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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선의 마지막 국모이거늘…”

강개토 2011. 8. 30. 18:28

명성황후 진영 6년 끝장 추적기

월간중앙

 

 

<삼천리> 1930년 7월호 ‘90만원 손배소’ 기사에도 명성황후 평상복 사진 실렸다
러시아 토카레프 교수의 1983년작 명성황후 초상화는 어떻게 그려졌나
1987년 발간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의 명성황후 초상은 오류


 

 

본지가 끝장 추적으로 명성황후로 단정한 사진.

이승만, 장도빈의 책에 이어 이번에 <삼천리>에 실린 것을 찾아냈다.

 

<월간중앙>이 새로이 명성황후의 사진 두 장과 초상화를 좇았다.

먼저 유력 월간지 <삼천리> 1930년 7월호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을 공개한다.

<삼천리>는 왜 당대 최고의 정객 이용익의 90만원 손해배상소송 기사에 명성황후 사진을 실어야 했나?

다른 하나는 최근 인터넷에 오른 색다른 명성황후 초상화 한 장이다.

러시아 세르게이 예브게니예프 토카레프 교수가 이 그림으로 전시회까지 연 사연을 추적했다.

토카레프가 초상화의 밑그림으로 삼은 명성황후의 사진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머지 한 장.

이미 오래전 발간된 조선풍속 사진집에 올랐지만 진위 논란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마치 “내가 당신들이 찾던 그 명성황후라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역시…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자객의 칼을 맞고 대한제국의 명성황후가 비명에 갔다.

본명 민자영(또는 아영, 1851~1895). 만 44세의 나이였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둘러싸고

당시의 국제정세와 시해 상황 등은 대개 밝혀졌지만 사진이나 초상화는 아직 진위가 불분명하다.

종래 못 보던 황실 여인의 사진이 등장하기만 하면

곧장 명성황후냐, 아니냐의 논란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맞다/아니다’ 논쟁은 급기야 사진 자체가 ‘있다/없다’로 치닫기도 했다.

기자는 <월간중앙> 2005년 5월호와 2006년 8월호에 두 차례 명성황후 사진 문제를 다루었다.

그때까지 제기된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 논란을 정리하면서

이번에 새로 발굴한 사진과 새로운 주장을 쓸어 담았다.

명성황후 떠난 지 116년
명성황후의 얼굴을 기억하는 생존자만 있다면 답은 간단히 정리될 일이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지 116년이 지났다.

얘기가 공전하는 근본적 이유다.

명성황후 추적기를 게재한 뒤로

그동안 몇 개의 제보를 접했지만 기자는 성급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또다시 밑도 끝도 없는 논란만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단서가 잡혔다.

그 확인 작업은 멀고 험했다.

약간의 오기도 발동했다. 이번 기회에 그 추적의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또한 새로운 주장과 논란의 시작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새로운 문제 제기는 이 글의 끝에서 시작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기자는

새 사진과 초상화,

그리고 이미 논란이 됐던 사진을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논하고 정리할 예정이다.

2005년과 2006년의 검증 작업을 반복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대신 글의 전개에 필요한 부분은 끌고 왔다.


1. <삼천리> 1930년 7월호는 명성황후 사진을 왜 실었나?
90만원 손배소 기사에 실려 세인의 관심을 끌다


지난해 어느 날,

월간지 <삼천리> 영인본을 뒤적이던 기자는 한 장면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로 명성황후 사진이었다.

1930년 7월호 18쪽.

일세(一世)를 경동(驚動)시키던 괴걸(怪傑), 이용익 씨의 90만원 사건’이라는

헤드라인이 달린 이 기사는

‘제일은행에 예금한 돈은 어찌 되나?

동양의 풍운아를 싸고도는 극적 광경(光景)’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우선 사진. 이용익과 그의 손자 이종호 위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은 이미 진위 논란의 대상에 올랐던 것이다.

다만 눈매가 기존 것보다는 선명한 대신 평상복의 매무새가 흐려 보였다.

이 사진은 이승만(1875~1960) 전 대통령의

<독립정신>(1904년 발간)에 게재돼 맨 처음 세상에 나왔다.

