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길

청계천 옆 ‘장사 기계공구 상가’

강개토 2010. 3. 9. 10:35

2004년 1월, 답사가 아니라면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을 어두운 복도에 들어섰다.

창고인지 공장인지 구분이 어려운 가게의 창들은 여러 부품으로 메워져 그 사이의 좁은 틈으로 내부 풍경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캄캄한 공간에 떠있는 입간판을 보고 그제야 무엇을 파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한다. 복도가 끝이 나고 뜬금없이 나오는 작은 마당을 뒤로 하고,

길은 다시 다른 건물의 복도로 이어진다. 저절로 몸이 움츠려지는 좁고 어두운 공간,

머리 위로 나무로 짜인 어떤 구조가 있는 것 같지만 눈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 복도를 지나는 순간, 이제까지 보지 못한 밝은 골목길이 펼쳐지고,

무척이나 거친 목재 트러스에 노란빛을 머금은 비닐슬레이트 지붕 아래 수많은 가게들과 작업장이 펼쳐진다.

우리가 다다른 곳, 바로 청계천 옆 ‘장사 기계공구 상가’이다.

장사 기계공구 상가 지도 보기

 

 

 

 

세운상가와 주변의 오래된 동네들

사람들로 넘치는 종로2가, 관철동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건물들의 높이는 급격히 낮아진다.

종로 같은 큰길을 따라가지 않고, 그 안의 작은 골목에 들어서면 그 느낌은 더욱 생경한데,

어느 곳에 이르면 마치 한적한 동네를 거닐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도시란 높고 큰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널널한 풍경’은 도무지 이해되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찬찬히 생각을 더듬어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원래 모습이

크고 작은 동네와 하천 그리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길들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돌이켜 본다면,

서울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이러한 풍경은 무척이나 당연하고 또 그대로 남아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종로와 청계천을 축으로 동서로 길게 펼쳐진 도심 한복판에 마치 좌초된 배처럼 남아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

바로 세운상가다.

세계 문화유산 종묘에서 서울의 중심인 남산자락까지

남북으로 뻗은 폭 50m, 길이 1.2 km의 콘크리트 빌딩군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오늘은 그 탄생의 배경만 잠깐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3월 10일 일본 도쿄에 가해진 미공군 B-29 폭격기의 폭격은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며 극심한 피해를 가져왔다.

이에 일본은 공습에 의한 화재로 불이 번지지 못하게 도시공간을 비워

소개-疏開’ 하는 도시소개 대강이란 것을 내리고 식민도시 경성에도 19군대의 소개공지와 소개공지대를 고시한다.

대대적으로 급박하게 추진된 이 작업으로, 예부터 내려오던 동네와 집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지금의 세운상가 자리는 해방 후에도 커다란 빈터로 있다가,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무허가 정착지가 된다.

1960년대 후반, 일명 ‘불도저’라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에 의해 근대화의 상징처럼 지어지지만,

아주 짧은 전성기를 보내곤 이내 도시의 그늘로 사라지고 만다. (손정목 교수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참조)

 

 

 

실핏줄처럼 얽힌 옛 골목과 복도들

1912년 지적원도와 지금 지적도를 겹쳐본 그림을 살펴보자.

왼쪽으로 종로3가, 오른쪽으로 세운상가 사이에 있는 블록의 옛 골목과 길들, 그리고 현재의 길들을 표시하였다.

또 답사를 하면서 기와지붕이나 서까래, 기둥, 보 등이 보이는 한옥들을 따져서 그려보니, 길들은 거의 옛 길이 그대로 살아있고

한옥들도 제법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건물 중에도 한옥 지붕 위에 편리상 이중으로 새 지붕을 얹은 것들이 많기 때문에,

1층 건물에는 아직도 더 많은 한옥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아직도 세운상가 주변으로 서울의 오랜 역사를 담은 동네와 그 흔적들이 잘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곳에 가면 옛 동네가 인사동이나 북촌 한옥마을처럼 눈에 잘 보일까? 현재는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꾸불꾸불한 골목의 맛은 있어도,

 세운상가와 주변 건물들에 들어선 수많은 가게들로 인하여

그윽한 맛이 나는 동네를 떠올리기에는 과학수사대 CSI 수준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제의 모습은 가전제품, 금은보석, 시계, 카메라, 의료기기, 계측기, 전자기기, 아크릴, 기계공구 등을 파는 상점들과

이 가게들을 지원하는 식당과 휴게실들이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집합을 이루고 상권을 형성하며 도심 속에서 긴밀하고 분주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건물의 복도와 다른 건물의 복도 또는 골목과 마당 등이 서로 하나가 되어 마치 실핏줄처럼 얽혀 있는 미로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도에서 보는 주황색 표시가 그렇게 이어지는 건물 안의 복도를 나타내는데,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는 이러한 도시의 미로가 옛 동네보다 매력적일지 모르겠다.   

