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프랑스 월간지 1893년 10월호 국내 첫 공개… 다른 출판물은 같은 사진에 다른 설명
가체 머리에 소매가 좁은 저고리를 입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조선시대 여인.
가체 머리에 소매가 좁은 저고리를 입고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조선시대 여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알현한 프랑스인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 실린 이 사진에는
'민, 조선의 황후(Min, Roi de Cor�)'라고 분명하게 설명이 달려 있다.
↑ 위_ 명성황후로 소개된 사진이 실린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 기사의 일부.
아래_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 표지.
↑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실린 ‘민,
조선의 황후 ’ 로 소개된 사진.
프랑스에서 발간된 월간지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이, 조선의 왕(Yi, Reine de Cor�)'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이 기사는
4쪽에 걸쳐 조선의 풍물과 왕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문제의 사진은 여기에 실린 10장의 사진 가운데 하나다.
'궁녀' 등 이름으로 다른 곳에 실려
이 기사를 쓴 A B 드 게르빌은
'궁녀' 등 이름으로 다른 곳에 실려
이 기사를 쓴 A B 드 게르빌은
여행작가이자 기자로 활동하면서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월드컬럼비아엑스포의 스페셜커미셔너 자격으로 아시아와 유럽 등지를 여행했다.
1892년 11월에는 조선을 방문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에게 엑스포 행사 장면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다.
당시 최신 기술의 환등기를 본 명성황후는 스크린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하고 세세하게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명성황후가 대단히 지적이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적었다.
논란을 일으킨 이 사진은 당시의 조선 소개 책자와 사진 컬렉션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 바 있다.
논란을 일으킨 이 사진은 당시의 조선 소개 책자와 사진 컬렉션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 조선의 궁중 여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명성황후라는 주장이 크게 힘을 받지 못했다.
이 사진이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4년 전인 1891년 미국에서 발간된 국립박물관 보고서다.
이 사진이 출판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4년 전인 1891년 미국에서 발간된 국립박물관 보고서다.
사진의 주인공은 '궁궐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Korean serving woman in the palace)'으로 소개돼 있다.
게르빌의 기사 외에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출판물 가운데 이 사진을 명성황후라고 표기한 곳은 하나도 없다.
게르빌의 기사 외에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출판물 가운데 이 사진을 명성황후라고 표기한 곳은 하나도 없다.
1893년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테크가 쓴 〈코레아〉(독일어판)란 책자에서는 '궁녀(Palast dame)',
1894년 7월 28일자 영국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는
'조선 왕의 시종(Attendant on The King of Korea)'으로 실렸다.
1894년 독일의 화보신문 〈일루슈트리르테 차이퉁〉 10월 27일자에는
배경이 생략된 채 '궁정의 여자 가수(S�gerin im k�iglichen Palast: female singer in royal palace)'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은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은
테리 베닛이라는 영국인 수집가가 1894~1895년 조선을 방문한 무명의 독일 사진작가의 사진첩을 입수해 공개하면서다.
사진첩의 사진 아래 '시해된 왕비(Die Ermordete K�igin)'라고 독일어로 수기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자·촬영시기도 아직 안 밝혀져
여러 사본이 전하는 이 사진은 이처럼 누가 언제 누구를 찍은 것인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촬영자·촬영시기도 아직 안 밝혀져
여러 사본이 전하는 이 사진은 이처럼 누가 언제 누구를 찍은 것인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촬영 시기도 1881년과 1886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조류수집가 피에르 루이 조에가 그 시기에 조선에 머물며 조류 수집과 함께 문제의 사진을 확보했을 것이라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촬영자가 누구인지도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다.
촬영자가 누구인지도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다.
명성황후 사진 찾기와 고문서 수집 전문가인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미술사학자)은
이 사진이 1880년대 초반에 일본인이 촬영해 관광객에게 판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소장은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실린 〈피가로 일러스트레〉 1893년 10월호를 프랑스 파리 고서점에서 입수해 본지를 통해 공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냐다.
이제까지는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당사자가 대중 매체에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게재한 자료가 발견된 만큼 얘기가 달라진다.
기사를 쓴 게르빌은 1895년 12월 1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에 쓴
'명성황후는 왜 시해됐나(Why Queen Min Was Murdered)'라는 기사에도 같은 사진을 사용하고
'민, 조선의 전 황후(Min, Late Queen of Corea)'라고 설명을 붙였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명성황후의 얼굴을 아는 그가 문제의 사진이 명성황후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사에 계속 사용한 경우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어떤 이유 때문에 기사에 사용한 경우다.
이 소장은 "상업적 목적이나 취재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고의로 가짜 사진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며 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 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
< 신동호 선임기자 hudy@kyunghyang.com, 사진·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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