기자는 사학자 장도빈(1888~1963)<대원군과 명성황후>(1927년 발간)에도

같은 사진이 실렸음을 처음 공개한 적이 있다. 그

러다 같은 사진이 <삼천리> 1930년 7월호에도 실려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삼천리> 표지와 1930년 7월호 18쪽.

윗쪽은 명성황후 얼굴 사진만 따서 옮긴 것이다.

 

과거 이 사진의 진위 논란이 벌어진 핵심적인 이유는 평상복에서 비롯됐다.

전문가들은 “명성황후 처녀시절이다”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했을 무렵이다”

등으로 추론하면서도

“명성황후가 아닐 수 있다”

는 점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천리> 건과 관련, 지금까지의 논란과는 다른 측면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삼천리> 기사는 이용익 이름으로

제일은행에 맡겨진 33만원이 부당하게 황실이나 친일세력으로 인출된 사실에

손자 이종호가 90만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는 게 골자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기사에 명성황후의 얼굴 사진을 등장시켰을까?

함경북도 명천의 서민 출신인 이용익(1854~1907)은 청

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와서 순박하면서 외향적이어서

민영익과 고종의 눈에 들어 하급관리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러다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장호원으로 피신하고

이후 8월에 환궁하는 과정에서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이로써 이용익은 황실의 신뢰를 받아 측근으로 발탁됐고,

명성황후 사후인 1897년엔 황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의 수장에 올랐다.

그 후 정치적 굴곡을 겪기도 했지만 탁지부와 군부의 대신까지 지냈다.

<삼천리>의 해당 기사를 살펴보자.
“그(이용익)

봇짐에 (함경남도 갑산금광에서 일하며 모은 금을) 돌돌 말아서

어깨에 지고 서울 대궐을 향하여 천리길을 걸었다.

그 금덩이를 나라에 바치어 국고로 쓰자는 실로 놀라운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임금(고종)은 금을 받으시고 이용익을 부르셨다.

본즉 말에 꾸밈이 없고 기골이 장대하며 성격이 걸걸하여

가히 나라가 쓸 수 있는 인재라고 생각하였음인지 즉시 대궐문 수문장의 벼슬을 주시었다.

그로부터 이용익은 명성황후를 뵐 기회가 많았고 명성황후께서도 각별히 믿으시게 되었다.

이러할 때 하루는 경복궁 안에 난리(1882년 6월 5일 임오군란)가 났다.

섭정을 접고 공덕리 산장에 계시던 대원군께서

구름같이 병마를 몰아서 경복궁 안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당시 정권은 거지반 동양의 여걸이라 일컫던 명성황후의 수중에 있던 때임으로

대원군은 황후를 내쫓고 친히 옛날과 같이 대정을 섭람하려 함이었던 것이다.

황후 모시고 나는 새와 같은 걸음으로…
불의에 변을 만난 황후의 신변은 실로 위태하였다.

만일 촌각이라도 지체하신다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를 지경이었다.

밤은 삼경, 천지는 고요하나 대궐 안은 물 끓듯 소란하였다.

황후를 모시던 비빈들은 그만 어쩔 줄 모른 채 발만 동동 굴리며 울 뿐.

침전의 낭하에도 슬프고 놀라서 우는 울음소리가 처량하고

궁녀와 시녀들이 찾던 금은옥패들이 떨어져 마지막 비참한 날을 당한 듯한 그때,

어떤 6척이나 되는 장한이 나는 새와 같이 부복하며 이 위란을 구할 맹세를 하였다.

그러고는 황후를 모시고 왕궁의 그 높은 담장을 뛰어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이용익인지 더 물을 여지가 없으리라.

그날 밤 황후를 모시고 그는 실로 나는 새와 같이 잽싼 걸음으로 육조 앞을 지나고

동대문 밖을 나서 동관을 뒤에 두고 광나루로, 송파로 끝끝내 단숨에 황후의 고향인 여주읍에까지 이르렀다.

황후를 모시어 땅에 내려놓자 멀리서 첫닭이 울며 먼동이 훤히 떠오르더라 한다.