 

 

 

가게에 영향을 주는 한옥, 한옥에 영향을 주는 가게들

오래된 동네의 골목과 집들이 근현대를 거치며 자리한 다양한 공장과 가게들에게 점유 당하면서,

원래의 골목보다 더 복잡하고 기기묘묘한 ‘도심 속 미로’가 탄생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더불어 한옥과 가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지금의 풍경을 만들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하나는 가게들이 길을 향해 한옥의 한 칸 혹은 반 칸 폭의 단위로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원래 한옥에 들어선 가게들은 물론이거니와 새롭게 지은 콘크리트 건물에서도,

콘크리트 기둥과 기둥 사이에 다시 벽을 두어 한옥 한 칸 정도 폭의 가게들로 나누어 세를 놓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한옥과 얽혀 만들어진 작은 가게들의 규모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새로운 환경에서도 관성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한편, 비슷한 동종의 가게나 연관성이 높은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 한옥들의 문간, 마당, 대청 등이 사람이 다니는 통로로 바뀌어 다른 길이나 건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림으로 보면 가운데 길에서 왼쪽으로 한옥이 하나 있다.

마당에는 봄이면 화사한 꽃을 피우는 개목련나무가 있는데,

마당을 돌아 다른 쪽으로 나오면, 막다른 옛 골목과 이어진다. 한편, 오른쪽에 있는 한옥도 문간을 지나자마자 길이 나뉘어져,

하나는 마당을 끼고 있는 지역 독지가가 설립한 장학회 사무실로,

다른 하나는 한옥 대청 부분을 지나 가게들이 나란히 늘어선 아케이드로 연결됨을 알 수 있었다.

대청의 마루나 창, 기단 등은 통행을 위해 모두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한편 송도영 교수의

‘청계천 공구상가의 형성과 일상적 관계망’이란 연구에 따르면,

 공구상가의 시작은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물품과 공구장비를 다루는 노점상들이 청계천변에 생겨난 것이 그 출발이라 한다.

60년대 초에 이르러, 청계천 복개공사로 천변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주변의 한옥 등 주택가로 들어가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된 공업지대와 업종들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공구상가는 제조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 왔다.

 

 

 

장사 기계공구 상가, 그 궁극의 종합판

그렇다면 이러한 공구상가 중 가장 진기한 풍경을 보이는 곳은 어딜까,

필자에게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 ‘장사 기계공구 상가’이다.

세 방향에서 연결되는 출입통로를 지니고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한쪽으로는 가게들이,

전동모터나 기계톱날 등을 팔고 다른 한쪽에는 철판을 가공하여 덕트 등을 만드는 작업장이 있다.

 위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만든 빛이 드는 목재 트러스로 된 아트리움이 있다.

인상적인 것은 내부를 뱅뱅 돌 수 있게 한 ‘ㅁ자 통로’를 두었다는 점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같이 쓰는 화장실과 물을 쓸 수 있는 공간이 한 켠에 마련되어 있다.

메인 통로가 되는 청계천 쪽 출입구에는 ‘장사 기계공구 상가’라는 커다란 간판을 앞에 두고, 그 뒤로 수십 개의 가게이름이 한 간판에 적혀 있었다. 

 

 

 

 

 

최근에 보다 자세한 조사를 하였다.

가게들의 출입구, 통로에 나와있는 물건과 기계들, 자전거, 방범초소, 화장실 등을 세세히 표시하여 보았다.

그리고 몇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는 ㅁ자 통로의 일부가 T자형으로 생긴 한옥의 대청부분을 뚫어 만들어졌다는 점,

또 하나는 1960년대 항공사진에서도 이미 공구상가의 전체적인 윤곽이 만들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원래 커다란 하나의 땅에 넓은 마당과 한옥이 있던 자리에,

60년대에 들어 청계천변의 노점공구상들이 집단으로 들어오면서, 마당에 가게공간을 만들고 통로를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 외에 가운데 자리한 한옥 일부를 철거하고 통로를 만든 때나,

빛이 들어오는 아트리움을 설치한 시기,

주변 길에서 건물의 복도나 한옥 일부를 철거하고 통로가 연결된 시기,

그리고 그 통로 사이에 자리한 이름 없는 식당과 휴게실 등이 자리한 시기와 배경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황금빛 아케이드’ 아래 펼쳐진 장사 기계공구 상가의 풍경은 어떻게든 모이고 이어지려는 가게들의 강력한 의지가,

오랫동안 내려온 골목과 한옥 등에 투영되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집합의 형상을 만들고 있는 것에 큰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초보적인 아케이드의 형태이지만 도시환경을 통합하려는 집합의 의지가 드러났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례라 하겠다.

 

 

 

 

세운상가, 한국 최초 IT밸리에서 녹색 벨트로 | 머니투데이 경제 2009-11-18
세운상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
 내 세포들의 상점을 가득 채운 건 트레이시와 치치올리나, 제니시스, 허슬러,
그리고 각종 일제 전자 제품들, 세운상가는 복제된 수만의 나를 먹어치웠고,
내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공간의 역사]<2>서울 종로구 장사동 세운상가 | 동아일보 생활/문화 2009-07-15
서울의 기억 안고 사라질 ‘근대화의 외로운 섬’.
《남산타워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자.
한눈에 들어오는 도심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묘와 퇴계로를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건축물 세운상가다.
1968년 완공된 개발시대 서울의 상징. 세운상가는...

  

 

 

조정구
글·사진 조정구 / 건축가
2000년 구가도시건축(http://guga.co.kr/)을 만들어 ‘우리 삶과 가까운 일상의 건축’에 주제를 두고, 도시답사와 설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진풍경은 10년간 지속해온 답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것이다.
대표작으로 가회동 ‘선음재’,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이 있다.
라궁으로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2008년에는 안동군자마을회관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실측조사 및 도면 요네다 사치코, 김송수, 강동균
그래픽 조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