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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쿠데타'가 유신에 대한 시기심 때문?

강개토 2009. 12. 7. 21:57






드라마 < 선덕여왕 > 이 비담의 난을 향해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다.

백제의 침공으로 일대 위기에 처한 드라마 속의 신라 정국은 조만간 다가올 비담의 난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비담을 미실의 아들로 설정한 < 선덕여왕 > 은 어머니의 야망을 물려받은 비담이 언젠가는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암시해 왔다.

동시에 이 드라마에서는 여왕에 대한 비담의 짝사랑, 김유신에 대한 비담의 시기심이 언젠가는 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오래 전부터 복선을 깔아 왔다.

개인적 동기나 야망이 원동력이 되어 비담이 쿠데타 결행으로 나아갔을 것이라는 점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쿠데타를 낳은 진짜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당시의 국제환경이 신라에게 정세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보낸 역제안

대야성 전투 이듬해인 선덕여왕 12년(643) 음력 9월,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지금의 서안).

장안성 북부에는 당태종(재위 626~649년)이 거처하는 황궁이 있었다.

이 황궁에 다급한 신라 사신이 찾아왔다. 그의 방문 목적은 선덕여왕의 서한을 당태종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 삼국사기 > 권5 '선덕여왕 본기'에 소개된 서한의 내용은 "고구려·백제의 침략이 곧 다가올 것이니 당나라의 군대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역(逆)제안을 내놓았다. 그 역제안에 담긴 카드는 세 가지.

그 셋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주문이었다.

▲제1카드: 소규모의 당나라 군대가 거란·말갈 군대와 합세하여 요동을 치는 방안.

"이렇게 되면 신라가 1년 동안은 곤경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당태종의 말)

▲제2카드: 신라 군대가 당나라 군복을 입고 고구려·백제와 싸우는 방안.

"이렇게 하면 양국이 너희 군대를 당나라 군대로 착각하고 놀라 도망할 것이다."(당태종의 말)

제3카드를 들어보기에 앞서, 처음에 제시한 2가지가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 2가지 카드는 그냥 '농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카드는 소규모의 당나라 군대를 동원해서 요동의 고구려를 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는 게 당태종의 말이었다.

하지만 "소규모로 동원한다"(少發)느니 "1년간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은 이 카드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요동을 치면 고구려가 꼼짝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 될 일인데,

거기다가 '소규모'니 '1년'이니 하는 사족을 붙인 것은 당태종 스스로 제1카드에 초를 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제2카드는 신라 군대가 당나라 군대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수천 벌의 당나라 군복과 수천 개의 당나라 군기를 무상 원조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고구려·백제 군대가 무서워서 도망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카드는 말 그대로 꼼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대제국 고구려의 정보능력을 깔보지 않고서는 쉽사리 결행할 수 없는 카드였다.

당 태종의 황당 제안 "선덕여왕 하야하면 군대 지원하겠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두 개의 카드를 제시한 당태종의 진의는 마지막인 제3카드에 있었다.

그런데 이 카드는 선덕여왕의 거취와 직결되는 것이었다.

▲제3카드: 당나라 황족이 임시로 신라국왕을 맡는 한편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보호하고, 신라가 안정되면 신라인에게 국왕 자리를 돌려주는 방안.

바로 이 세 번째 카드가 당태종의 진의였다.

선덕여왕이 물러나고 당나라 황족이 임시로 신라국왕을 맡을 경우에는 당나라 군대를 보내 신라를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군사원조를 조건으로 여왕의 하야를 요구한 것이다.

당태종은 세 번째 카드를 제시할 때에는, 군대를 '소규모로 보내주겠다'느니 '1년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 카드가 수용되기를 희망하는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안이 수용될 리는 만무했다.

신라가 안정되면 신라인에게 국왕 자리를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이 세상에 그런 약속이 지켜지리라고 기대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당태종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선덕여왕의 리더십에 흠집을 내는 작용을 일으켰다.

최대 우방인 당나라까지 선덕여왕 흔들기에 나섰으니, 여왕의 정치적 권위가 땅에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어느 날 갑자기 기자들을 모아 놓고 한국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할 경우

그것이 한국 정계에 메가톤급 파괴력을 미치게 되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일이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도 있었던 것이다.

