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타계한
고 길창덕 화백은 '지족상락(知足常樂)'이란 네 글자를 남겼다.
'만족할 줄 알면 항상 즐겁다'는 뜻이다.
2006년 1월 경기도 산본 자택에서 기자와의 만남을 끝으로
모든 언론과 행사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는
'지족상락'이란 자신의 철학처럼 만화를 그렸고, 여생을 보냈다.
2004년 정부에서 받은 보관문화훈장도 그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6.25로 인해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속에서 삭였다.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건강 잃어
1929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길 화백은
1955년
서울신문
독자 만화 투고로 데뷔한 뒤
'꺼벙이'
'고철이'
'삼삼이'
'딸딸이'
'재동이'
'만복이'
'필승이'
'복돌이'
'박달도사' 등
수많은 히트작과 캐릭터를 발표하며
명랑만화 시대를 활짝 열었다.
특히 1970년
월간 만화왕국에
'꺼벙이',
여성중앙에 '순악질 여사',
소년중앙에 '만복이'를 동시 연재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의 작품은 박수동·윤승운·신문수·이정문 등 후배 만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간단한 선으로 명확한 캐릭터를 잡아 일상 생활에서 공감이 가는 만화를 그려 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작업 스타일은 꼼꼼하기로 정평이 났다.
한창 때는 동시에 18개의 만화를 연재했다.
아이디어를 위해 매일 4~5갑의 담배를 피웠고, 다량의 커피를 들이켰다.
그는 기자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담배, 커피를 끊자
동네 담배, 커피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았다"면서
"원고를 그렸다가 마음에 안 들면 뒷장에 또 그렸지.
종이가 걸레가 될 때까지 그렸다"고 회고했다.
길 화백은 현대정공 사보 연재를 끝으로 1998년 집필을 중단했다.
그해 병원에선 3주 밖에 못 산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병실에서 예수의 손을 본 환상을 경험하고 폐암에서 벗어났다.
은퇴 후 모든 욕심 버려
길 화백은 1998년 이후 만화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틈틈이 연재 요청이 들어왔으나 거절했다.
넉넉하지 않은 노년 생활이었지만 돈에는 아무 욕심이 없었다.
지족상락의 철학 때문이었다.
'꺼벙이' 애니메이션 제작 요청도 허락하지 않았다.
유머 감각이 풍부한 그는 철저하게 평범한 노인으로 살았다.
"지금은 설거지도 하고,
멸치똥도 까면서 소일해.
마포에서 내가 산에 올라가면
영감탱이들이 나를 화백이라고 불렀어.
백수 주제에 건방떤다고 '화려한 백수'라고 그런 것이지"라면서
"그 영감들, 나 없이 심심해서 어떻게 사나 몰라"라며 웃었다.
그러나 "예순 이후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져 외롭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임종 시에도 비교적 맑은 정신으로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다
만화로 성공했지만 그는 어머니에 대한 불효로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
평안북도 정주역 역무원으로 일하다
6.25가 터지자 홀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잠시 피난을 갔던 것이 생이별이 됐다.
고작 사나흘이라고 생각한 피난길이 평생이 된 것이다.
그는 "이럴 줄 알았다면
피난도 가지 않았을 거야. 이게 사는 거야?"라면서
"어머니 마음이 숯도 아니고 하얗게 재가 됐을 거야.
나는 평생 우리 어머니 한 풀어 드리려고 산 거야"라고 말했었다.
공책 빽빽하게 어머니와 관련한 시를 적어 놓고
틈틈이 낭독한 그는 어머니를 만나면 맞으려고
20년 동안 마당에서 꺾은 스무 개의 종아리채를 보관하고 있었고
2003년 이사하면서 모두 불태웠다.
100세가 넘었을 어머니가 살아계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배 신문수 화백은 "길 화백은 아마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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