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준커피창고

박이추 '보헤미안' 대표

강개토 2009. 10. 21. 04:20

커피의 수도자

요즘 강릉은 ‘커피 도시’로 불린다.

우리나라 핸드 드립 커피 1세대인 박이추(보헤미안 대표) 씨와

커피 팩토리로 유명한 김용덕(테라로사 대표) 씨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을 다녀온 이들로부터 “그 맛이 그립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비밀을 캐러 강릉으로 향한다. 서울을 기준으로, 강릉은 이제 그리 먼 도시가 아니다.

승용차로 2시간 30여 분이면 이 두 ‘커피하우스’에 닿는다.

 

천수림  TOP CLASS 객원기자

 

 

 

 주문진 바다가 보이는 산 속에서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을  꾸려 가고 있는 박이추 선생.

‘보헤미안’의 창가에 앉으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5분 정도만 걸어 내려가면 바로 바닷가다.

커피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

박이추’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평생 ‘커피’라는 존재에 부여한 의미를

읽어 내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도쿄 유나이티드 커피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커피아카데미 과정을 이수한 그는 1988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을 열었다.

일본 큐슈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2세가 한국으로 건너와

생두를 직접 볶고(로스팅), 핸드 드립 커피를 선보이면서

한국의 커피문화에도 새바람이 불어왔다.

보헤미안(www.bohemian88.com)은

 그동안 브라질, 과테말라, 하와이안 코나, 콜롬비아, 케냐,

페루, 쿠바, 도쿄브랜드, 뉴욕브랜드 등 다양한 커피를 선보여 왔다.
 
  그린빈(생두)을

로스팅하는 것은 커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커피전문가들이 각각의 원두 특유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이는 과정이다.

그의 특기인 핸드 드립 과정은 ‘커피의 예술’이라 칭하기도 한다. 만드는 사람의 손맛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드립 커피는 깔때기처럼 생긴 드리퍼에 거름종이를 끼운 뒤

분쇄한 커핏가루를 넣고, 주전자(드립 포트)로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해 내는 방법을 말한다. 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원을 그리듯이 물을 부어 커피를 추출하는데,

추출 속도와 물의 양, 물의 온도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누군가 커피를 어떻게 뽑아야 맛있는지 물어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맛있게 뽑으려 하면 맛있게 나오지 않아요.
 
  ‘온몸과 정신 모두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 후

주전자를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의 힘만 가지고 만들라’고 해요.”
 
  그가 내려 주는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서울, 부산 등 각 지역 커피 애호가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다.

서울 혜화동과 안암동, 강원도 오대산을 거쳐 강릉에 자리 잡기까지

그는 오롯이 커피와 함께하기 위한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너무 앞서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커피’ 뒤에서 한 발짝 정도 떨어져 걷고 싶어요.

그게 함께할 수 있는 길인 것 같아요(웃음).

저는 이상하게 조용한 데가 좋아요. 그렇게 커피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을 찾았던 것 같아요.”
 
  세간에서 한국 커피의 계보를 말할 때

 박이추 씨와

다도원을 운영한 박원준 씨,

절대 미각이라 불리던 박상홍 씨,

융 드립을 하는 서정달 씨를 두고 ‘1서3박’이라 칭한다.

 

3박은 모두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에서 커피를 배워 왔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인스턴트 커피에 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은 ‘다방커피’에 익숙해 있을 때

원두커피를 소개했던 그는 한국 커피계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아 왔다.

 

2000년 그는 국내 최초로

단국대 서울 캠퍼스와 천안 캠퍼스에 커피전문가 과정을 개설,

강의를 시작하면서 한국 커피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한다.

요즘도 그는 ‘강릉커피아카데미’를 통해 커피를 알리고 있다.

그를 수식하는 호칭도 다양하다.

커피 1세대, 거장, 고수….
 
  “아마도 서울과 떨어져 강릉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더 환상을 품는 것 같아요.

1서3박 중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박원준 씨는 돌아가셨고, 박상홍 씨는 미국에 계시지요.”
 
 
  조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에는 이유가 없어요
 
  그가 강릉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혜화동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부터

‘10여 년 후에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리라’는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1991년 영구 귀화했지만 여전히 일본어 특유의 느낌이 남아 있는 발음.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정확히 표현했는지 한 번 더 점검하듯 느릿한 말투였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언제나 ‘정상적인 삶’에서 비껴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채비가 되어 있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브라질에 관한 책을 읽다 브라질로 떠날 궁리도 했다.

그러다 정착한 게 낙농.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삿포로 근처의 한 농장에서 현장 실습을 했다.

그때 일본에는 ‘협동농장’이라는 공동체가 있었는데,

실습을 마친 후 노르웨이든 브라질이든 자원하는 나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도 뜻대로 안 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의 권유로

서울대 이공대 소속 재외국인국민연구소의 여름방학코스에 등록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10월 유신이 나서 웬만한 학생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다시 서울대 어학코스에 등록했다.

그 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한국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굳혀 갔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죠. 조국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엔 이유가 없는 거예요.”
 

 

 

 

  1972년부터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 문막 등지에서 ‘낙농’을 했다.

 낙농업을 하다 보니 땅주인과의 관계, 환경문제로 고민하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일본 잡지에서

유나이티드 커피연구소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고,

문득 ‘커피’에 입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렇게 접한 커피. 그는 커피에 빠져들수록 ‘커피는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커피에는 문화와 철학이 깃들어 있어요.

커피를 배우면 배울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커피에서 감동을 느끼고, 그 다음 단계는 ‘말 없음’ 상태가 되지요.”
 
  얼마 전 그가 내려 주는 핸드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멀리 부산에서 온 손님이 있었다.

일본 커피투어를 하고 싶다고 해서 북해도부터 남난까지 꼭 가 봐야 할 커피하우스 리스트도 뽑아주었단다.

신도 커피하우스를 하고 싶다는 그를 위해 구체적인 조언을 해줬다.

커피와 기타 연주를 좋아한다는 치과의사 손님에게는

해마다 9월에 열리는 일본의 센다이 음악축제에 가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보헤미안’은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아지트처럼 보인다.

 

한여름,

 보헤미안의 조그마한 로스팅 작업장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니,

이상하게도 계절이 ‘가을’에 멈춘 듯하다.

아마도 로스트프로세스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갈색 때문인 것 같다.

할아버지가 지어 주었다는 그의 이름 ‘利秋’처럼 말이다.

9월에는 센다이 음악축제를 보고 삿포로 근처 오타루에 갈 생각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제2의 ‘보헤미안’을 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단다.

보헤미안의 피가 그에게도 흐르는 까닭이다.
 
  사진 : 김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