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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1965년 인천을 보다

강개토 2010. 1. 16. 07:08

 

헌책방 <영광서점> 앞쪽 길가에 오가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 최종규

(1) 옆지기와 아기를 두고 아빠 혼자 책방마실

젊은 사람도 있으나 거의 모두 나이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동묘앞역 3번 나들목으로 나옵니다.

이곳에는 지난날 서울 서교동 한켠에 자리잡고 있던 헌책방 <영광서점>이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서교동에 둥지를 틀고 있던 <영광서점>에는 틈틈이 들렀지만, 동묘앞역 앞쪽으로 옮긴 뒤로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옮긴 새 자리에서 즐겁게 헌책방살림 꾸리시는지를 여쭙고 싶고 궁금하기도 한데, 저 또한 살림집이 인천에 있다 보니 쉬 책방마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딸아리를 낳아 함께 키우는 몸이다 보니, 더더욱 먼 마실은 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앞으로도 못 가고 말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큰마음 먹고 찾아가기로 합니다.

옆지기도 애 아빠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기를 홀로 돌보아 주기로 합니다.

홀로 전철을 타고 먼 마실을 떠나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마실을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옆지기와 제가 거꾸로 살고 있다면, 저는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젖을 물고 살아야 하는 아기를 두고 옆지기가 일하러 서울마실을 간다면?

아마, 그런 형편이었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엄마젖이 아닌 가루젖을 먹였을 테지요.

가루젖을 먹는 아기였으면 애 엄마가 바깥일을 보러 다닌다 해도 크게 걱정은 없었겠지요.

엄마가 아기를 재울 때하고 아빠가 아기를 재울 때하고는 다르기는 합니다만, 애 아빠도 얼마든지 몸을 맞출 수 있으니까요.

아기는 엄마와 아빠가 만나야 낳을 수 있지만, 아빠 된 사람은 씨앗을 뿌리지 배를 앓아 가면서 제 몸속 양분을 아기한테 온통 바치면서 낳지 않습니다.

엄마 된 사람은 씨를 받아 열 달에 걸쳐 아기를 품에 안은 다음, 세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오래도록 젖을 물리고 포근히 감싸안으면서 어린 나날을 보내도록 합니다.

제아무리 아빠가 아이돌보기에 마음과 품을 많이 쓴다고 하더라도 아기한테 따사롭고 넉넉한 품은 엄마 품이지 아빠 품이 아닙니다.

 

책방 앞자리에는 값싸게 내놓는 책들도 있습니다.
ⓒ 최종규

그런데, 이런 흐름은 여자만 아이돌보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이 이렇다는 소리입니다.

아이돌보기는 엄마 아빠가 함께할 몫입니다.

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 사랑을 더 크고 넓게 받으면서 자라기 마련이지만, 이 흐름을 엄마 아빠가 옳게 알아야 하고 제대로 삭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아빠 된 사람은 엄마가 짊어질 무게가 큼을 깨달아서 올바르고 슬기롭고 알맞게 엄마와 아기를 돌보고 감쌀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돌보기는 엄마와 아빠 된 사람으로서,

아니 남자이든 여자이든 누구나 목숨을 받고 태어난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하고,

이 다음으로는 밥먹기와 옷입기와 집짓기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이리하여, 저는 홀로 책방마실을 떠날 때면 참 미안하면서 고맙습니다.

미안함을 거듭 느끼면서 집안살림을 더 알뜰히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고마움을 거듭 느끼면서 아픈 옆지기한테 더 깊이 마음을 쏟아야겠다고 되뇝니다.

멀디먼 길이지만 어느새 동묘앞역에 닿습니다.

3번 나들목 구멍을 어렵잖이 찾아냅니다.

이제부터 헌책방 사진을 찍어야 하니 안경을 낍니다.

계단을 밟고 밖으로 나오는데 사람들이 꽤나 북적거립니다.

 '이 많은 사람물결은 뭔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밖으로 나오니, 바깥에는 사람물결이 더 출렁거립니다.

'훨씬 더 많은 이 사람물결은 뭔가?' 하고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이 물결을 알아챕니다. 동묘앞역은 서울에서 '황학동'이라는 곳 둘레이고, 이곳은 주말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꽤나 붐비는 곳입니다.

헌책방 <영광서점>은 전철역 바로 옆 안쪽 큰길가에 있습니다.

아주 쉽게 찾았습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얼굴이 보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옮기신 곳에 이제서야 찾아오네요." "어이구, 그래요. 반갑습니다."

