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 유역 주도권 다툼을 할 무렵,
광장동 아차산(峨嵯山) 일대는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장악하면서 삼국의 유물이 공존하는 곳이다.
해발 200m에 위치한 아차산성((阿且山城·사적234호)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도읍을 지키는 요새였다.
[삼국사기]에는
“책계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해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에 내려 최근 새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아차산 입구, 생태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에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동상이 있다.
고구려 평원왕에게는 울보인 딸, 평강이 있었다.
왕은 딸이 울 때마다 “자꾸 울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며 겁을 주고 달랬다고 한다.
공주가 자라 혼기가 되자
권문세족 고씨(高氏) 집안으로 왕이 시집보내려 했으나 공주는
“나의 신랑은 온달”이라며 궁을 뛰쳐나온다.
이후 온달을 만나 부부가 됐다.
평강은 온달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훌륭한 장군으로 만든다.
이후 온달 장군이 신라에 뺏긴 한수 이북의 땅을 두고 싸우다 전사한 곳이
아단성(阿旦城), 즉 아차산성이라고 전해진다.
아차산에는 지금까지 고구려가 160여 년간 주둔하며 쌓은 군사 시설(보루군)도 17곳이 남아 있다.
또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연화문와당의 흔적도 보인다.
와당은 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이다.
연화문와당은 여기에 연꽃무늬를 새긴 것으로 고구려 궁궐 등지 지붕에 많이 썼다.
북한 지역에서만 출토됐으나
지난 2004년 아차산에서 6세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3점이 처음으로 나왔다.
이곳에는 보루군과 아차산성을 비롯해 남한에서는 가장 많은 고구려의 유물·유적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