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강인춘 기자]
▲ 성냥개비를 거꾸로 잡고 그림을 그린다 |
ⓒ2005 강인춘 |
나에겐 그림을 그릴 때마다 즐겨 쓰는 또 하나의 붓이 있습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냥개비입니다.
무슨 생뚱맞는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성냥개비는 서슴지 않고 켄트지 위를 제멋대로 휘저어가면서 내 마음을 판박이처럼 옮겨 놓으니,
나는 그를 이름하여 '성냥개비 붓'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매우 아끼며 사랑합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 언젠가부터였습니다.
모 출판사에서 특이한 책의 그림 청탁을 받았습니다.
내 그림의 단순한 '컷'들을 모아 주니어를 위한 노트 형식의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기획이라 기꺼이 응했습니다.
▲ 팔에 힘을 빼고 가는 선으로만 이어서 여인을 그렸다. |
ⓒ2005 강인춘 |
그리고 그냥 평소의 습관대로
펜이나 붓으로 시작할까 했지만
이번엔 좀 색다른 도구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책상 한쪽 귀퉁이에 널려져 있는
성냥개비를 보았습니다.
"글쎄…."
성냥개비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화약고 있는 쪽을 손 안으로 해서
거꾸로 잡았습니다.
성냥개비 끝쪽에 먹물을 찍어
켄트지 위에 '주욱~' 그어 보았습니다.
선의 흐름이 곱질 않고
울퉁불퉁 멋대로 흘렀습니다.
다시 손에 힘을 빼고
천천히 성냥개비를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려가면서 그었습니다.
순간 머리 끝이 쭈볏해지면서
나는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래! 그래… 이거야!"
▲ 굵고 가는 선이 함께 하면서 완성 되어진 그림 |
ⓒ2005 강인춘 |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던간에 항상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시간 한 장의 하얀 켄트지를 책상 위에 가지런히 펴 놓았습니다.
그리고 붓(성냥개비)을 들어 먹물을 듬뿍 찍었습니다.
가슴이 뜁니다.
성냥개비를 쥔 손에 가는 경련이 입니다. 순간 삶의 희열을 느낍니다.
아직도 붉은 피가 내 가슴을 치고 있다는 격동의 고동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살아 있습니다.
하얀 켄트지의 흰 여백에 정열을 쏟습니다.
내 마음 그대로 숨김없이 쏟아냅니다.
성냥개비는 조용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습니다.
어느 덧 그 곳엔 내 마음이 활짝 펼쳐져 있습니다.
▲ 성냥개비 열개가 소멸된 그림. 터치가 자유로워 끝이 쉽게 닳았다. |
ⓒ2005 강인춘 |
모필이나 펜도 각기 나름대로의 필체가 있지만 성냥개비는 상당히 특이했습니다.
성냥개비의 끝에 먹물을 듬뿍 묻히느냐,
살짝 묻히느냐에 따라 생각하지도 못한 터치가 만들어져 나옵니다.
굵었다가,
가늘어졌다가 아니면 할퀴고 지나간 듯 거칠어졌다가
다시 끊어질 듯,
겨우 이어져가는 먹선의 맥박이 내 호흡을 숨막히게 합니다.
그리하여 더러는 바보처럼 실눈을 뜨면서 무아지경에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 성냥개비로 쓴 글은 특히 그 구성이 꽉 차있어 재미 있다.가로로 정렬된 것이 아니고 글과 글사이의 여백에 따라 글씨의 크고 작음이 잘 배치되어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이 그린다. |
ⓒ2005 강인춘 |
'성냥개비 붓'은 될수록 멀리 꼭대기의 동그란 화약고 부분 쪽을 팔의 힘을 빼고 '사알짝' 잡아야 합니다.
힘을 빼면 뺄수록 그 매력은 더합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성냥개비를 돌리기도 하고, 곧추 세우기도, 뉘이기도 하면서 굵고 가늘기를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성냥개비 그림으로 출간된 책의 한부분. | |
ⓒ2005 강인춘 |
어느 때는 하도 살짝 잡아 팔의 경련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련이 그대로 먹선으로 옮겨지면서 묘한 터치로 켄트지 위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것이 바로 '성냥개비 붓'의 진짜 매력이기도 합니다.
경련이 클수록 그림은 살아납니다.
그림뿐이 아닙니다. 글씨도 멋지게 그려 냅니다.
그래서 나는 글씨를 쓰는 게 아니고 그림처럼 그려나갑니다.
지금까지 글씨를 쓴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나에게서 글씨는 정말 그리는 것입니다.
"글씨를 그린다구요?" "그럼 글씨를 씁니까?"
'作家 · Wri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왕릉의 비밀' 파헤친 삼총사 (0) | 2008.05.20 |
---|---|
소설가 박경리씨 별세…‘토지’의 품으로 돌아가다 (0) | 2008.05.05 |
“작가로서의 나를 알아준 한국”…佛소설가 베르베르 내한 (0) | 2008.04.27 |
'토지' 박경리 작가 위독…"참 홀가분하다" (0) | 2008.04.25 |
최민식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중에 두명의 최민식이 나에게 유명합니다. (0) | 2008.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