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사만화 ‘풍자와 수난의 100년’… 신문독자 관심 떨어져 ‘사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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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 큰 인기를 얻은 ‘고바우영감’(동아일보, 김성환, 1958.1.23)과 ‘두꺼비’(경향신문, 김경언, 1955.4.1). 왼쪽 ‘고바우영감’ 으로 인해 김 화백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맨 오른쪽 그림은 새마을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5년 이상 만화 연재를 중단해야했던 문제의 ‘까투리여사’(서울신문, 윤영옥, 1972.6.19). |
2009년 6월 2일은 한국 시사만화가 등장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시사만화가회와 만화학계 등은 최근
‘한국시사만화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공식 출범을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의 시사만화는 그 역사만큼이나 오랜 수난을 겪었다.
한국의 시사만화는 그 역사만큼이나 오랜 수난을 겪었다.
특유의 과장·풍자를 통한 저항정신으로 인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가장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독자들에게는 짜릿한 통쾌감을 주었다.
일제강점기, 미군정시대, 군부독재시대를 거치는 동안
권력자를 촌철살인의 필치로 조롱한 신문의 시사만화는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된 그 역할과 기여도에 비해 그동안 다소 과소평가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된 그 역할과 기여도에 비해 그동안 다소 과소평가해온 것도 사실이다.
시사만화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 손문상 집행위원장은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중요한 부분에서 한국의 시사만화는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며
나름대로 고통스럽게 제 역할을 수행해왔는데도 연감 등 변변한 기록조차 없다”며 "
이번에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를 출범한 것은 시사만화의 정체성을 찾고 중흥의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 시사만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 직전이다.
국내에 시사만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 직전이다.
문화평론가 손상익씨(코믹플러스 대표)는 "당시의 한국 신문은 일본에서 도입한 신식인쇄기계로 찍었으며
한일합방 이전에도 일본 측의 검열이 있었다”며 "이런 불행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난 신문시사만화였지만
우리의 초창기 민족지계열 시사만화는 민족계몽을 외치고 일본의 침략 기도를 비판하는 민족주의 저널리즘을 구현했다”고 밝혔다.
한국 시사만화의 효시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이도영이 그린 ‘삽화’라는 제목의 만평이다.
한국 시사만화의 효시는 1909년 6월 2일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이도영이 그린 ‘삽화’라는 제목의 만평이다.
이때부터 줄곧 이도영의 만평은 일제의 탄압과 그에 아첨하는 매국노 무리 등을 치열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다.
그 때문에 일제는 만평을 통째로 삭제하거나 내용의 일부를 수정하기도 했다.
대한민보는 일제의 사전검열로 만화를 싣지 못할 경우 해당란을 시커멓게 먹칠해 인쇄를 감행함으로써 저항의지를 분명히 했다.
1909 대한민보 ‘삽화’가 효시
급기야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하고 민족지를 폐간했다.
1909 대한민보 ‘삽화’가 효시
급기야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하고 민족지를 폐간했다.
그 대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창간했다.
하지만 1920년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 3개의 민간신문을 발행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들 신문에도 사회의 여러 부조리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담긴 시사만화가 실렸다.
이때가 시사만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때다.
시사만화평론가 김진수씨(인터넷만화신문 ‘코카뉴스’ 이사)는
"한일합방 전에는 일제에 대한 직설적 비판이 많았으나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제의 검열 탓에
언제나 직접적인 풍자보다는 간접적 풍자를 할 수밖에 없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
비비 꼬아 비판의 대상을 모호하게 하는 방식 등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한국 신문의 최초 시사만화로, 이도영이 그린 대한민보 창간호의 시사만평(1909.6.2). |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공포(1925년 4월 12일)하자마자
그해 9월 8일 조선일보에 치안방해라는 이유를 들어 발행정지처분을 내렸고
잡지 개벽도 ‘불온한 문구가 충만하다’며 발행정지처분을 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9월 14일 ‘다 꺾고 나면 나올 것이 무엇?’이라는 독자만화를 게재했다.
