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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녕대군이 함길도 경성으로 쫓겨간 이후로, 여진족이 <대왕세종>에 본격 등장했다.
<대조영>에서 돌궐족 계필사문의 부하로서 대조영 측에 귀순했던 퉁소도 여진족 장수로 '변신'해서 활약을 펼쳤다.
<대왕세종>에서는 요동수복 문제와 관련하여 여진족 문제가 묘사되었다.
지난 제36부(5월 4일)에서는 양녕대군의 군대가 여진족 토벌을 목적으로 경성까지 진격했지만,
충녕대군 측과 경성 백성들의 저지로 결국 말을 돌려 회군하고 말았다.
한국의 TV 사극에 묘사되는 여진족은 언제나 야만족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전투는 잘하지만 문명은 낮은 종족, 식량지원을 받기 위해 툭 하면 남쪽 민족들을 위협하는 종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이 거란족·여진족·몽골족 등 동아시아 북방민족을 얕잡아 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역사관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자와 농경문화가 없거나 혹은 취약한 종족은 야만족이라고 믿는 데에 따른 결과다.
그러나 '한자와 농경문화가 없거나 취약한 종족은 야만인'이라는 말은 그 야만족들이 한자 외의 다른 문자를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도, 거란족·몽골족·여진족은 자신들만의 문자를 갖고 있었다.
자기들 고유의 문자생활을 누린 종족을 과연 야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동아시아 북방민족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까?
게다가 10세기부터 14세기 중반까지의 4백여 년 동안 동아시아의 주도권 혹은 패권은 기본적으로 북방 민족들의 수중에 있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이 기간 동안 동아시아를 주도(요·금)하거나 혹은 지배(원)했다.
그들이 단지 싸움만 잘하는 야만족이었다면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동아시아 문명권을 주도 혹은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후 시기인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도 동아시아의 지배권은 기본적으로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명나라 시기를 제외하면, 10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다시 말해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기본적으로 북방 '야만족'들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지난 천 년 간의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족의 지배는 그저 '잠깐의 예외'에 불과한 것이었다.
명나라 때의 3백년을 제외하면, 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주인은 기본적으로 북방민족들이었다.
이런데도 북방민족들을 '야만족'이라고 천시할 수 있을까?
그뿐 아니라 동아시아 북방민족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꽤 '교묘한' 민족이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컨대, 거란족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에서는
거란족 지배층이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에게 적절한 '맞춤형' 정부체제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족은 거란족을 통치하기 위한 북면관(北面官) 정부,
한족 등을 통치하기 위한 남면관(南面官) 정부를 두는 이원적 정부체제를 고안했다.
이것은 한족문화를 일정 정도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족문화를 이해하고 또 한족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제제까지 고안한 사람들을 과연 야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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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동아시아 북방민족들의 역량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몽
골의 세계패권이 붕괴된 14세기 후반 이래 조선과 명나라는 여진족의 부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 중심의 세계질서가 와해된 혼란의 틈을 비집고 여진족이 한반도나 중원으로 밀고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진족은 2, 3세기 전만 해도 동아시아를 주도한 경험이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몽골패권 붕괴 직후의 여진족은 아직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조선 및 명나라와 비교할 때, 당시의 여진족은 '포스트 몽골체제'에 대한 내적 준비가 상대적으로 뒤늦은 편이었다.
조선 초기의 요동이 '진공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세계질서 과도기의 어수선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일찍 내부정리를 마친 조선과 명나라는
아직 진공상태에 있는 여진족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두 나라는 여진족을 상대로 한편으로는 회유하고 한편으로는 압박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른바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요동 지역의 여진족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집단,
조선의 책봉을 받는 집단, 조·명 양측의 책봉을 받는 집단으로 3분 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명나라 초기의 국가 편찬 지리서인 <대명일통지> 권89에 따르면,
요동의 184개 지역 중에서 79개 지역의 여진족이 조선의 책봉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의 책봉을 받음과 동시에 명나라의 책봉도 함께 받고 있었다.
명나라와 비교할 때에 조선은 책봉을 받는 여진족을 보다 더 후하게 대접하는 편이었다.
당시 국제관계에서 이루어지던 책봉은 형식적이었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책봉된다 해도 녹봉 같은 것이 지급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조선 국왕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다 해도 녹봉을 따로 받는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여진족 추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명나라와 달리 조선 측은 책봉을 받는 여진족 추장에게 녹봉까지 지급했다.
조선 측의 대우가 더 후했던 것은 꼭 조선의 인심이 좋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선의 흡인력이 명나라의 흡인력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의 위협을 느끼는 강도가 명나라에서보다는 조선측에서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명나라와 여진족 사이에는 이러한 책봉관계뿐만 아니라 전쟁관계도 함께 존재했다.
책봉이 존재하지 않거나 깨진 상태에서는 서로 칼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태종 시기의 경우에는 여진족이 8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범했고, 다음 시기인 세종 때에는 그 횟수가 30회로 늘어났다.
이처럼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까지의 여진족은 자신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는 조·명 양국에 맞서,
때로는 책봉을 받아들이고 또 때로는 군사작전을 감행하기도 하는 등의 맞불작전을 구사하곤 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여진족은 한·중 두 민족을 역사상 가장 친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여진족이라는 공동의 위협 앞에서 조·명 양국은 '경쟁 속의 협력' 혹은 '협력 속의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사대관계가 유사 이래 가장 긴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 전기의 한중관계가 역대 어느 시기보다도 더 긴밀했다는 점은,
명나라가 정복이 아닌 원조를 목적으로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날 것이다(임진왜란).
물론 조선을 지키는 게 명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인식이 작용하긴 했지만, 한족 왕조가 한반도 방어를 위해 군대를 보내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러한 유대를 가져온 핵심적 요인 중 하나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여진족의 발흥에 대한 공포가 동아시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위협이라는 당면 과제가 조·명 양국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여진족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조·명 양국이 상호 갈등하기보다는 상호 협력하도록 만든 핵심적 요인이 바로 여진족의 위협이었다는 점.
그 여진족을 포함한 동아시아 북방민족들이
수세기 동안 동아시아를 주도 혹은 지배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유의 문자생활까지 향유했다는 점.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에, 한국의 TV 사극에서 묘사되는 북방민족들의 이미지는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다는 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단순히 '무식한' 오랑캐로 묘사하기보다는 그들의 문화와 실력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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