 그 하룻밤 사이 실로 백여 리를 갔던 것이었다.

비극이라기에는 너무 슬프고 희극이라기에는 너무나 엄숙한 궁변(宮變)이 있은 지 얼마 아니 있어

세월은 다시 순하게 흐르게 되어 명성황후께서는 다시 환궁(1882년 8월 1일)하시었다.

그때 황후께서

이용익의 충성과 사내다운 기개에 깊이 감동하였음은 물론이라

환궁하시자 어느 고을 군수를 시키셨다가,

다시 북청부사를 시키셨다가,

다시 오래지 않아 궁궐에 불어시어 전국 금광의 세감(稅監)을 시키셨다.

그래서 이용익은

옛날 돌아다니던 갑산금강에도

가끔 가서 송아지 같은 금덩이를 많이 채굴하여 나라에 바치었다 한다.

그런 뒤에 순풍에 돛 달았다고 할까?

세상에 드물게 보는 영달을 하게 되어

어떤 때는 내장원경에 군부대신에,

어쨌든 유명한 벼슬 여덟 개인지 아홉 개인지를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삼천리>의 기사는 그의 위세를 더 설명한 연후에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그는 걸물이라

자신의 경륜을 어느 정도 휘두르게 되자

이제는 민간의 지사들과 결탁하여 학교와 개화기관을 많이 만들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실로 근세 교육의 개척자라고 할 이종호 씨도 이러한 이해 있는 조부(이용익)를 가지지 못하였다면

그 사업에 그렇게 거액의 자금을 쓰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다 한말의 어지러운 풍운에 그는 몸을 국외로 멀리 피하였다.

그때 남은 돈이 제일은행에 맡겨진 삼십사만원의 현금이었다.

 

그 돈을 그냥 국내에 떨궈두고 간 것은 손자 이종호 씨의 사업을 도우려 함이었는지

뒷날 다시 서울 땅을 디디어 사용할 각오를 하였음인지 혹

은 뒤를 따르는 검은손이 너무도 급하매 미처 찾을 틈이 없었던 것인지

의문을 남긴 채 거액 사십만원 돈이 은행의 금고 속에 깊이 잠기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을 놀라게 한 구십만원(손해배상소송)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가지 변이 났다.

명치 사십이년(1909년) 술해년 시월에 이등박문이 하얼빈에서 죽었다.

이종호 씨는 그 사변의 혐의자로 잡히어 감옥에 갇혔다.

그러다 혐의가 풀리어 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이에 이종호 씨도 안에 있지 못할 몸임을 알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 북경에 갔으나 거기 역시 안전치 못하므로 다시 옮기어 청도를 거쳐 상해로 갔다.

몇 해 있다 다시 북경과 상해에 나왔다가

상해에서 일본 관헌에 잡혀 서울로 들어와서는 거주 제한을 받고 고향인 명천에 갇혀 있었다.

이것이 요행히 풀려 다시 서울에 몸을 드러냈을 때 생각한 것이 저금을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동경으로 건너가 각 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거기서 송병준을 만났다.

송은 옛날 그가 내무대신 때

이 돈을 먹으려고 책동하여 온갖 음모를 다한 일이 있었기에

이씨와는 껄끄러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때 송은

‘과거 그 돈에 대하여 내가 불측한 마음을 먹었으나

다 잘못하였으니 그때 감정은 물에 씻어버리고 이제부터는 그 돈을 찾는 데 성의를 다하겠노라’

하고 잘못을 사죄하기까지 하였더라 한다.

그러나 송병준은 얼마 있지 않아서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이종호 씨는 결과가 시원치 못하여 도로 동경으로부터 나왔다.”

당시 신문·잡지의 유일 보관용 사진 가능성
제법 긴 인용을 통해 사건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기사를 소상하게 옮긴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삼천리>를 통해 명성황후의 얼마 되지 않는 기록을 보완하는 의미,

다른 하나는

희대의 ‘90만원 손해배상소송’ 사건과 관련된 인물 3인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뜻이다.

