 도왔다.

미국인 스태프들과 함께 주 선생 역의 랑웅을 모시고 뉴욕에서 촬영된 [쿵푸 선생]은
 1991년 대만 박스오피스에서 중국어 제작된 영화 중 3위를 차지하는 흥행을 기록했다.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쿵푸 선생]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 시장에 잘 알려지진 않았다.
이안은 대만 관객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중심 테마는 '효'였다.

대만영화협회는 [결혼 피로연]의 제작비도 지원했고, 제작자 제임스 셰이머스도 합류했다.
100만 달러로 6주 만에 완성된 이 영화는, 1993년 북미 시장에서 2,300만 달러 벌어들였다.
제작비 대비 수익률로만 본다면 같은 해 흥행 1위였던 [쥬라기 공원](1993)보다 알차게 흥행한 셈이다.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고,
베를린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금곰상을 수상했으며,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작품상과 대만의 영화상인 금마장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흥행과 비평에 걸쳐 동서양에서 모두 인정받은 영화가 된 것이다.

이안은 할리우드의 여러 스튜디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주목 받는 신예 감독이 되었지만,
세 번째 영화를 위해 대만으로 돌아온다.
 
그가 유일하게 대만에서 만든 영화로 기록될 [음식남녀]는
"중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을 바로 세울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결정한 선택이었다.
그는 과거 6년 동안 가사 일을 돌보면서,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고,
'음식을 만든다'는 행위에 대해 "나의 영혼을 강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안 감독은 [음식남녀]를 대만을 포함한 전세계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중국어권 평단의 일각에선 "지나치게 서구화된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안 감독은 이 영화로 다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이안의 초기 3부작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랑웅. [음식남녀]에서 그는 미각을 잃었다가 되찾는다.
 
데뷔작 [쿵푸 선생]부터 [음식남녀]까지,
이안의 초기 3부작은 흔히 '아버지께서 가장 잘 아신다'(Father-Knows-Best) 3부작으로 불린다.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세 편의 영화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안 감독은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를 재구성하는데,
초기 3부작은 보수적인 가치에 도전하며 권위를 잃고 약한 모습의 아버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20세기 말 중국 사회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서구화된 가치관의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에 대항한다.
 
이러한 세대간 갈등의 테마는
[아이스 스톰](1997)에도 나타나며,
최근작인 [테이킹 우드스탁](2009)에서도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테마다.

하지만 그의 초기 3부작이 이후 영화와 다른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아버지의 위치가 복구되며,
위기를 겪었던 아버지는 연민과 존경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점.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세 편의 영화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았던 배우 랑웅이다.
1930년 생인 랑웅은 [쿵푸 선생]에 출연할 때, 이미 은퇴해서 5년 동안 연기를 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젊은 시절에 범죄자나 갱 보스 역할을 주로 맡았던 배우였지만, 이안은 그의 얼굴에 내재된 '아버지의 모습'을 끄집어냈다.
이안에 의해 재기에 성공한 랑웅은 2002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랑웅이라는 배우의 얼굴과 연기력이 없었다면, 나는 세 편의 영화에서 중국의 전통적 아버지 상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거친, 세월의 풍상을 견딘 얼굴.
이안이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테마 4. 가족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

[테이킹 우드스탁]과 [아이스 스톰]. 1960년대 농촌 지역과 1970년대 교외 지역의 가족 드라마.
 
"나는 가족에 대한 드라마를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 그건 내가 가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안의 영화에서 가족은 가장 중요한 테마이며,
가족 안에서 두 세대가 빚어내는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는 그의 초기작부터 시작해 [테이킹 우드스탁]까지 이어진다.
 
초기 3부작에서
'아버지-아들', '아버지-딸'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 이안 감독은
[아이스 스톰]에서 부모 세대의 타락이 자식 세대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남북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한 [라이드 위드 데블](1999)에선 권리를 박탈당한 젊은 세대 전체를 보여주었다.
[헐크]는 부모 세대의 부정적인 유산 속에 갇힌 자식 세대의 이야기이며,
[브로크백 마운틴](2005)은 게이 커플의 이야기만큼이나 그들의 가정에 대해서도 비중을 할애하며,
[테이킹 우드스탁]에선 어느 유대인 가족의 젊은이가 문화적 격변을 겪으면서 가족으로부터 독립한다.
 
이러한 '가족 시네마' 속에서 이안 감독은 인종, 섹슈얼리티, 계급 등 사회적 질서를 분석한다.