 

여러 겹으로 쌓인 책탑을 헤아리는 일은 책손 몫.
ⓒ 최종규

안부인사를 몇 마디 여쭙습니다.

헌책방 <영광서점> 아저씨는 곧이어 "불경기인가 봐. 책방에 손님이 하나도 없어." 하고 푸념을 합니다.

"어, 그래도 손님이 꽤 있는데요." "이 정도는 손님도 아니지.

이 정도 가지고는 장사 안 돼요."

책방 안쪽을 둘러보니 책손 열다섯 사람쯤 책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사이 웬만한 헌책방에서도 '한때에 이만한 숫자로 책을 보는 손님이 있기' 어려움을 헤아린다면 놀랄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영광서점>은 따로 인터넷헌책방을 꾸리지 않고 매장으로만 손님을 받으니, 손님이 이보다는 더 많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황학동 둘레에 발디딜 틈이 없이 출렁거리는 사람물결을 헤아린다면, 헌책방에도 열다섯이 아니라 쉰한 사람쯤 북적대고 있어야 옳겠구나 싶습니다.

 2000년대 대한민국은 '책 안 읽는(이라기보다 책보다 재미있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아 책은 굳이 볼 까닭이 없다고 하는) 사회'이지만,

동묘앞역 <영광서점>은 참 다릅니다(동묘앞역 둘레에는 <영광서점>을 비롯해 <청계천서점>과 <헌책백화점>이 더 있습니다).

 

(2) 헌책방마실은 왜 좋은가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헌책방 <영광서점>에서 다른 책손과 매한가지로 책을 둘러봅니다.

책손이 꽤 많기 때문에 느긋하게 책시렁 한곳을 차지하면서 살펴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 흐름에 맞추어 천천히 옆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책등을 재빨리 훑어내야 합니다.

바빠맞은 책훑기는 내키지 않습니다만, 이처럼 바빠맞은 책훑기로 헌책방을 즐긴 적이 얼마만인가 싶어 속으로 웃습니다.

2000년을 앞뒤로 해서 헌책방에서 '바빠맞은 책훑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수필책 <못 다한 그 시간에> 겉그림.
ⓒ 최종규

'충무서적' 전표가 그대로 붙어 있는 <박현서-못 다한 그 시간에>(태창문화사,1981)라는 책을 집어듭니다.

저한테는 낯선 이름이지만, 출판사 이름은 낯익기 때문에 출판사 이름을 믿고 책장을 펼칩니다.

책 안팎을 어루만지면서 '이 책은 틀림없이 안 팔린 채 창고에 묻혀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서른 해 만에 처음으로 책장을 넘기는 셈인가 싶습니다.

이 책이 1981년 무렵에 널리 사랑받았는지 어떠한지 모를 노릇이지만,

창고에 묻혀 있었을 이 책으로서는 참 오래디오랜 나날을 기다린 끝에 누군가 알아보아 준 셈입니다.

.. 억지나 과격이란 늘 평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기 마련이므로,

성실과 근면, 양식 등을 저버리고 일방통행으로 달릴 땐 해결은커녕 오히려 더 풀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많이 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대화란 그래서 좋은 것이다.

흉허물없이 서로를 툭 털어놓고 스스로를 누르며 세상을 걱정하고 살림을 얘기하며 집안일,

나라일 등을 보살피는 것은 그래서 바람직한 인간사라 생각된다 ..  (62쪽)

저는 어줍잖지만 몇 가지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줄이 잘 닿는다면 제 모자란 글과 사진을 엮어서 책을 내어줄 출판사가 더 있을 테니, 앞으로도 몇 가지 책을 세상에 더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내놓는 새로운 책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제가 새롭게 써내는 이야기는 사람들 눈길을 얼마나 사로잡을 수 있을까요.

아니, 갓 내놓았을 때보다도 열 해나 스무 해, 또는 서른 해나 마흔 해가 지난 뒤에도 기꺼이 쥐어드는 책손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 될 무렵, 제 아빠가 쓴 책을 기쁘게 쥐어들 수 있을까요.

..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어린이나 가족이 교사가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엇이든 그 집안, 그 가족에게서 보고 배운 것들이 몸에 배고 익히며 어린 날과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니까.

"얘, 에미야! 밥상 차려라!" 할머니의 이런 말씀이 떨어지면 그것은 손님이 중문을 들어와 앞마당을 지나서 마악 댓돌에 올라섰다는 신호이다.

