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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고우영 화백

강개토 2008. 2. 26. 17:33

 (서울=연합뉴스) 박인영 기자 
















<참고기사> 타계한 만화가 고우영씨와 작품세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만화가 한국사회 '국민오락'(national pastime)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이만한 경지로 끌어 올린 1등 공신이 누가 뭐라 해도 이 사람이다.

만화와 함께한 시대를 풍미한 그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5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날 오후 발간된 26일자 일간스포츠신문 제20판에는 거의 전면에 걸쳐 이제는 '유작'이라고 불러야 할 '십팔사략'(十八史略) 연재물 중 제9회 경제(景帝)편이 실렸다.

신문사 측은 이 '십팔사략'의 경우 이미 시중에 전 10권으로 선보인 단행본을 다시 싣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연재가 이뤄질 것이라면서 "현재 제6권째가 연재되고 있으므로 반환점을 돈 시점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만화가 고우영. 그만큼 독자층이 다양한 만화가도 드물다. 성년층에서 청소년층에 이르기까지 그의 팬은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다.

만화가로서 그가 지닌 특장은 무엇보다 익살스러움을 주된 기조로 하면서, 특히 원전이 둔중한 동양고전을 아주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연재가 이뤄지고 있는 십팔사략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 십팔사략이 소설 삼국지 정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시중에 그 이름으로 소개된 많은 책자 대부분이 흥미 위주로 짜깁기한 데서 비롯된 현상일 뿐, 원전은 딱딱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일반에 익숙한 십팔사략은 엄혹하게 말해 원전 십팔사략이 아니라 고우영을 통해 각인된 십팔사략이라고 해야 더욱 정확할 만큼 그가 끼친 영향력은 막강하다.

비슷한 경우로 '삼국지'와 수호지가 있다. 이문열 '삼국지' 이전에 물론 월탄 박종화 손을 거친 소설 삼국지도 꾸준한 독자를 확보하기는 했으나 1978년에 시작한 '고우영 삼국지'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동양고전의 재가공이라는 측면에서 그가 확고한 이름을 구축한 것은 1975년에 연재를 시작한 '수호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출판가에서 원전 완역을 표방한 '수호지'가 야심차게 선보였으나 기대한 만큼 호응도는 따라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호지에 대한 줄거리라든가 등장인물이 한국사회에서 아주 익숙하게 된 것은 역시나 고우영의 만화가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수호지'는 1970년대 하나의 문화현상이었다. 고우영은 그 주인공 '무대'를 뚝 튀어나온 앞니와 마름모꼴 얼굴형, 왜소한 체격으로 희화화ㆍ형상화했는데 이 때문에 유별나게 이 시대 한국에서는 '무대'라는 별명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80년대 초ㆍ중반까지는 중국 고전을 맴돌던 그는 이후에는 한국고전의 현대화에 주력하는 한편 여행기도 손을 댔다. '가루지기전'이나 '아리랑 놀부뎐' 등이 그것이다.

식민치하인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과 함께 귀국했으며 한국전쟁 중에 중학생으로서 피난지 부산에서 '쥐돌이'를 통해 만화계에 등단했으며, 1958년에는 형 고일영의 뒤를 이어 '짱구박사' 집필을 이어받았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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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기사> "은퇴는 없다"던 고우영, 그는 누구인가

[조선일보 백강녕 기자]고우영(高羽榮) 화백은 수호지 삼국지 등 장편 만화를 그려 70년대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02년 대장암이 발병해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항암치료를 받아 한때 머리털이 다 빠지고 거동도 못했지만, 한때 조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져 많은 팬들에게 다시 한번 전성기처럼 그림을 그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간으로 살짝 번진’암세포를 이기지 못했다.

고 화백은 최근 검열에 걸려 삭제당했던 부분을 되살린 복원판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역사 극화들은 에로틱한 상상력과 함께, 날카로운 정치풍자를 빼놓지 않았고, 그 대가로 늘 권력의 감시·통제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평소 "여기저기 지워진 채 인쇄된 내 작품들을 대하면, 내 새끼를 앵벌이시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내 뜻이 오해받았던 부분을 바로잡고 싶어” 복원판을 내놓았다고 했다.

