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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도발적이고 충격적 이어야 한다”리오 버넷(1891~1971)

강개토 2008. 2. 5. 11:38

 

 

광고의 예술성을 찾아내 20세기 산업 활성화에 이바지한 아이디어맨
리오 버넷(Leo Burnett 1891~1971)

“리오 (버넷)는 관객 (소비자)이 만족하기를 그리고 그 (주어진)시간에 무엇인가를 전달하길 추구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식으로도 사기를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Leo wanted the viewer be satisfied, to give him something for his time. He didn't like phoniness in anything”.

공동 창설자 잭 오카피

19세기에 자본주의 개념이 전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소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합법적인”상술은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다. 광고도 그 흐름에 편승하지 아니했다고 볼 수 없다. 소비자들은 광고의 진실성보다는 그 것을 표현하는 -비록 과장이 심하더라도- 방법의 독창성과 상상력에 더 점수를 주고 있다.

오늘날 많은 광고가 과장되었음은 모두가 다 인정하는 것 같으나 거기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순진하고 솔직한 광고는 그 생명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어서 일 수도 있다.

리오 버넷은 이러한 독창성과 상상력에 승부를 걸어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마치 한 생명공학자가 DNA의 유전자코드를 해독하듯이 그는 소비자의 심리를 해석하는데 성공하였다. 20세기 마피아의 대부 루시아노 (Luciano ?) -그도 타임지의 20세기 위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음- 같이 어떠한 구체적인 악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리오 버넷의 도발적인 아이디어는 각 사회단체와 종교의 반발을 사곤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는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조명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독자와 필자는- 그 점에 대해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 21세기라는 또 하나의 긴 레이스의 스타트를 이제 막끊은 바고 엊그제 같은 20세기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해 조금은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정보를 제대로 판단하여 각자 올바르게 사는 데 쓰는 일이 우리의 몫일 것이다. 연간 6십억 이상의 매상에 전 세계 회사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만으로 그의 회사 Leo Burnett Inc 사가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 지 설명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배운 광고의 개념  

리오 버넷은 1891년에 미시간 주 St. Joh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George 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애칭으로 ‘Geo’라고 표시한다는 것이 잘못되어 -그의 글씨체 때문에- 병원에서는 Leo로 기록되고 말았다. 어쨌든 4 남매중 장남이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가게에서 물건이 어떻게 팔리는가 유심히 관찰하였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그 가게에서 발견한 최초의 광고 전략은 배달차의 차양 스크린에 상점의 이름과 슬로건을 집어넣은 일이었다. 그가 그 가게에서 직접 경험한 최초의 광고 기술은 그림과 글씨를 삽입하여 조그만 광고 문구를 만들었던 일이었다. 이러한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수줍은 성격 때문인지, 그는 학업에는 그리 열중하지 않았다. 독서와 글씨를 좋아했으며 지역 신문의 리포터로 일하곤 하였다.

광고의 세계로

19세때 미시간 앤 아보 (AnnArbor) 대학에 진학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대중 통신 -즉, 매스컴- 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미시간 일보 (Michigan Daily)의 석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그 보수로 학비를 충당하였다. 비록 파트타임으로 일하였지만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뛰어난 상상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졸업 후 피오리아 저널(Peoria Journal)에서 주당 18불을 받으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당시 자동차 산업이 흥성하기 시작한 때인지라 그의 동창인 오윈 윈터(Owen Winter, 후에 또 하나의 위대한 광고 업주가 됨)는 그가 자동차 업계에서 일하기를 권고하였다. 1 년 후 기회가 찾아왔다. 캐딜락 모터사의 광고잡지의 편집장의 자리가 열린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와 포부를 그린 그의 에세이 “Neatness”는 인사과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 같다. 캐딜락 모터사는 그의 포부를 이루기에는 아직 작은 무대였지만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광고 디자인을 할수 있게 되었고 또 그 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자주 애용했던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연분을 만나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되었다. 그는 그 레스토랑의 캐쉬어로 일했던 Naomi와 1918년에 디트로이트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후 세계 제 1차 대전 때문에 그는 미 해군에 자원하였고 그 6개월 간의 참전 이후 다시 캐딜락사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변해 있었다. La Fayette라는 새 회사명의로 한 그룹이 캐딜락에서 독립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그 새 회사의 광고 매니저로 추대되었다. “아메리칸 롤스로이스”라는 광고 문구로 승부를 걸었지만 회사는 경영 문제로 금방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곧 Homes McGee라는 광고 업체의 아이디어 부장으로 취직하게 되어 1929년의 세계경제 공황이 일어나기까지 그 곳에서 10년 간 일하게 되었다.