끼니때건 아니건, 손님이 시장한지 아닌지 살필 겨를도 없이, 할머니는 손님에게 밥상부터 차려 대접하라는 분부이다 …

쪼그리고 걸레질하는 여인의 다소곳한 모습보단,

손쉽고 빠른 나름대로의 걸레질법을 상황에 따라 기발하게 생각해 내서 운동도 할 겸,

일손 달리는 가족들을 돕겠다는 노할머니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유쾌하다.

말로 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 으뜸이란 말이 있는데,

집은 크고 시체 따라 일손은 자꾸 모자라 가고 이럴 때 집안 깨끗지 못하다고 잔소리나 호령만 하는 어른이 아니라,

노구를 무릅쓰고 희화 같은 모습의 아이디어로 환경정리를 말없이 하는 데 우리는 놀랐다 …

"말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대의 교육"이라면, 이 또한 나의 어머니를 두고 한 말이리라 ..  (74∼75, 79쪽)

모든 책은 모든 사람한테 가르침을 베풉니다.

지식인들 날선 말로 하자면 '교육적'이나 '교훈적'이란 소리입니다만, 참으로 모든 책은 우리들 누구한테나 가르침을 베풉니다.

다만, 책이 베푸는 가르침은 책을 쥐어든 사람한테만 베푸는 가르침입니다.

억지로 집어넣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쑤셔넣지 않습니다.

스스로 바라는 사람한테 참 잘 맞아떨어지는 가르침을 넌지시 베풉니다.

제가 헌책방마실을 좋아하면서 옆지기하고 함께 다니기를 더 좋아하는 까닭이라면,

책이 소리소문 없이 살며시 베풀어 주는 너른 사랑과 믿음을 혼자서 받아안기에 너무 아쉽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너른 사랑과 믿음을 옆지기하고 나누고 싶고, 뒷날에는 아이하고도 나누고 싶으며,

언제나 내 둘레 모든 이웃과 동무하고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 스스로 헌책방을 즐기면서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쓰고 헌책방 발자취와 손때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헌책방을 잘 모르는 사람은 나이가 예순이건 마흔이건 헌책방이 어떤 곳인지 헤아려 보고자 하지 않습니다만,

헌책방이란 한 마디로 하자면 '책이 있는 쉼터'입니다.

조금 살을 붙이면 '돌고 도는 사랑이 담긴 책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쉼터'입니다.

다시금 살을 붙이면

'책방 일꾼 스스로 읽지 않은 책을 책방 일꾼 스스로 찾아내고 캐내어

이 책들을 반가워하고 좋아하고 고마워할 사람들한테 알맞춤하게 값을 매겨서 나누는 쉼터이자 저잣판'입니다.

 

책을 사는 손님, 책을 파는 일꾼.
ⓒ 최종규

.. 그러나, 오랜동안 언문이라고 불리며,

그 이름의 뜻이 '상말을 적은 상스런 글'이라 하여 남의 나라 한자를 쓰면서도 식자들은 이를 천시 외면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따라서, 오직 규방의 여성들 사이에서만 지켜지며 내방가사 등, 훌륭한 작품 등을 꽃피우고 오늘로 이어져 왔다.

그러니까 한글의 전통은 민족의 맥박처럼 여성들 손에서 살며 지키지고 연면히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110쪽)

서른 살 가까이 먹은 책을 품에 안아 봅니다.

옆지기 나이보다 한 살이 어린 책이요, 옆지기 동생보다 나이를 먹은 책입니다.

헌책방에서는 나이를 잊고 책을 사귈 수 있고, 내 나이를 넘어서며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슬금슬금 옆자리로 옮아 갑니다.

책을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어르고 달래고 놀듯,

 우리 말과 글 또한 어머니 손길로 쓰다듬어야겠다는 느낌을 곱씹습니다.

덧붙여, 아버지들도 차츰차츰 따순 손길을 내밀며 맞잡을 수 있도록 힘써야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다집니다.

따지고 보면 1981년에 <못 다한 그 시간에>라는 책이 나왔을 때뿐 아니라

2010 즈음인 오늘날과 2020년을 내다보는 오늘날에도 우리 말과 글은 막대접이고 찬대접이고 푸대접입니다.

우리 말과 글은 참다운 뿌리나 줄기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며,

우리 말과 글을 알차게 가꾸거나 돌보고자 힘쓰는 지식인이란 눈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책에 뻗치는 손길이 반갑습니다.
ⓒ 최종규

.. 우리는 얻기 어려운 외형적인 여러 일들을,

비록 얻었다 해도 언제 사라질지도 모를 돈이나 권력이나 그밖의 외형적인 것들에 쫓기듯 불안을 갖고 살기보다는,

이런 것들을 내면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마음의 자리가 잡혀지도록 애쓰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  (150쪽)

<Jiri Milkula,Karel Sys-Prazske korzo>(Panorama Praha,1989)라는 사진책을 들여다봅니다.