글의 표제 부분에 세 사람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주목할 점은 해당 기사의 성격이다.

다시 말해 <삼천리>는 손해배상청구와 관련된 민감한 글에서

사건과 연관된 명성황후·이용익·이종호 세 사람의 얼굴 사진을 게재했다.

시사잡지의 성격상 그 나름대로 엄정한 검증을 거쳐 사용한 사진일 거라는 추론이 우선 가능하다.

만일 그 사진이 잘못 게재됐다면

기사의 이해 당사자나 관련 인물이 상당수 생존했을 무렵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문제 제기가 있었다면 <삼천리>는 이후

발행호에서 정정기사나 사과기사를 실었을 공산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기자는 <삼천리> 1930년 8월호부터 1931년 7월호까지 1년치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해당 기사의 사진을 언급한 경우를 찾지 못했다.

사실 앞서 이 사진을 실었던 이승만과 장도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당대 가장 뛰어난 지식인으로 통했다.

따라서 그들이 아무런 검증이나 확인 절차 없이

명성황후 사진을 마구잡이로 갖다 썼을 리 만무하다.

그런 점에서 평상복 착용 사진이라는 이유로

부정적 평가를 받거나 논의에서 배제했다면 부당한 판단이었다.

특히 이번 <삼천리> 건으로 이 사진의 신뢰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런 추론도 가능하겠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 단행본 출판사에서는

딱 이 한 장의 사진을 명성황후의 진본 사진으로 확보해 기

사나 글의 필요성에 따라 시각자료로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2 . 어느 러시아 교수가 그린 새 초상화 원본사진은 어디에?
토카레프, 논란의 사진 인물을 서구의 시각으로 재현


올해 초 기자는

인터넷을 검색하다 우연히 명성황후 새 초상화를 발견했다.

며칠 동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동안 ‘상궁이냐, 명성황후냐’ 논란의 중심에 섰던 여인처럼

어여머리에 떠구지까지 한 모습은 물론이고 중후한 얼굴의 선과 눈매, 코 등 느낌이 범상치 않았다.

어여머리는 조선시대 때 상류층 부인들이 예장용으로 하던 모양이다.

떠구지는 의식 때 쓰던 목제의 큰머리로 하나 혹은 두 개의 긴 비녀가 꽂힌 게 특색이다.

세르게이 예브게니예프 토카레프(모스크바 부기크 영화대학) 교수가 그린 초상화다.

정작 기자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초상화의 작가, 아니 그의 국적이었다.

명성황후의 사진 논쟁 때마다 따라다니던 말이 떠올랐다.

명성황후의 진짜 사진이나 초상화는 러시아 어딘가 있을 공산이 가장 높다.

따라서 세월이 흘러 끝내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은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300쪽짜리 비밀문서에 가장 소상하고 정확하게 드러났다.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작성해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건이다.

사건의 유일한 외국인 목격자로 도면까지 그려 증언록을 썼던 사바틴 역시 러시아인이었다.

그렇다면 토카레프 교수는

분명 어떤 사진자료를 옆에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혹시 그의 탁자 위에는 현지의 비밀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낡은 사진 한 장이 올라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명성황후 사진을 찾아 나선 긴 추적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바로 그 사진을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인터넷에 올라온 초상화의 출발 지점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진원지는 2006년 11월 서대문형무소가 연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50인 인물전’이었다.

전시회를 관람했던 한 사진작가가 전시된 초상화 50점을 일일이 사진으로 담아 블로그에 올렸다.

이후 퍼나르기를 통해 다른 블로그들로 옮겨갔다.

다른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기실 50점의 초상화가 처음 소개된 때는 2003년 12월이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추적 결과 당시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한·러 수교 13주년 기념행사로

‘한국 근현대사 50인 인물전’을 대사관 홀에서 하루 일정으로 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다음 날에는

국회의원회관에서 이틀 일정으로 전시됐고

그 뒤로도 모스크바와 서울을 오가며 간혹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우리는 2002년과 2003년경 명성황후나 독립운동가 관련,

어떤 사진도 러시아 교수 등에게 제공했다는 기록이 없다.”

