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명성황후의 접견실에 깔려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6·25 동란 당시인 1951년 5월 미국인 길트너 중사가 25달러에 사들여 미국으로 유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당국과 뉴욕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노력으로 같은 해 국내 반환됐으리라는 추측이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와 조계종 중앙신도회 등이 소재 파악에 나서면서 존재가 드러났다.
조현종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조현종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2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와 유사한 유물이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지 공식적으로 확인 요청을 받았다"며
"'라이프'지에 등재된 사진과 유사한 표범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소장돼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표피(豹皮)는 세로 6줄의 무늬와 주위 테두리에 파상형 붉은 천 장식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표피(豹皮)는 세로 6줄의 무늬와 주위 테두리에 파상형 붉은 천 장식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처럼 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 붙여서 만들었다.
크기(243×574㎝)도 1951년 사건 당시 미국 월간 '라이프'에 공개된 크기(250×560㎝)와 엇비슷하다.
문제의 문화재와 동일품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러나 확연한 동일품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도 있다.
그러나 확연한 동일품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도 있다.
김울림 학예연구사는 "건청궁 내에서 명성황후의 실제 사용 여부와 소장경위에 대해서는 아직 확증적 자료가 없다"며
"뒷면의 오얏꽃 문양 장식으로 미뤄 대한제국 황실 소용으로 제작됐던 것은 확실하다"고 전했다.
명성황후가 변을 당해 사망한 것은 1895년, 대한제국이 출발한 때는 1897년이다.
명성황후가 변을 당해 사망한 것은 1895년, 대한제국이 출발한 때는 1897년이다.
"오얏꽃 문양이 대한제국 이전에도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양탄자에 사용된 실과 제작기법을 분석, 정확한 제작 연도를 따져볼 계획"이다.
"크기나 보존 상태 측면에서도 비교할만한 유물이 없는 만큼 그 가치는 매우 클 것"으로 짚었다.
이 유물은 2009년 '잔치풍경-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전시에 출품될 예정이었으나 워낙 커서 진열장 내 전시가 불가, 무산된 바 있다.
조 학예실장은 "호피(虎皮)라고 유물 이름만 기재됐을 뿐이지 정확한 용처에 대한 기록은 없다"며
이 유물은 2009년 '잔치풍경-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전시에 출품될 예정이었으나 워낙 커서 진열장 내 전시가 불가, 무산된 바 있다.
조 학예실장은 "호피(虎皮)라고 유물 이름만 기재됐을 뿐이지 정확한 용처에 대한 기록은 없다"며
"최근 명성황후에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이 유물이 명성황후가 사용했던 양탄자가 아닌지 추정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전시 때는 단지 향연과 의례용으로 바닥에 깐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 동안 이 유물의 소재에 대해서는 "1969년 당시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관 받았다"며
그 동안 이 유물의 소재에 대해서는 "1969년 당시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이관 받았다"며
"1969년 이전에는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됐던 기록만이 남아 있다"고 알렸다.
"덕수궁 미술관에 소장됐다는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1963년 5월3일"이라며
"이전에는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조 학예실장은 당시 유물 소장 기록에는 호피라고 기재돼 있지만, 이 유물은 표피라고 지적했다.
박물관은 8월5일 통사적으로 개편돼 문을 여는 조선실에 이 유물을 2~3개월 정도 전시한다.
박물관은 8월5일 통사적으로 개편돼 문을 여는 조선실에 이 유물을 2~3개월 정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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