'스냅 사진'으로 엮은 사진책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일 때에 이 나라 프라하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프라하를 찾아온 사람 모습을 꾸밈없이 담아낸 사진을 그러모았습니다.

이를테면, 높은 데에서 벽에 기대어 시내를 죽 둘러보는데 계집아이 하나는 바람에 치마가 날려서 머리에 붙으며 속옷이 보이는 사진,

큰 가방을 메고 여행을 하다가 공원 걸상에 기대 앉아 잠든 사람 사진 들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프라하 골목길 사진이 있습니다. 비둘기, 굴뚝, 창문, 빛바래고 낡은 벽과 길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래되면 오래된 대로 담아냅니다. 낡았으면 낡은 대로 투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한테도 우리 나라 삶터를 이처럼 꾸밈없고 투박하게 보여주는 사진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Helene Tremblay-familes of the world, the Americans & the Caribbean>(Old bridge press,1988)라는 인문학 책을 봅니다.

사진은 많지 않지만, 두어 장씩 넣은 사진이 참 알맞춤하다고 느낍니다.

이만한 문화인류학 책을 나라밖 학자들은 참 잘 써내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네 학자들은 우리 살림살이를 이렇게 알뜰살뜰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교수님이든 학생들이든 논문을 꾸준하게 많이 써내고 있기는 한데,

논문 숫자는 많아도 사람들이 두루 나누고 널리 읽을 만한 책으로 올라서는 일은 더없이 드뭅니다.

도시와 시골을 두루 오가면서 서민들 삶자리부터 잘사는 사람 삶자리까지 골고루 보여주는 짜임새를 살피면서 자꾸자꾸 슬픈 마음이 됩니다.

 

바라는 책이 있으면 더 좋고, 바라는 책이 안 보여도 괜찮고.
ⓒ 최종규

<Gross,Sorenson,Follett,McIntire-Exploring near abd far>(Follett pub,1955)라는 두툼한 책을 봅니다.

그림과 사진으로 엮은 책이요 쉰 살이 넘은 책입니다.

헌책방마실을 하기 때문에 이런 책도 만나네요. 책등을 살살 어루만져 봅니다.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 아프리카ㆍ카나다 순방'을 담았다고 하는 <세계를 향한 巨步>(대통령비서실,1982)라는 화보를 집어듭니다.

전두환 씨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나라밖 나들이'가 참 잦았고, 나라밖 나들이를 할 때마다 으레 우표가 새로 나왔고, 이처럼 화보도 곧잘 나왔습니다.

이 화보는 대통령비서실에서 펴냈습니다만,

이때에 대통령을 따라서 세계 여러 나라를 '거저로 구경하듯' 돌아다니면서

'전두환 각하 만세'를 외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기자들은 오늘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들한테 '독재 부역'이라는 죄값을 묻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과 카나다 순방은

바야흐로 세계의 일익으로 부상하려 하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웅대한 포부를 펼친 보람찬 여정이었읍니다.

우리 나라 국가 원수로서는 전인미답의 아프리카 4개국 공식 방문은 멀고 먼 미지의 대륙을 동반 협력의 신천지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했으며,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사를 맞들고 나가는 작은 거인으로서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했읍니다.

대통령 각하는 우리와 같은 경험, 같은 목표를 가진 아프리카인들의 발전 의지에 새로운 불을 당김으로써

개발도상국들이 마음을 합쳐 정의로운 국제 질서를 창조해 나가자는 위대한 자조의 정신을 탄생시켰읍니다 …

이에 우리는 대통령 각하의 아프리카 및 카나다 방문과 관련된 자료를 한 권의 책으로 모아 우리 겨레가 세계사의 주역으로 뻗어나가는 데 하나의 길잡이로 드리려 합니다.

이 책자가 정의로운 세계사의 창조에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려는 우리 모두의 기개와 슬기를 닦아 나가는 데 있어 하나의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황선필)

 

(3) 이야기 하나에 담은 넋

몇 권 쥐어든 책에 빠져든 마음에서 벗어나, 다시금 책시렁을 훑습니다.

이웃 책손이 책을 살피는 모습을 슬쩍슬쩍 사진으로 담으면서 책시렁을 차근차근 들여다봅니다.