그의 영화가 서양의 가족 멜로드라마와 다른 부분은, 가족과 개인의 관계다.
서양의 멜로드라마가 가족 속에서의 개인을 다룬다면, 이안은 초기작에서 가족을 하나의 단위로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음식남녀]는 이안의 변화상을 보여준 작품인데,
이 영화에선 집단만큼이나 개인의 캐릭터도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이 부분에 대해 중국어권의 평론가들이 "서구화되었다"고 비판했지만,
이안의 의도는 전통적인 중국의 가족 드라마를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가족적 가치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의 균열을 보여주는 건,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음식남녀]와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식탁.
 
여기서 음식과, 가족들이 둘러 앉은 식탁은 갈등의 상징적 소재이자 공간이다.
 
[쿵푸 선생]에서 중국인 시아버지와 미국인 며느리의 대립이 가장 먼저 제시되는 건 음식이다.
시아버지는 육식과 채식의 병행을 통해 음양의 조화를 이야기하지만, 며느리는 다이어트를 위해 채식을 한다.
 
[음식남녀]에서 주 사부(랑웅)은 중국 전통 요리에 정통한 요리사인데,
그에게 있어 세 딸을 위한 식탁을 차리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이다.

하지만 딸들은 새로운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첫째 딸(양귀매)은 아버지의 승락 없이 기독교식 결혼을 했고,
둘째 딸(오천련)은 독립하려 하며,
셋째 딸(왕유문)은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한다.
 
여기서 주 사부는 미각을 잃어가는데,
이것은 세 딸의 이러한 행동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결국 아버지는 자식 세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때 미각이 돌아오며,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곁에 남은 둘째 딸에게 부성애를 드러낸다.
이안의 영화들엔 끊임없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공간은 갈등(과 해소)의 계기로 작용한다.



테마 5.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던 에니스와 잭(왼쪽 사진).
[쿵푸 선생]에서 중국에서 온 아버지는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엔 감옥에 갇힌다(오른쪽 사진).
 
이안 감독의 영화뿐만 아니라, 이안 감독 자신에게도 정체성이라는 테마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아니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내 집안은 중국 출신이며, 나의 부모님은 대만으로 이주했다.
대만에서 우리 가족은 이방인이었다.
이후 나는 미국으로 갔고, 대만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갔다.
나는 영화에 의해 창조된 '규정될 수 없는 세계'를 신뢰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그 규정될 수 없는) 스크린 속의 한쪽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안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대만 원주민이 아니었기에 그의 가족은 이방인 취급을 당했고,
중국 본토에선 대만인이기에 이방인이었다.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땐 언어적 문제로 인해 배우의 꿈을 접어야 했던,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나는 어디에서든 외국인이었다.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는 영화 시장에서도 독특한 존재였다.
[결혼 피로연]으로 주목 받을 즈음, 그의 영화에 대한 시장이 조금씩 형성되었다.
대만과 아시아의 주류 대중영화 시장과, 미국과 유럽의 예술영화 시장.
그의 영화는 중국과 서구 사이에 끼어 있는 그 무엇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안 감독의 작품을 '아웃사이더에 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어, 문화적 코드, 인종, 성 정체성 등에 의해 사회 구조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된다.
초기 3부작에선 서구화된 가치관 속에서 전통적 가치관이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라이드 위드 데블]에선 군대 속에서 두 명의 아웃사이더가 존재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게이는 전통적 가치관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아웃사이더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문화적 흐름을 포착한다.

이처럼 이안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들에 대한 강한 연민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인물들은 언제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새로움, 사랑과 의심, 애국과 매국, 정절과 타락….
 
과거 [색, 계]에 대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경계의 가장자리에 있다.
나는 그게 인생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 순간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늘 경계의 가장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색, 계]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때, 나 또한 경계의 가장자리에 섰다.
식당에서 메뉴를 앞에 놓고 있을 때도 그렇다.
이처럼 삶은 늘 가장자리로 달려간다.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발을 내밀면 새로운 상황이 찾아온다.
매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나'가 된다.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가장자리, 즉 '경계'가 만들어내는 아웃사이더의 드라마. 바로 이안의 드라마다.



테마 6. 여자와 남자, 그리고 섹슈얼리티

[결혼 피로연](왼쪽 사진)에서 이안 감독은 대만 감독 중 처음으로 호모섹슈얼리티를 진지하게 다룬다.
[와호장룡](오른쪽 사진)의 수련은 사회적 의무에 의해 자신을 억압한다.
 