 

자신만의 광고의 세계를 열다

1930년에 그는 시카고에 주재하는, 그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광고 회사인 어윈 웨세이 (Erwin Wasey)에 개발부의 부사장으로 취직되었다. 얼마 후 회사가 뉴욕으로 본사를 옮길 때에 그도 같이 이동하게 되었고 뉴욕에서 그는 광고 업주와 각 회사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시대를 열 때가 되었음을 그도 깨닫기 시작하였다. 1935년 8월 5일에 친구 잭 오커피(Jack O'Kieffe)와 함께 Leo Burnett Co. Inc.를 창설하였다. 리오 버넷은 기존의 설명적인 광고 전략에서 벗어나 도발적이며 독창적인 모델을 구축하는 것을 회사 사훈으로 삼았다. Green Giant, Hoover 그리고 Realsilk Hesiery사, 이렇게 세 개의 회사를 고객으로 시작한 리오 버넷사는 한 때 Hershey 초콜렛과 Wringley 껌 회사들을 고객으로 모시는데 번번이 실패하여 코너에 몰리기도 했다.

 

아메리칸 이열치열?

1945년에 미국 육류협회(또는 American Meat Institute)의 광고는 그의 스타일을 표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개신교의 영향으로 피가 보이는 육류의 섭취를 꺼려했던 그 시대에 그는 과감하게 붉은 피가 보이는 고기 덩어리와 또 연붉은 바탕을 배경으로 광고를 제작하였다. 붉은 피를 머금은 육류를 상상하는 것조차 죄악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에 이러한 광고는 충격적이 아니라고 할수 없었다.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은 불멸의 히트 작품을 날렸다.

1951년의 호랑이 Tony 마스코트, Jolly Green Giant, 1955년의 말보로 광고의 카우보이, 1965년의 필리스버리사의 도넛 보이등은 다 그의 작품이며 오늘날에도 아메리카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고 있다.

    

 

광고의 대부로서

1962년에 그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1963년 미조리대 저널리즘과는 그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했다. 1966년 미주 마케팅 협회는 그를 그 해의 마케팅 인물로 선정하였다.

그는 한 분야의 대부답게 그의 하루 일과를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하여 자정까지 일하며 주말에도 일하였다. 창사 25주년만에 그의 회사는 미국 6대 회사중 하나가 되어 그는 하나의 광고 회사가 대기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가 60대 후반을 넘어서 잦은 병 치레 때문에 고생할 때에도 그는 회사를 방문하곤 하였다. 1971년 아내와 저녁식사를 마친 후 수면 중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파격적인 광고 전략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이디어의 대부답지 않게 비교적 조용한 방법으로 그는 그의 일기를 마쳤다. 이 또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 같이...(장태선)■  

 

  • 1891년  미시간주 St. Johns에서 탄생.
  • 1919년  Homer McGee라는 인디아나폴리스의 한 광고회사에 취직.
  • 1935년  독립하여 시카고에서 자신의 개인 광고 회사를 설립.
  • 1951년  호랑이 Tony 마스코트 히트를 치기 시작함.
  • 1955년  말보로 담배 필터 선전.
  • 1965년  필리스버리 도너츠 소년 마스코트가 탄생함.
  • 1968년  Keebler사의 난장이들과 모리스 고양이 등 여러 선전 효과에서 두각을 나타냄.
  • 1971년  79세의 나이로 Lake Zurich에서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