<오다카 구니오/양기호 옮김-일본적 경영, 그 신화와 현실>(소화,1996)과 <시마자키 도손/노영희 옮김-폭풍우 외 7편>(소화,1996)이 보입니다.

'소화' 출판사에서 펴내는 손바닥만 한 작은 책들은 줄거리가 알차고 배울 대목이 많아서, 언제나 한두 권씩 챙겨읽곤 합니다.

고리끼 문학.
ⓒ 최종규

<막심 고리끼/이강은 옮김-이탈리아 이야기>(이성과현실,1991)라는 책은 아주 남다른 책입니다.

문학이라고 해야 할 텐데,

 이 문학 <이탈리아 이야기>에는 '고리끼가 이탈리아 낮은자리 사람들'한테서 몸소 들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고리끼 문학이 이렇구나 하고 비로소 깨닫습니다.

 사람들이 '고리끼 타령'을 하는 까닭을 알겠고,

퍽 오래된 작품임에도 여러 출판사를 거치며 고리끼 문학이 두루 사랑받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을 걸고자 한다면 '고리끼쯤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고리끼 어깨 남짓은 다가서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 "이보시오, 선생. 이 메달은 이래 뵈도 심쁠론 터널공사 때 받은 것이올시다

(심쁠론 터널은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는 터널로서 1898년에서 1906년 사이에 알프스산맥의 심쁠론 준령지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그리고는 가슴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금속조각에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

그래, 일이란 마음 내키지 않을 때면 어렵지만, 한번 하기로 하자면 훨씬 쉬운 법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어렵긴 어려웠지!" 노동자는 햇빛에 미소를 띠면서 조용히 머리를 내저었다.

그리고 갑자기 활기를 띠고 손을 흔들면서 검은 눈을 반짝였다.

 "가끔은 참 무섭기도 했지요. 흙이 무서운 걸 알아야 해요.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땅속 깊이 들어가 산에 굴을 파고 있을 때, 그 안에서 흙은 우리를 혹독하게 맞이했지요.

흙은 더운 공기로 우리를 질식하게 했고, 심장이 멈추는 듯했으며, 머리는 무거워지고, 손마디는 저려왔지." ..  (32쪽)

아주 늙수그레한 어느 할아버지한테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엮은 <결혼식>이라는 글은

몇 번씩 읽어도 질리지 않고 지루하지 않습니다.

외려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타오릅니다.

<이탈리아 이야기>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읽으며 곳곳에 밑줄을 그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옆지기한테 밑줄 그은 대목을 소리내어 읽어 주었습니다.

<결혼식>이라는 작품은 여러 쪽을 찬찬히 읽어 주었습니다.

.. "결혼하자" 하고 내가 제안했지.

"웃기는 소리 말아요, 애꾸눈 아저씨!" 그녀가 침울하게 대답하지 않겠소.

"당신도 나도 땡전 한푼 없는데 어떻게 산단 말예요?"

정말 엄숙한 진실이었지.

나도 그녀도 땡전 한푼 없다는 것! 그러나 젊은 시절에 사랑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사랑에는 필요한 것이 별로 없는 것이지.

나는 이렇게 고집을 부려 설득하고 마침내 이겼지요.

"좋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마침내 이다가 승락했지요.

 "혼자서도 어떻게 살아왔는데 둘이라면 더 낫지 않겠어요!"

우리는 신부님께로 갔지요.

"정신나간 짓이야!" 신부가 말했지요.

"리구리아에 거지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불행한 사람들은 말야,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해.

안 그러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해!"

 동네 젊은이들도 우리를 비웃었고, 노인네들도 우리를 욕했지요.

그러나 젊음은 고집이 있는 것이고, 나름대로 지혜도 있는 법이요! 결혼식날이 다가오고 우리는 뭐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었지.

첫날밤을 보낼 잠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까.

 "들로 나갑시다!" 이다가 이렇게 말했지요.

"안 될 이유가 없잖아요.성모께서는 사람이 어디에 있든 축복을 주시잖아요."

그래서 우린 그렇게 결정했다오.

땅은 우리의 침대요, 하늘은 우리의 이불이 되는 거지!

그런데 말이요,

선생들. 이제 여기서 얘기가 확 바뀌는 거요.

잘 들어 보세요.

 내 오랜 인생의 가장 멋진 역사가 여기서부터지요.

결혼식 바로 전날 아침 일찍 죠반니라는 노인이, 내가 그 노인 일을 많이 했었지요.

이런 말을 하지 않겠소.

 이빨 사이로, 이렇게…… 별것 아닌 것을 말할 때 그러듯이…….