(독립기념관 최경민 자료정보팀장)


“50인 초상화에 학문적 논평을 해 기사로 나온 적은 있지만

초상화의 제작이나 전시회 등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수원대 사학과 박환 교수)


“러시아 쪽 관련 분야 연구자로서 대단히 흥미로운 그림이다.

그러나 그 초상화와 관련해서 어떤 사전·사후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국사편찬위원회 강인구 연구원)

토카레프 교수 2007년 1월 사망 소식
사진의 출처가 자칫 미궁에 빠질지도 몰랐다.

초상화 원작자인 토카레프 교수와의 접촉이 가장 시급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하기 직전,

마침 시인이자 소설가인 유윤석 황금가지 대표와 연락이 닿았다.

“2006년 11월 토카레프 교수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연 ‘독립운동가 50인전’ 참석차 서울에 왔을 때 제가 독점 인터뷰를 했습니다.

 

50인 초상화 작업을 주도한 김동임 동임국제문화그룹 대표가 소개했지요.

그런데 그 인터뷰를 실을 월간지 발행이 차일피일 늦춰지면서 토카레프 교수에게 마음의 짐을 졌지요.

그런데 2007년 3월인가, 4월인가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해 1월에 그가 모스크바에서 교통사고로 작고했다는 거예요.

저로서는 고인에게 큰 빚을 진 셈이지요.”

당시 58세.

초상화 원본 사진의 결정적 단서를 쥔 토카레프 교수의 사망 소식에 크게 낙담했다.

러시아 대사관에 접수하려 준비했던 취재 요청서는 일단 접었다.

그 대신에 김동임 대표를 찾아 나섰다.

극단 동임을 이끌면서

주로 역사의식이 강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려왔던 그는

이상하게도 최근 5~6년 활동사항이 전혀 없고 연락처마저 끊긴 상태였다.

최근 수년간 그가 미국에 체류한다는 흐릿한 소식만 들었을 뿐이었다.

느닷없이 등장한 명성황후의 초상화에 담긴 비밀은 이렇게 묻히나 싶어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유윤석 황금가지 대표였다.

 

“김 대표가 6월 미국에서 돌아와 지금 서울에 머문답니다.”

곧바로 김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극단 일은 물론이고 러시아와의 문화교류사업 등을 모두 접고

미국에 체류하면서 사느라 일을 다 잊어버렸다”

고 말했지만 김 대표는 조금씩 기억을 되살려냈다.

“토카레프 교수가 작고했을 무렵

저도 벌여놓은 문화사업을 정리했습니다.

 명성황후를 포함한 독립운동가 사진은

러시아에서 구한 게 아니라

교보문고에서 제가 구입한 ‘독립운동 사진집’을 작가에게 보내준 겁니다.

처음 그는 사진만 보고는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고 하다,

저의 설득으로 작업에 착수했는데 나중에는 초상화 작업에 푹 빠져들었죠.

100여 년 전 국제정세에서 한국과 러시아가 이런 관계를 맺었느냐며 놀라기도 했지요.”

오랜 논란 불렀던 바로 그 사진이 원본
김 대표는 그 사진집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미 나와 있는 사진집에 명성황후의 또 다른 사진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진위 논쟁을 하면서

이미 공개됐으면서도 가장 유력해 보이는 사진을 빠트렸단 말인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1999년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로 주목을 받은 미술 전공의 목수 김진송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1900년경부터 1945년까지 발간된

잡지의 글·삽화·만화를 어렵게 수집해 우리의 현대성을 포스트모던한 시각으로 설파하면서

“뒤늦게 흩어진 자료를 모으기가 힘겹지만,

똑같은 시간에 어떤 소중한 자료는 우리 곁에서 다시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기자가 교보문고를 뒤져 찾아낸 사진집은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1990년, 서문당 발간) 상·하권이었다.

거기에 실린 2장의 명성황후 사진과 초상화는 이미 진위 논쟁에 올랐던 대상이었다.

 

김 대표는

“같은 사진집인지 보지 않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직접 가서 확인해줄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날, 교보문고에서 만난 그는 먼저 도착해 손수 사진집을 구입해 기다리고 있었다.