정체성과 관련되어, 그의 영화에서 호모섹슈얼리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는 [결혼 피로연]으로,
차이밍량 이전에 대만 감독 중 최초로 동성애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감독이 되었으며,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논쟁과 찬사에 휩싸였다.
보수파들은 이안이 "게이 서부극 버전의 [폭풍의 언덕]을 만들었다"며 비아냥댔고,
게이 옹호론자들은 걸작으로 추앙했다.
최근작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주인공 엘리어트(디미트리 마틴)는
 자유와 평화의 3일을 겪으며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의 테마는 동성애에 한정되지 않고,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성적 주제로 확장해간다.
특히 그의 영화엔 엄격한 사회적 의무에 의해 억압된 여성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엘리노어(엠마 톰슨),
[아이스 스톰]의 엘레나(조앤 앨런),
[와호장룡]의 수련(양자경) 등은 대표적인 캐릭터들.
 
그러면서
[음식남녀]와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자매애',
[아이스 스톰]의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 여성적 테마들이 꼼꼼히 다뤄진다.
 
그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남성과 동등한 비중을 부여받는데,
심지어 [와호장룡]은 여성 캐릭터가 이끌어나가는 무협 영화이며,
[결혼 피로연] 같은 경우
자칫하면 드라마의 외부로 밀려나갈 수 있는 여성 캐릭터들(웨이퉁의 어머니, 위장 결혼의 파트너인 웨이웨이)이
절대로 이탈하지 않고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게이 드라마인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두 남자의 아내들인 알마(미셸 윌리엄스)와 루린(앤 헤서웨이)에 대해 적지 않게 배려한다.

한편 그의 영화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종종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다.
[아이스 스톰]의 벤(케빈 클라인), [와호장룡]의 리무바이(주윤발)는 대표적인데,
특히 리무바이는 어린 용(장즈이)에게 끌리지만
죽어가는 순간이 되어서야 평생의 동지와도 같았던 수련(양자경)에 대한 연정을 드러낸다.
 
[음식남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음식은 살아남기 위한 것이고, 섹스는 삶을 변화시킨다"고 말했던 이안 감독이
가장 과감하게 섹슈얼리티를 다룬 영화는 아마도 [색, 계]일 듯.
 
양조위와 탕웨이의 격렬한 정사 신이 화제가 되기도 한 이 영화에서 이안 감독은 섹스를 통해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들은 엉키고 할퀴면서 마치 싸우는 것처럼 섹스 한다.
세 번의 섹스 신을 통해 리와 왕 치아즈는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얻고, 사랑을 배반한다.
그들은 대사 한마디 없이 흡사 기예처럼 서로의 몸을 꼬고 얽어서 드라마틱한 대화를 한다."



테마 7. 최고의 연기를 끌어낸다는 것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케이트 윈슬렛과 [와호장룡]의 장즈이는 이안 감독에 의해 한 단계 도약한다.
 
이안 감독의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그토록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배우로부터 언제나 최고의 연기를 끌어낸다는 점이다.
 
은퇴했던 배우 랑웅을 다시 모셔와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중국의 아버지 상'을 만들어냈던 초기작은 좋은 예.
이후 본격적인 주류 영화감독으로 활동할 때도 '배우의 감독'으로서 이안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신인급의 연기자들이 이안 감독의 영화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이 있었기에 케이트 윈슬렛은 [쥬드](1996)의 연기가 가능할 수 있었다.
[아이스 스톰]에선 토비 맥과이어, 크리스티나 리치, 케이티 홈즈, 엘리야 우드 등의 어린 배우들을 데리고
놀라운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와호장룡]에선 장즈이를 단련시켰고,
[브로크백 마운틴]에선 히스 레저, 제이크 질렌홀, 미셸 윌리엄스 등의 젊은 배우들을 모두 아카데미 후보에 올려놓았다.
[색, 계]의 탕웨이는 단 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이안 감독이 중시하는 연기는 언어 이외의 것이다.
그는 동작이나 표정으로 대사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히스 레저)의 꽉 다문 턱,
[아이스 스톰]의 제니(시고니 위버)의 나른하면서도 뱀파이어 같은 육체성,
[와호장룡]의 수련(양자경)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충성심,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에드워드(휴 그랜트)의 묘한 어색함과 불편함,
[아이스 스톰]의 폴(토비 맥과이어)이 보여주는 소년기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의 느낌 등은
모두 '대사 이외의 것'으로 구축된 이미지다.