 "이봐, 우고! 좀 낡았지만 양우리를 치우고 새 짚을 깔라고. 일 년 넘게 양이 없었으니,

좀 한데 같긴 해도 잘 치우면 이다하고 살 만하지 않겠어, 응!"

그래서 우린 집이 생긴 것이요!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청소를 했지.

그런데 문가에서 목수 꼰스탄찌오가 이렇게 물어 보는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너하고 이다가 사는 거냐?

그런데 침대는 어떻게 하지? 필요하면 일 끝내고 나에게 오라고.

남는 것이 있으니까 가져가 쓰도록 해." 일을 끝내고 목수에게 가는데 성깔 나쁜 마리아라는 점원 여자가 나를 보고 소리치더라고.

"결혼한다고, 거지들이! 이불 한 장 베개 하나도 없이 말이야!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나.

이 애꾸눈 아저씨야! 네 신부를 내게 보내거라."

또 에또르 비안노라고, 류마티스와 열병으로 고생하는 절룩발이가 집 현관에서 마리아를 보고 이렇게 소리를 치더라고.

"그놈에게 물어 봐. 손님들에게 술을 얼마나 낼 건지. 응?

에이, 참 사람들이 생각이 그렇게들 없어." ..  (49∼51쪽)

이런 이야기를 아주 늙은 할배 목소리 그대로 옮긴 다음, 고리끼 목소리로 한 마디를 붙입니다.

"노인의 뺨의 깊은 주름을 타고 맑은 눈물이 반짝였다.

노인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목젖을 꿀꺽 삼키며 소리없이 웃음을 지었다.

가죽만 남은 얼굴이 떨렸고. 어린애처럼 손을 내저었다."

다른 작품도 훌륭하지만, 이 작품 <결혼식>은 더없이 훌륭하다고 느끼며 저 또한 눈물을 글썽이면서 읽었습니다.

밑줄을 그으면서 읽을 때에도 좋았고, 빈종이에 손가락을 놀리며 또박또박 옮겨적을 때에도 좋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이 아닌 '글'이라는 이름을 걸 때에도 이렇게 가슴을 울리면서 눈물웃음을 함께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 선생들! 사람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지독히도 좋은 일이지요.

더 좋은 것은 사람들을 '자신처럼' 느끼는 것이라오.

아주 가까운 친척들처럼.

그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삶은 농지꺼리로 여겨지지 않고 당신의 행복은 장난처럼 여겨지지 않는 법이지요! ..  (51쪽)

좋은 마음밥을 얻어먹는 하루는 기쁩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는 글밥을 받아먹는 하루는 즐겁습니다.

어설프더라도 오늘 하루만큼 내 넋은 북돋울 수 있었고,

어줍잖으나마 오늘 하루 동안 내 얼은 거듭나고 있으니,

이 북돋움과 거듭남으로 새힘을 추슬러서 옆지기하고 아이를 한결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책이든 반가운 책이든 우리가 찾아냅니다.
ⓒ 최종규

(4) 발자국을 읽는 책

이제 얼추 책구경을 마쳤다 싶어 책값을 셈할 즈음입니다.

 낡은 졸업사진책 몇 권이 눈에 뜨입니다.

이 녀석들을 집어들까 하다가 '값이 만만하지 않을 텐데, 괜찮겠니?' 하는 생각이 먼저 퍼뜩.

그러나 '그래, 내가 이 책을 산들 얼마나 더 가난해질 테며, 내가 이 책을 안 산들 얼마나 더 가멸찬 살림을 꾸리겠는가?'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책값을 더 써서 살림돈이 더 바닥난다면 그만큼 허리띠를 조르면 됩니다.

아니, 이제는 졸라맬 허리띠조차 없는 형편이지만, 굶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입니다.

굶더라도 길바닥에 나앉겠느냐는 생각입니다.

 

맥아더 동상 앞에 선 수학여행 학생들.
ⓒ 최종규

피식 웃고는

<파주 적서국민학교> 졸업사진책 12회(1966)와 11회(1965)를 살짝 집습니다.

가만히 펼칩니다.

마흔 해 남짓 묵은 졸업사진책에 담긴 파주는 오늘날 파주가 아닌 1960년대 파주이기 때문에 그예 시골 학교입니다.

그런데 졸업사진책 끄트머리를 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아이들이 파주에서 '수학여행'을 나온 데는 다름아닌 인천이기 때문에.