의자왕의 침공으로 인해 안 그래도 불안정한 선덕여왕의 리더십은 당태종의 배신까지 겹쳐 한층 더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메가톤급 타격을 입은 신라에서는 여왕이 비담을 상대등에 올리고 그 비담이 얼마 후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정치적 격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고구려·백제의 군사적 압박에 더해 당나라의 선덕여왕 흔들기가 여왕 정권의 레임덕을 재촉한 것이다.

당나라는 왜 우방국 여왕의 하야를 촉구했을까

그렇다면, 당나라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방국 여왕의 하야를 촉구한 것일까?

그냥 단순히 '이번 기회에 신라를 먹어치우자'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물론 그런 동기도 분명히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보다 더 본질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당태종이 선덕여왕의 하야를 촉구한 시점인 '643년'의 의미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 시점은 서쪽의 돌궐·토욕혼·고창국·토번을 향하던 당나라의 칼끝이 동쪽을 향하기 시작한 때였다.

당나라는 630년에 돌궐을,

 635년에 토욕혼을, 640년에 고창국을 격파한 데에 이어 641년에는 토번과 결혼동맹을 맺음으로써

잠정적으로나마 서쪽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서쪽에서 숨을 돌린 당나라는 이제 동쪽의 고구려 등을 향해 본격적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때. 당나라가 동쪽을 향해 압박을 가하려고 할 때에, 고구려·백제에서 이에 대응하는 반작용이 나타났다.

양국에서 정권교체가 발생하여 강성 정권들이 출현한 것이다.

641년에 백제에서 의자왕 정권이 등장한 데에 이어 642년에는 고구려에서 연개소문 정권이 등장한 것이다.

의자왕과 연개소문의 등장은 당나라에게 매우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역사가 잘 증명하듯이, 두 사람은 당나라의 동아시아 패권전략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들이었다.

특히 의자왕은 집권 2년째인 642년에 신라 침공을 직접 지휘하여 40여 성을 빼앗은 직후에 윤충 장군을 보내 대야성까지 함락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 같은 고구려·백제의 공세에 밀려 혹시라도 신라가 멸망한다면, 이는 당나라의 전략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멸망할 경우 고구려·백제는 배후를 염려할 필요 없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전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칫 당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담의 난은 선덕여왕 레임덕에서 비롯

사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눈에는 신라 정권이 한없이 불안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 출현한 고구려·백제 정권에 비해 신라 정권이 매우 허약하게 보였던 것이다.

신라가 백제군에게 한꺼번에 40여 성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불과 한 달 만에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까지 빼앗기자, 당나라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이 생각해낸 해법은, 당나라와 보조를 맞추어 고구려·백제를 견제할 수 있는 '보다 더 친당적인 신라 정권'의 출범이었다.

그러자면, 당나라 황족이 직접 신라 국정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는 게 당태종의 판단이었다.

장안성 황궁을 찾아와 파병을 요청하는 신라 사신 앞에서

당태종이 선덕여왕의 하야와 함께 당나라 황족의 국왕 취임을 요구한 것은 바로 그 같은 판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이 당나라의 공격목표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그에 따라 고구려·백제에서 강성 정권들이 출현하던 때에,

 당태종은 '신라에서 선덕여왕이 하야하고 보다 더 친당적인 정권이 출범해야만,

당나라의 고구려·백제 침공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선덕여왕의 하야 요구'라는 비장의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이 같은 당태종의 배신으로 인해 가속화된 선덕여왕의 레임덕이 비담의 상대등 취임 및 쿠데타로까지 연결되었던 것이다.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서 미실의 한을 풀기 위해 국왕 자리에 욕심을 내었다든가

혹은 비담이 덕만을 짝사랑하고 유신을 시기해서 결국 쿠데타까지 일으키게 되었다든가 하는 설정은 그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는, 믿었던 당태종마저 선덕여왕을 배신할 정도로

국제정세가 혼란스럽고 여왕의 리더십이 급전직하로 악화되는 가운데에 쿠데타의 싹이 급속히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