이안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가끔 나는 스스로 재단사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재단사는 어떤 체형의 사람에게라도 잘 맞는 옷을 만드는 것처럼,
감독 역시 영화를 배우에게 딱 맞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에서 캐스팅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 비중은 20퍼센트 정도라고 본다.
나머지는 감독이 그 배우에게 영화를 맞춰 입히는 작업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다만 나와 한 무대에 서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 이안의 영화에서 침묵과 풍경의 공간은 배우의 연기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이안 감독은, 제이크 질렌홀의 표현에 의하면 "침묵의 언어 속에서 유창한" 사람이다.
그의 영화엔 마치 무성영화도 같은, 풍경과 배우의 존재감만으로 이뤄진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데뷔작인 [쿵푸 선생]의 초반 15분은 거의 대사가 없으며,
[아이스 스톰]의 마지막 15분도 거의 무성영화에 가깝다.
이처럼 그는 배우와 환경 사이의 묘한 매치를 통해 분위기를 만들어나간다.

초기 3부작을 끝내고 [센스 앤 센서빌리티]를 찍을 때,
이안은 현장에서 배우들과 큰 갈등을 빚었다.
배우들은 여러 제안들을 했는데, 중국적 전통에서 이것은 감독의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일 수 있는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엠마 톰슨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안의 리더십은 배우들을 침묵 속에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카메라 앞에서 벌어질 일들을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이미 어떤 장면을 가지고 있었고, 배우들이 자신의 그 장면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오랜 친구이자 [결혼 피로연]의 시나리오를 함께 썼던 닐 펭의 말처럼 이안 감독은 "자신만의 템포를 가진 아티스트"다.

이안은 영화에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 즉 '기'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기'는 배우뿐만 아니라 배우들을 감싼 환경에도 흐르는 것이며,
이안 감독은 그것이 원활하게 흐를 때 좋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영화 속에선 배우의 몸과 제스처와 포즈가 침묵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배우들은 스스로 움직임과 공간을 찾게 되고, 그 공간 안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이안의 배우들은 표현을 위해 몸 전체를 사용해야 한다.
단지 순간의 표정이나 목소리만 쓰는 수준으로는 이안의 비전을 따라갈 수 없다.



테마 8. 중국적인 것

[양산백과 축영대]와 [와호장룡].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영화들을 꼽을 때 그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로마](1972),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1953),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1960),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1962),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만 세 번을 보았다는 마이크 니콜스의 [졸업](1967) 등을 꼽지만,
그에게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홍콩의 이한상 감독이 만든 [양산백과 축영대](1962)다.
 
집안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한 연인이 죽은 후 한 쌍의 나비가 돼 사랑을 이룬다는 내용으로 영화,
TV 드라마, 경극은 물론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중국 내에 널리 알려진 스토리.
이한상의 영화는 대만에서 1963년에 186일 동안 상영되며
타이페이 인구의 90퍼센트에 달하는 72만 장의 티켓이 팔릴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아홉 살 소년이었던 이안은 그 순수함에 매료되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항상 [양산백과 축영대]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순수한 감정을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 같다.
무엇을 영화로 만들든, 난 그때 그 감정을 업데이트시키고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와호장룡].
어떤 의무감 앞에서 억압되는 감정과 희생적 사랑이라는 테마는 [양산백과 축영대]와 [와호장룡] 사이의 공통점이다.

"나는 그것(억압되는 감정과 희생적 사랑)이 가장 위대한 중국적 테마라고 생각한다.
중국인들에게 그것은 핏속에 흐르는 그 무엇이다.
감정을 숨겨야 한다. 그것 자체가 예술이며 메타포이며 상징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억압된 사회일수록, 그것은 감정적 배출구가 된다.
그것은 두 영화의 핵심이다.
억압된 감정의 소망.
그것이 바로 '장룡', 즉 '감추어진 용'이다."
이런 감정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드러난다.
적절하게 표현할 언어를 찾을 수 없는 사랑.
이처럼 이안 감독의 영화 속에 흐르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테마 9.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겸손함

[라이드 위드 데블]과 [브로크백 마운틴].
가장 미국적인 배경의 이야기를 선택해, 그 안에서 균열과 전복을 꾀하는 이방인 이안 감독.
 