엄지에는 ‘개벽’, 검지에는 ‘조선일보’라는 글씨가 써 있고,
그 손가락을 꺾는 다른 엄지에는 ‘당국’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권력에 의해 손가락 꺾임을 당하고 있는 손에는 언론기관이라고 써놓아
일제가 차례로 언론의 기를 꺾고 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다 꺾고 나면 바로 ‘주먹’이 됨을 만화는 상징했다.
해방 후에도 시사만화의 파고와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시사만화의 파고와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손상익씨는 "독재와 쿠데타에 의한 권위주의 정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일제강점기 못지않은
표현의 위축을 맞았는가 하면 시민혁명과 항쟁으로 맞은 제2공화국과 1987년 이후에는
언론의 자유를 구가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손씨는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신문 시사만화는 대중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매체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고 덧붙였다.
해방 직후 시사만화를 게재한 대표적 매체는 서울신문, 중앙신문, 민보, 대동신문, 평화일보 등이다.
해방 직후 시사만화를 게재한 대표적 매체는 서울신문, 중앙신문, 민보, 대동신문, 평화일보 등이다.
신문 시사만화가로는
서울신문과 민보, 대동신문, 자유신문 등에 작품을 연재한
김용환을 비롯해
조선일보에 주로 게재한 김규택과
좌일계열의 시사만화가 정현웅,
자유신문의 임동은,
경향신문의 최영수,
주로 해외정치 소재의 시사만화를 그린 평화일보의
석천 등이 있다.
우리 신문에 네 칸 시사만화가 처음 선보인 것은
우리 신문에 네 칸 시사만화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20년 4월 김동성이 동아일보에 밭전(田) 자 형식으로 게재한 만화이지만
네 칸 시사만화의 실질적인 출발을 알린 것은 1945년 10월 전후의 시기다.
1945년 11월 1일 중앙신문 창간호 2면에 김용환의 ‘박첨지’가 첫 연재를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신문에서 세로기둥 모양의 네 칸 시사만화가 봇물을 이루었다.
김성환의 ‘고바우영감’(동아일보),
김경언의 ‘두꺼비’(경향신문),
김기율의 ‘도토리’(서울신문),
신동헌의 ‘주태백’(연합신문) 등이 네 칸 연재만화로 등장했다.
김진수씨는 "당시 주로 신문 사회면에 배치한
네 칸 연재만화들은 처음에는 정치성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사성을 강화했다”고 전했다.
특히 ‘고바우영감’은 한국 신문 시사만화 사상 초유의 대중적 인기를 획득했다.
특히 ‘고바우영감’은 한국 신문 시사만화 사상 초유의 대중적 인기를 획득했다.
자유당정권 때부터 5공시절까지
부패정권을 비판하고 서민층의 애환을 대변하는 저항만화로 대중에 각인됐다.
고바우노래가 유행하고 고바우라는 이름을 빌린 상점이 증가했을 정도다.
때문에 정부의 탄압이 거셌다.
1958년 1월 23일자 ‘고바우영감’으로 인해 김성환 화백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현재의 청와대 격인 경무대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심지어
‘똥을 치는’ 사람도 ‘권력’이 있다는 내용을 다뤄 벌금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김진수씨는 "육영수 여사가 암살당했던 1974년에 김성환 화백은 두 번이나 감옥신세를 졌다”며
"어떤 경우에는 동아일보 동료들이 감옥에서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파업을 계획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 시절 김 화백은 결국 정직을 당해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또 1967년 8월부터 서울신문에 ‘까투리 여사’를 연재한 윤영옥 화백도
정부의 새마을운동을 비판한 1972년 6월 19일자 만화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고,
이후 5년 이상 만화 연재도 중단해야 했다.
‘고바우영감’과 함께 신문 네 칸 시사만화의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품은
‘고바우영감’과 함께 신문 네 칸 시사만화의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품은
1955년 7월 1일 경향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안의섭의 ‘두꺼비’다.
자유당 비판에 앞장선 야당지(野黨紙) 경향신문 논조에 걸맞은 직설적 정치풍자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두꺼비’는 1961년까지 경향신문에서 연재하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걸쳐 한국일보에서 연재했다.
정운경이 대한일보에 게재한 ‘왈순아지매’도 1960년대 이후 인기를 얻었다.