 

“7년 전에 사서 보낸 사진집이 아니에요.

그러나 사진은 바로 여기 실린 것과 동일합니다.”

 

그가 책을 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진은

그동안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로 그 사진, ‘상궁이냐, 명성황후냐’의 주인공이었다.

사진과 초상화를 나란히 펴놓고 대조하자니 얼굴의 선뿐만 아니라 연령대도 확연히 달라 보였다.

 

김 대표의 말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고 그린 동양인은 아무래도 좀 달리 표현되나 봐요.

전체적인 느낌이 이국적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당시 명성황후 초상화를 같이 봤던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초상화에서 명성황후 눈매가 좀 사납게 그려진 것 같다고 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새로운 초상화를 쫓던 기자의 발길은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러나 그 초상화의 밑 사진을 확인했다는 게 그나마 작은 성과였다.

 

3.
우연히 발견한 사진, 그리고 결정적 충격

“내가 명성황후라네”라고 말하는 듯


내친김에 기자는 여러 사진집을 다시 뒤져보기로 했다.

교보문고 바닥에 주저앉아 이틀을 꼬박 보냈다.

그러다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정말 숨이 멎는 듯했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1987년, 서문당 발간) 118쪽.

‘왕가’를 제목으로

한 장(章)고종·순종·대원군·엄비(영친왕 생모)·순종황후(윤씨, 순종비)에 이어지는 쪽에서

명성황후는 어느 제조상궁의 사진과 나란히 게재돼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는 여걸의 카리스마를 풍기는 여인.

그는 마치

“내가 진짜 명성황후라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라며 그간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논란을 나무라는 듯했다.

 

예전의 명성황후 사진이나 초상화가

죄다 뭔가 부족하고 흠집이 있어 보였지만 이 사진은 전혀 딴판이었다.

 

입은 당의(조선 여인의 예복, 궁중에서는 평상복으로 입었음)

품격과 머리에 쓴 관 장식, 배경에 놓인 병풍의 용 문양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표정과 연령 등 모두가 황후의 품격에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어 보였다.

예컨대 지금까지는 이런 지적이 있었다.

 

“사진의 여인이 신발과 버선을 드러내고 발을 벌린 채 있으니 황후의 품격에는 맞지 않다.”

“평상복이 마음에 걸린다.”

“곱지만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얼굴상, 황후의 기품이기엔 뭔가 모자라 보인다.”

특히 이번 취재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한 조선시대 복식 연구가의 설명을 듣자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가례나 생일 등 큰 행사에

어여머리(於由味, 조선시대 때 상류층 부인들이 예장용으로 하던 머리 모양)를 하는 건

왕실의 풍습이지만

떠받치는 비녀라 해서

떠구지, 즉 의식 때 쓰던 목제의 큰머리로 하나 혹은 두 개의 긴 비녀가 꽂힌 머리 장신구를 둘러쓴 여인을 놓고

명성황후 논란을 벌인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떠구지 쓴 상궁의 기념사진 놓고 논란 거듭한 셈

 

 

평소 명성황후에 관심이 없어 그런 논란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그는

공 연히 논란에 휩쓸리기 싫다며 실명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떠구지를 한 여인의 사진은 궁녀나 상궁으로 봄이 마땅하다”

면서

“논란의 사진은 의자의 배치 등으로 보아 초기 서양식 사진관에서 찍은 상궁의 기념사진 같다”

고 추측했다.

기념사진.

사실 그 사진이 한국을 알리는 서양의 이미지 컷이었다는 주장은 과거에도 있었다.

 

1900년대 초 프랑스에서 발행된 알레베크(당시 한국에 머물렀던 프랑스어 교사)

엽서 세트 안에 이 사진이 포함됐고,

초콜릿·비누·화장품 등을 팔면서 끼워주는 조그마한 사진 형태의 상품 카드로

서구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됐다.