고씨는 최후의 순간까지 "나는 아직 현역”이라며 "창작엔 은퇴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만화가 열전 등의 책도 집필할 생각이었지만 끝을 내지는 못했다.


<참고기사> 국민만화가 고우영 화백 별세



[한국일보]“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 역사의 갈피 속에 숨겨진 감정을 찾아내 이야기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 나의 펜과 내가 지금껏 풀고 있는 숙제이다.”만화가 고우영(高羽榮) 화백이 25일 낮 12시3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7세.

고인은 만화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른도 웃기고 울릴 수 있는 장르임을 실증한 첫 작가였다. 1972년 1월1일 ‘일간스포츠’에 연재를 시작한 ‘임꺽정’의 반역성과 민중성은 유신 치하 젊은이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만화에서의 언어는 파격적이고 시적이었다. 두 번째 연재작 ‘수호지’의 첫 장을 그는 이렇게 열었다.

“재미난 이야기의 노가리를 뿌려 나가겠거니와, 먼저 사두(蛇頭)를 달아, 당시의 시대 배경부터 밝혀두고 가야 쓰겄다.” 고3 담임이 황금찬 시인이었고 결혼식 주례를 소설가 김동리씨가 섰음은 별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만일 그가 생계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일만 없었다면 소설가가 됐을 것이라고 추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고인은 미술 공부를 한 적도, 도제식 수업도 받은 적이 없었으나 만화가였던 형 일영(60년 작고)의 작업을 어깨 너머로 배워, 중학생이던 부산 피란시절 ‘쥐돌이’라는 16쪽짜리 만화책을 냈고,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형의 유작 ‘짱구박사’를 이어 그렸다.

고인은 만주 랴오닝성 선양의 번시(本溪)라는 곳에서 났다. 그래서인지 성정은 대륙적이었고 도전적이고 낙천적이었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걸고 거칠고 능청스러운 ‘고우영류(流)’ 대사들도 어쩌면 작가의 태생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그는 3년 전 대장암 수술 뒤 퇴원해 후배들과 골프를 치다 퍼팅 실수를 한 일이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여기만 나서면 만사가 행복일 것 같더니, 퍼팅 하나 놓치고 나니 세상을 다 놓친 것 같네.” 말 끝에 호방한 웃음을 짓던, 아이처럼 순수하고 누구보다 따듯한 선배였다고 만화가 이상무씨는 애도했다.

고인은 ‘일지매’ ‘초한지’ ‘삼국지’ 등 연재만화와 ‘십팔사략’ ‘고우영의 중국만유기’ 등 수십 편의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남겼다. 한국만화가협회 15, 16대 회장을 지냈고, 89년부터 한국일보의 이사대우 편집위원으로 시사만평 ‘고소금’을 연재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공로상(98년)과 대한민국문화예술상(2001년)을 수상했다.

유족은 부인 박인희(朴仁姬ㆍ67)씨와 1녀3남. 빈소는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 1호 장례식장. 발인은 27일 오전9시20분, 장례미사는 오전10시 일산 마두동성당. (031)901-4799

 

 만화가 고우영 화백이 25일 낮 12시 3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유족들은 고인이 2002년 수술을 받았던 대장암이 최근 재발,

폐로 전이돼 치료를 받아왔다고 전했다.



▲40년 이상 역사 만화를 그려 커다란 족적을 남긴 만화가 고우영씨의 캐리커처(오른쪽)와 그의 대표작 삼국지

   고인은 1958년 동성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만화계에 입문해

72년 일간스포츠에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특유의 해학과 기지로 성인들을 만화의 장으로 끌어들였고

하루 25칸 안팎의 지면을 차지하며 신문 연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아 왔다.
   만화가협회 22대 회장을 지낸 신문수 화백은 "고인은

'국민 만화가'로 불리며 우리 만화계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라며

"우리 만화계에서 아까운 선배가 떠나셔서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빈소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7일 오전 9시. 장례미사는 오전 10시 일산시 마두동성당에서 열린다.

☎011-9090-8678.
mong0716@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