‘왈순아지매’는 서울 중산층 가정의 가정부 이름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와 함께 발효한 계엄령에 따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와 함께 발효한 계엄령에 따라
서울시청에는 계엄사령부 언론검열단이 상주해 일간신문 기사를 사전 검열했다.
1979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 네 칸 시사만화 ‘나대로선생’은 ‘불가’ 판정을 받았고
조선일보의 1980년 6월 24일자 한 칸 시사만화도 ‘불가’판정을 받아 독자를 만나지 못했다.
5공 말기였던 1986년 한국일보 ‘두꺼비’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안의섭 화백이 정보기관에 강제 연행돼 조사까지 받았고, 1년 7개월간 작품연재를 중단당했다.
김진수씨는 "신군부는 신문만화의 원고를 일일이 군인들이 검열하는 악독한 언론 통제를 실시했고
선 하나 글자 하나에도 시비를 걸었으며 툭 하면 수정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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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신군부에 의해 신문게재 불가판정을 받은 오룡의 조선일보 6월 24일자 시사만화. ‘검열필’ 이라고 찍힌 도장이 선명하다. 오른쪽 사진은 현재 경향신문에 게재하는 김용민의 한 컷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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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환경 달라져 비판정신 위축
1987년 6·10 항쟁은 6·29선언을 낳았다.
이어 그동안 언론을 옭아맨 ‘언론기본법’도 국회에서 폐지했다. 신문이 4·19 이후 27년 만에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정권에 이어 노태우정권이 탄생하자 대다수 한국의 신문 시사만화는 의외의 행보를 보였다.
노 정권을 ‘민주화 실현 주체’로 규정하고 야당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진수씨는
"심지어 ‘고바우영감’ ‘두꺼비’ ‘왈순아지매’ ‘나대로선생’ 등 네칸 만화들은
노동자들의 파업 등 생존권을 위한 투쟁을 매도하고 왜곡하는 내용을 보이기도 했다”며
"이와 달리 한겨레의 박재동, 경향신문의 김상택 등은
과거 네 칸 연재만화들이 담당한 과감하고 적극적인 권력 비판을 선보였다”고 말했다.
김진수씨는
"특히 박재동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진보성을 보탠
새롭고 참신한 한 칸 만평을 선보임으로써 시사만화의 한 칸 만평 시대를 열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경향신문은 김용민(한 컷 만평)과 박순찬(4컷 만화),
현재 경향신문은 김용민(한 컷 만평)과 박순찬(4컷 만화),
서울신문은 백무현,
조선일보는 신경무,
한국일보는 배계규,
한겨레는 장봉군,
중앙일보는 김상택이 시사만화를 맡고 있다.
동아일보는 2002년 이후 만평을 없앴다.
아쉽게도 신문 시사만화는 과거와 같은 독자의 열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쉽게도 신문 시사만화는 과거와 같은 독자의 열광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김진수씨는 "권력의 속성은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을 대체됐고,
신문사 내부의 자체통제도 시사만화가들의 자유로운 비판정신을 위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광고주인 재벌을 비판하려면 신문 경영진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손문상 집행위원장은 "시사만화가들이 자성해야 하지만 예전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시사만화가 줄어든 것은
시사만화가가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환경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신문사 경영진이나 데스크가 시사만화를 신문을 경영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로 판단하다 보니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온라인시대를 맞아 다매체가 공존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환경은 시사만화의 존립까지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시대를 맞아 다매체가 공존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환경은 시사만화의 존립까지 위협하고 있다.
손상익씨는
"소수의 신문과 방송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20세기 종이시대와 달리
21세기에는 인터넷을 주축으로 연일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에
종전 오프라인 매체가 가진 권위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여기에는 시사만화도 포함된다”며
"온·오프라인에 수많은 매체가 존재하다 보니 신문사 역시 상업적·경영적 차원에서 생존하려는 목적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데다
민주화가 진작 이루어진 것도 시사만화의 상대적 효용가치를 상실하게 했다”고 분석했다.
손씨는
또 "이런 환경에서 시사만화가가 살아남으려면
대중의 요구에 발맞춰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상품성 높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선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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