미술사학자 이돈수 씨는

 

“뮈텔 등 프랑스 선교사들이 자국에 조선의 현황을 보고할 때

쉽게 동봉할 정도로 손쉽게 구했던 사진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조선 여인의 이미지 컷으로,

상업적으로 유통된 사진이지 명성왕후의 사진은 아니다”

라고 평가했다.

기자는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에서 찾아낸 사진 역시 출처를 확인해야 했다.

 

사진집을 펴낸 언론인 출신의 최석로 대표는

 

“하도 오래되고 책자나 사진집은 물론이고 개인이 갖고 있다 출판사로 넘긴 것 등

여러 경로로 들어온 사진을 주제에 맞춰 정리해 싣다 보니 출처를 일일이 챙기지 못했다”

“다만 명성황후 사진이 나가면 논란에 휩쓸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전해진다는 의미의 전(傳)을 붙였다”

고 말했다.

여기에 영국인 비숍 여사의 명성황후 인상 묘사를 들이대면 더 근접해진다.

영국 고위 성직자의 딸이었던 그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래 1897년까지 네 차례 조선을 답사하면서 명성황후를 네 번 만났다.

 

그런 점에서 명성황후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고 눈이 가늘다,

눈에 실핏줄이 서 있다,

코가 오똑하고 입이 야무지다 등 전해지는 얘기보다 더 높은 신빙성을 부여할 만하다.

비숍이 남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에 언급된 명성황후의 면모를 옮겨보자.

엘리자베스 키스의 수채화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시해 당시 만 44세)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 묘사를 우리가 논란을 일으키는 ‘정장을 한 궁중 여인’ 사진으로 옮겨가보면 어떨까?

그간 서양인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념사진 등에 아무렇게나 써넣은

명성황후 운운한 흔적을 놓고 ‘진짜/가짜’를 논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다.

그럼에도 더 구체적인 사진의 확인작업이 필요했다.

몇몇 전문가에게 문의를 한 상태에서 정작 해답은 한 독서가로부터 날아왔다.

그는

“그것은 사진이 아니라 수채화이고

일제 강점기 한국·일본·중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곤 했던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올드 코리아(Old Korea)>에 실린 것”

이라며

번역본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2006년)를 건네주었다.

키스의 그림 66점과 글이 실린 책 199쪽을 보면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에서

‘전(傳) 명성황후’ 제목을 달고 있었던 같은 작품이

‘궁중 복장을 입은 공주(The Princess in Court Dress)’라는 제목으로 게재돼 있었다.

 게다가 글에서 화가는

“서울에서 왕족으로 보이는 한 귀부인을 만나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스케치를 했다.

예전 공주였으며 지금은 대학교수와 결혼한 가정주부였다.

반짝거리는 소재의 당의를 입었고 검은 머리에는 황금새 모양의 비녀를 꽂았다”

 적었다.

흥미로운 것은 재미 원로학자이면서

엘리자베스 키스 작품의 열렬 수집가인 송영달 전 이스트 캐롤라이나대 교수가 단 주석이었다.

그는 키스와 그의 작품을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 책을 번역 ·소개하기에 이르렀는데

해당 그림에

“이 여성은 순종 비 순정효황후의 숙부인 윤덕영의 딸로

당시 연희전문의 교수 유억겸(유길준의 아들)의 부인”이라는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대 그림과 사진 및 자료 수집 전문가인 재미 작가 이충렬 씨는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2011년)에서 이 부인을 윤덕영의 딸이 아니라

윤택영(순정효황후의 아버지, 윤덕영의 동생임)의 둘째 딸 윤희섭일 공산이 높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부인은 순종의 처제이며 유억겸은 윤택영의 사위가 된다.

다른 촌수로 순종과 유억겸은 동서 간이다.

아무튼 그림의 주인공은 지체가 높은 신분의 여성임에 분명하지만 명성황후는 아니다.

기자의 명성황후의 사진 추적은 여기까지다.

길고도 지루한 길을 지나

결국 <삼천리>에 실린 것 하나 새로 건지며 ‘평상복의 명성황후’로 단정할 수 있었다.

당대 최고의 여성으로 품격을 갖춘 예복 차림의 명성황후 사진은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짜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