'어, 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오네?' 괜히 얼굴이 붉어집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며 봄나들이 가을나들이를 온통 송도며 수봉공원이며 다닐 때에 얼마나 짜증스럽고 싫었는지 떠오르면서 괜히 부끄럽습니다.

저한테는 부끄럽고 짜증스러운 나들이터가, 다른 마을 아이들한테는 모처럼 떠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들이터였습니다.

 

1965년 인천 북성동(중국인거리) 모습입니다.
ⓒ 최종규

아이들은 인천 자유공원으로 수학여행을 옵니다.

이무렵은 '각국공원(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을 이승만이라는 독재자가 '자유공원'으로 바꾸며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2008년 7월에 헐리고 만 수봉공원 놀이기구가 아직 각국공원에 있을 때입니다.

낡은 졸업사진책에 실린 사진은 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인 각국공원(자유공원)이었기 때문에 파주에서도 수학여행을 왔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반공을 내세우는 나라 흐름에 따라, '맥아더 동상 앞에서 참배를 시키려'고 일부러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보냈는지 궁금합니다.

어쨌든, 이무렵 인천 자유공원에는 놀이기구가 있었고,

이러한 놀이기구는 서울에도 변변히 없었을 뿐더러,

팔미도나 월미도는 서울 아닌 부산에서도 곧잘 놀러오는 곳이었으니 산골 학교에서는 바다도 보고 놀이기구도 타고 배도 타 보려고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왔는지 모릅니다.

여기에다가, '대성목재 견학' 사진이 한 장 곁들여져 있어 더욱 놀랍니다.

원목처리를 하는 이 큰 목재공장이 크기는 컸다 하지만, 여기에까지 견학을 왔다니 …….

어쩌면 1970년대 '똥물 사건'이 있기 앞서까지는 시골학교에서 인천 '동일방직 견학'을 왔을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포천 청성국민학교> 졸업사진책 31회(1966)도 보입니다.

포천은 오늘날 시가 되었으나 예전에 이곳도 파주와 마찬가지로 시골이었습니다.

산속 깊은 시골이었다고 할까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아침체조를 하는데, 학교 바로 앞으로 풀로 지붕을 이은 집이 여러 채 보입니다.

 소풍이라며 산에 올라 도시락을 까먹는 사진이 있는데, 산 밑으로 다랑이논이 주욱 펼쳐지고 풀집이 곳곳에 보입니다.

청성국민학교 수학여행은 서울로 갑니다.

그런데 서울에서만 머물지 않고, 이 학교도 인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파주 적서국민학교와 마찬가지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인천 박물관'에도 가는군요. 인천 박물관은 1946년에 세워진 곳인데, 해방 뒤에 세워진 첫 번째 박물관이라 했습니다.

아마, 이런 까닭이 있어 청성국민학교에서도

'맥아더 동상 앞에서 참배하며 빨갱이 물리치자'는 구호 몇쯤 외치고 인천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고,

또 바닷가에 가서 바다도 보고 배도 타고 했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차이나타운 관광지로 바뀐 북성동 산자락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한 장이 보여 무척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인천이 고향이고 인천에서 살아가니 졸업사진책 귀퉁이에 깃든 인천 자료를 들여다보며 기뻐하는데,

저마다 제 고향 옛터를 알뜰히 간수하고픈 마음이라면,

옛날 졸업사진책을 뒤적이면서 우리들이 저마다 살고 있는 자리 예전 모습을 돌아보면 뜻밖에 새삼스레 만나는 모습을 엿볼 수 있겠구나 느낍니다.

부산에서는 부산에 있는 옛날 졸업사진책을 들여다보면서, 광주에서는 광주에 있는 학교 옛날 졸업사진책을 살펴보면서 …….

 

책방 일꾼은 장갑을 늘 여러 켤레 놓고 있습니다. 금세 책때가 타서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 최종규

사진책 <오진령-곡마단 사람들>(호미,2004)을 봅니다.

책이 처음 나올 때부터 사서 읽었고 두 권쯤 더 사서 선물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어느덧 세월을 먹었다고 헌책방에 퍽 자주 흘러들고 있는데, 헌책방에 흘러들어도 새로운 책손을 좀처럼 못 만나고 있습니다.

어쩐지 책이 안쓰러워 보여서 괜히 집어듭니다.

누군가한테 이 책을 선물해 주고 싶습니다.

.. 책을 준비하는 동안 새삼스레 가슴이 아린 것은, 동춘서커스가 자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해서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어린 시절의, 과거 한때의 추억으로 돌려 버리고는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그러나 동춘서커스는 팔십 년 가까운 역사를 등에 지고서,

곡예사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사람들을 재미와 감동으로 울고 웃게 하면서 한 해 내내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

과거가 아닌 오늘의 서커스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  (머리말)

이제 책값을 셈합니다.

