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에 걸친 대장정을 무사히 마친 두사람은 의외로 기운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둘다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났다”는 데도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종착지에 도달한 덕분인지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지난 5월26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7개월 내내 40%를 넘나드는 고공시청률을 기록하며
주옥 같은 어록을 탄생시켰던 MBC 대하사극 ‘선덕여왕’의 공동시나리오작가 김영현(43·사진 오른쪽), 박상연(37·왼쪽)씨.
김 작가는 지배자의 역사, 궁중 암투 중심의 국내 사극에 미시사,
여성사적 관점을 도입한 ‘대장금’으로 멀리 남미와 중동, 인도에까지 한류열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이다.
박 작가는 2000년 자신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의 시나리오로 20대 중반부터 영화계에서 주목받아온 작가다.
22일 방송되는 62회까지 이제 단 2회만을 남겨놓고 있는 ‘선덕여왕’의 두 작가는
이번 작품처럼 흥미롭고 고통스러우며, 기쁘고 고민스러웠던 작품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기획단계 때부터 시작하면 약 2년, 집필기간만 약 8개월.
결코 짧지 않은 이 기간 동안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창작의 괴로움을 겪었던 두 사람을 지난 17일 서울 여의동 집필실에서 만났다.
창작이란 같은 길을 걸어온 덕분인지 두 사람은 든든한 동료인 동시에 남매 사이 같았다.
박 작가는 선배인 김 작가를 때론 ‘김 작가’, 때론 ‘누나’라고 불렀다.
연인 사이로 오해받은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작업실에 와본 사람은 그런 말 절대 안 한다”며 웃었다.
―좋은 평가는 많이 들었을 테고, 62부작으로 끝낸 ‘선덕여왕’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
“덕만이 공주로 서라벌 궁에 들어오는 후반부부터 사실 많이 아쉽다.
궁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을 좀더 내밀하게 그릴 필요가 있었다.
미실의 자살(11월10일 방영 50회) 이후 갈등의 한쪽 축이 없어져 극의 전개가 쉽지 않았고,
12회 분량에 남은 이야기를 소화하기가 벅차 쫓겼던 면이 있다.
비담 캐릭터도 당초엔 좀더 악(惡)에 가까웠는데 예상치 못하게 바뀌었고.
팬들의 비담에 대한 사랑이 정말 대단했다.
팬뿐만 아니라 작가인 우리도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는 작가, 제작진, 연기자뿐 아니라 시청자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란 사실을 절감했다.”(박)
“어제 동문회에 갔다가 3시간 동안이나 엄청 욕먹었다(웃음).
종반부에 전개된 선덕여왕과 귀족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을 너무 가볍게 그린 게 아니냐는 애정 어린 비판이었다.
전개해야 할 스토리는 많은데 좋은 캐릭터가 너무 많고,
뛰어난 연기자도 너무 많아서 행복한 고민인 동시에 대단한 스트레스가 되더라.”(김)
―미실, 선덕여왕, 김유신, 비담 등 주요인물들뿐만 아니라 주변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시청자들의 애정이 대단했다.
“칠숙, 문노, 알천, 보종 등 각각의 인물마다 별개의 드라마를 써도 충분할 만큼 너무나 매력적이다.
‘선덕여왕’의 진짜이야기는 63회부터 다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신라사를 다시 배우는 계기가 됐는데,
작가로서 파면 팔수록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의 보고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다.
비담은 역사서에 난을 일으킨 사람으로만 간략히 기록돼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인데,
그를 미실의 아들로 설정한 것은 순전히 작가적 상상력의 결과다.”(김)
―고현정씨의 미실 연기는 거의 입신의 경지란 평가까지 받았는데.
“작가로서 캐릭터와 장면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였다.
미실과 비담의 관계 경우 사실 고현정씨로선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연인인듯, 모자 사이인듯 그 애매한 경계와 심리를 정확하게 표현하더라.
칠숙과 문노를 연기한 안길강, 정호빈씨 역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조차 서로 기싸움이 대단했다.”(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사왜곡 논란이다.
역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평가되고 있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미실을
신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여성지도자로 부각시킨 데다가,
‘화랑세기’에도 없는 미실의 난을 묘사해 두 사람은 고대사연구자인 이종욱 서강대 총장으로부터
“역사관과 역사인식을 완전히 오도하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을 듣기도 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의 창작 및 상상력의 중요성을 명백히 했다.
특히 김 작가는 “미실과 비담을 모자관계로 설정한 것, 천명과 덕만공주를 쌍둥이 자매로 그린 점,
실존인물들의 나이를 실제와 다르게 묘사한 점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면서
“미실의 묘사에 관한 한 그 어떤 도덕적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종욱 교수님의 ‘화랑세기’ 연구가 없었다면
‘선덕여왕’을 못 썼을 정도로 큰 도움을 받았지만
미실의 정치관을 창조해내는 것은 작가에게 허용될 수 있는 상상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정치적 논란도 많았다.
안강성 농민반란 장면에서 용산사태를 연상하는가 하면,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화백회의에서 미디어법 처리 국회를 떠올린 시청자도 적지 않았다.
박 작가는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절대 현실정치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다”며
“지난 수십년 동안 살면서 늘 봐왔던 우리 현실의 정치모습이 그런 것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다만 극중 대사에서 “천년 전에도 백성은 지금처럼 힘들었고 천년 뒤에도 힘들 것이다”란 대사를 쓸 때는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두 사람이 꼽는 최고의 장면과 최고의 어록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덕만이 일식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연출과 연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
덕만의 대사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나지막하게 ‘미실’이라고 말하며 감정을 자제한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어록으로는 “사람은 실수할 수도 있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란 미실의 대사와
“세상을 종과 횡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로 시작되는 미실과 덕만의 논쟁 대사에 애정이 간다.”(박)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하며 희망은 버거워하고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인다’는 미실의 대사다.
고민해서 쓰는 대사와 아주 자연스럽게 쓰는 대사가 있는데, 후자의 경우였다.”(김)
‘선덕여왕’이란 큰 산을 넘은 지금, 두 작가는
“당분간 실컷 잠을 자거나 다 털어버리고 여행을 하고 싶다”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누느라 바쁘다.
김씨는 “신인의 자세로 정통 멜로드라마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고, 박씨는 “언젠가 꼭 SF드라마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도 영화 ‘괴물’처럼 괴물을 등장시켜보면 어떨까”라며 신이 난 두 사람은 어느새 그렇게 새 작품을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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