이안 감독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이방인으로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웬만한 미국 감독들도 지니지 못하는 미국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워터게이트 시대를 다룬 [아이스 스톰],
남북전쟁 시기의 서부극인 [라이드 위드 데블],
우드스탁 페스티벌을 배경으로 한 [테이킹 우드스탁],
1960년대 이야기인 [브로크백 마운틴] 등은
 
'directed by Ang Lee'라는 크레디트를 지우면,
미국 감독이 연출했다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소재의 영화들이다.
심지어 그는 제인 오스틴 소설을 각색해 훌륭하게 영화화하기도 한다.

이런 능력에 대해 시사주간지 <타임>의 평론가 짐 포니워직
"이안은 각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의 스타일을 내러티브에 맞게 리메이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자신의 개성을 억누를 수 있는 감독이다.
그는 연출을 하는 데 있어, 일종의 겸손한 태도가 있다.
그는 영화가 필요로 하는 더 큰 관심사를 따라 자신의 개성을 억누른다."

하지만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판이한 미국에서 미국적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좋아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 배우들과 함께,
미국의 문화에 대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의 모든 조각들을,
그것이 아주 작은 조각이라 해도 굉장히 세밀하게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힘든 작업"이라는 고백처럼, 이러한 영화에선 엄청난 준비와 노동이 요구된다.

[와호장룡](왼쪽 사진)은 반권위적이라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색, 계]는 성 묘사 때문에 중국에서 일부를 삭제한 후 상영되어야 했다.
개봉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원판을 보기 위해 홍콩이나 대만의 극장을 찾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카멜레온처럼 강한 적응력을 지닌 순응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항상 주제적으로나 스타일적으로 위험한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과 미지의 영역 사이에 있는 길을 기꺼이 걸으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온 것이다.
대학 진학 시절부터, 유학 시절과
6년의 백수 생활을 통해 숱하게 인생의 좌절을 맛본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뛰어난 감독이 37세의 나이에 겨우 데뷔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쿵푸 선생]을 찍을 때
그는, 완전히 다른 무협영화를 꿈꾸고 있었고 10년 후에 그 꿈은 [와호장룡]으로 나타났다.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작품을 만드는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으며,
워터게이트 시대나 베트남 전쟁 시기 혹은 남북전쟁 같은 불안한 시기가 자극하는 강렬한 감정을
영화에 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동성애와 같은 정치적 이슈를 피해가지도 않으며,
 [색, 계] 같은 파격적인 스타일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해
"실생활에선 활기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나에겐 취미 생활이 없다.
어쩌면 나에겐 사생활이 없는 셈"이라고 말하는 이안 감독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토록 심심한 삶을 사는 이안의 영화 속엔, 마치 용암처럼 강렬한 드라마가 들끓고 있다.



테마 10.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3일의 경험은 엘리어트를 변화시킨다(왼쪽 사진).
이안 감독(오른쪽 사진)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하나를 꼽으라면 무엇일까.
 
이안 감독은 단정적으로 말한다.
"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억압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는 갈등에 대한 영화를 만들길 원한다.
왜냐하면 갈등에서 오는 긴장감은 캐릭터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인물들이 지닌 공통점은 바로 억압과 갈등이다.
특히 그는 억압을,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행동하기 원하는 것과,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한 솔직한 욕망 사이의 투쟁으로 본다.
그리고 그 투쟁에 의해 인생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테이킹 우드스탁]의 엘리어트는 좋은 예다.
그는 아들로서의 의무 때문에 부모의 모텔을 지키지만, 자신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집을 떠나 LA로 가고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엘리어트가 자신을 억누르는 의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러한 변화 과정은 그의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초기 3부작의 아버지가 자식 세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듯,
 [색, 계]에서 사랑의 감정이 흔들리듯, 그의 영화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

"나는 모든 것을 불신한다.
당신이 지금 믿고 있는 것들은 변할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의 핵심이다.
어쩌면 내 관점은 약간은 도가적인 것이다.
세상이 변할 때, 당신은 그것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변한다는 그의 생각은 물론 자신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 집안을 돌보았으며,
두 아이가 태어나고 40세가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변했다.
이후 승승장구했지만
[헐크]의 실패는 그에게 엄청난 좌절을 안겨주었고,
바로 그 순간에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나 초심으로 돌아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사실은 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믿길 원하며, 그 어떤 것이 미래를 보장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세상은 변한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미래에 대한 보장을 추구하는 것, 하지만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 영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