책값이 꽤 셉니다.

그래도 여러모로 재미나고 알찬 책을 잔뜩 골랐으니 그만한 값은 마땅히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펴낸 《李朝の民畵》 두툼하고 커다란 녀석이 보여서 넌지시 책값을 여쭙니다.

<영광서점> 사장님은 "최종규씨는 인터넷에 올리고 책을 팔지는 않지요?"

"네? 그런 사람들이 있나요?"

 "예전에 책 좋아한다던 사람들이 요새는 다들 인터넷에 개인책방이니 뭐니 열어서 팔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그러면 배신이잖아요.

 제가 그렇게 책을 팔면 욕바가지로 먹고 헌책방에 발도 못 붙일 텐데요."

<영광서점>에 들어와 있는 <李朝の民畵>는 아주 깨끗합니다.

 아저씨가 부르는 책값은 시중 값과 견주면 3/5쯤 됩니다.

그러나 시중 값에서 3/5쯤 되어도 20만 원이 조금 못 되는 돈입니다.

 '내가 부자라면, 나한테 돈이 있었으면' 하면서 속울음을 웁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내가 부자라면 이렇게 책방마실을 했겠니?

나한테 돈이 넉넉했으면 이렇게 온나라 곳곳에 깃든 헌책방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다리품을 팔았겠니?'

 "아, 참 싼값인데 저로서는 아쉽네요.

그래도 저한테 그런 값을 불러 주시니 고맙습니다.

나중에 언젠가 돈이 마련되면 꼭 장만하고 싶은 책 가운데 하나예요."

 "이 책 좋지요.

책값이 비싼 것 같지만 하나도 안 비싸요

일본놈들이 책을 얼마나 잘 만들어요?"

전철길에 읽을 책 하나는 손에 쥐고 나머지는 가방에 차곡차곡 담습니다.

가방을 짊어지니 꽤 묵직합니다.

오늘도 즐겁게 헌책방마실을 마칩니다.

옆지기하고 나란히 헌책방마실을 하든 홀로 헌책방마실을 하든, 옆지기는 저한테 '책값 많이 썼다는 핀잔'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옆지기 스스로도 '책값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읽어야 할 책을 읽느냐 못 읽느냐가 문제예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헌책방 헌책은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우리 살림돈은 어떻게든 일해서 벌 수 있잖아요.' 하고 말합니다.

 

내 마음에 깃들 책은 내 손으로 고를 때가 가장 좋습니다.
ⓒ 최종규

그래, 우리 세 식구는 가난한 살림이라서 헌책방을 더 좋아할밖에 없습니다.

헌책방은 가난하거나 가멸거나 따로 울타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주머니에 천 원만 있는 사람한테도 문을 열고,

주머니가 빈 사람한테도 문을 열며, 주머니에 백만 원이 있건 일억이 있건 더 높이거나 낮추지 않습니다.

없다고 깔보지 않으며, 있다고 섬기지 않습니다.

되레, 책을 잔뜩 사들이는 사람을 꺼린다고 할 수 있는 헌책방입니다.

어차피 '한 사람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은'데 '돈 좀 있다고 욕심을 부리면서 다른 사람이 읽을 책까지 빼앗거나 긁어모으는' 꼴은 마땅하지 않아서,

일부러 이런 사람들한테는 바가지를 씌우고 싶거나 책을 안 팔기도 한다는 헌책방 일꾼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 같은 헌책방을 가난한 살림으로 다닌 까닭에 책읽기를 제대로 익혔다고 느낍니다.

사고픈 책을 마음껏 사다 읽을 수 없는 살림인 까닭에, 한 권을 사도 더 깊이 살펴야 했습니다.

읽고픈 책을 마음대로 장만하거나 갖출 수 없는 형편인 탓에, 더 오래 다리품을 팔고 더 진득하게 책장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면서, 헌책방 일꾼이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시나브로 이어받았다고 느낍니다.

 모든 책은 헌책이면서 모든 책은 아름답다는 넋을, 모든 책은 새책이면서 모든 책은 거룩하다는 얼을, 어느새 조용히 물려받았다고 느낍니다.

부자가 아닌 까닭에 사들일 수 없는 책이 늘 많은 터라,

헌책방 일꾼 당신들이 그토록 애틋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책을 책손한테 기꺼이 파는 삶자락을 한동아리로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