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시민기자 세 명이 뭉쳤다.
한 명은 2005년 올해의 뉴스게릴라, 두 명은 그 해의 2월 22일상 수상자다.
바로 한성희·나영준·최육상 기자가 주인공이다.
이들이 뭉쳐서 만든 결실은 <여기자가 파헤친 조선왕릉의 비밀>.
한성희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1년 8개월 동안 연재한 기사를 책 두 권으로 묶었다.
애독자였던 최육상 기자가 출판을 제의했고,
창작 경험이 있었던 나 기자를 끌어들이면서 시민기자 출판팀이 꾸려졌다.
출판경험이 전혀 없었던 시민기자 세 명의 만남. 초보 출판가들치곤 결실이 나쁘지 않다.
출간 2주만에 초판이 모두 나갔고, 현재 재판이 나가고 있다.
나름대로 미소를 지어도 될 만한 성적이다.
책 홍보에 여념이 없을 이들 세 명을 9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 사람은 아주 시끌벅적하게 등장했다.
"한 기자님 가운데 앉으세요. 우리들이 옆에서 보좌하는 모양새로."
"아유, 난 혼자 앉을래요." "아녜요. 그래도 가운데 앉는 게 보기 좋아요."
거의 1년 동안 동고동락한 흔적이 잘 드러난다.
이들은 자신들 외에도 수많은 시민기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사진·디자인·감수 등 여러 부문에 시민기자들의 땀과 애정이 녹아들어있다고.
한성희 기자는 "여러 시민기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연합군(?)이 만든 <조선왕릉>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봤다.
▲ 왼쪽부터 나영준, 한성희, 최육상 기자. |
ⓒ 오마이뉴스 조경국 |
"교정만 각각 다섯 번... 나중에 원고가 무섭더라"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 세 명이 모여서 책을 만들었다는 게 상당히 의미있다. 어떻게 세 명이 뭉치게 됐나.
최육상(이하 최) : 원래부터 알긴 알았는데 함께 책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당시 한성희 기자가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로 선정되면서 인터뷰 기사를 내가 쓰게 됐다.
인터뷰를 하면서 한 기자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됐고,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당시 출판사(최육상 기자는 디지털 컨텐츠 회사 운영 중)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1호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한성희(이하 한) : 연재 시작한 지 2개월 뒤 책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끝날 때까지 아무 곳과 계약하지 않았다.
계약하고 나면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역신문사에서 편집일을 맡고 있고,
나영준 기자는 책을 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뭉치면 한 권 책을 만들 수 있겠다 판단했다.
오마이뉴스 : 본격적인 첫 모임을 언제 가졌나.
최 : 하하. 참 재미있는 게 1월 1일 왕릉에서 출판팀이 처음 만났다.
원래 그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창경궁 지킴이인 진모씨가 갑자기 한성희 기자가 있는 파주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얼떨결에 우리 세 명이 동시에 장릉에 나가게 됐다.
새해 첫날을 왕릉에서 보내며 출판계획을 의논했다.
▲ 나영준 기자. 전체 교정과 편집을 맡았다. | |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오마이뉴스 : 역할 분담이 잘 이뤄졌나.
한 : 교정은 모두 봤다. 각각 다섯 번씩은 봤을 것이다.
나중에 지겨워서 책장 넘기는 것도 싫었다.
그외 역할은 뚜렷하게 나눠졌다.
나영준 기자는 전체 편집과 사진 보충,
최육상 기자는 전체 진행과 기획을 맡았다.
오마이뉴스 : 분위기가 화기애애한데,
오히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나빴던 점도 있었을 것 같다.
나영준(이하 나) :술버릇을 너무 잘 알게 된 게 단점인가?
한 : 손발이 잘 맞았다.
일 때문에 충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목에 '여기자' 논란... 꼭 '여(女)'가 들어가야 돼?
오마이뉴스 : 제목 때문에 충돌이 있었을 것 같다.
한 : (웃음) 그 부분이 가장 진통이 많았던 부분이다.
우선 '파헤친'이 너무 자극적이고,
꼭 '여기자'가 들어가야 하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최육상 기자는 이 책의 주 타깃을
30~50대 남성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여기자'가 들어가는 게 옳다고 봤고,
'파헤친'이 보다 읽히기 쉬운 제목이라고 판단했다.
굳이 '기자'라고 한 것은 이 책이 역사서인 만큼 검증,
신뢰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 : 재미있는 에피소드인데,
사람들이 '여기자가 파헤친'이 아니라,
'여기저기 파헤친'이라고 종종 부르더라.
내가 처음에 제안한 제목은 '여기자의 조선왕릉 이야기'였다.
최 : 제목을 확정한 뒤,
아는 시민기자들한테 돌려서 물어봤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필요 이상 자극적이고 내용이 없다면 문제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하고 밀어붙였다.
지금껏 제목이 나쁘다고 항의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 출판사 이름지을 때 한참 고생했다.
웬만한 이름은 다 등록돼 있는 거다.
그 때 누군가 김솔지 시민기자 이야기하다가, '솔지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검색해보니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솔지미디어'라고 등록했다.
오마이뉴스 : 그러면 이 책이 나오게 된데 김솔지 기자도 도움을 준 셈이다.
나 : 박병순 기자도 고생 많이 했다.
경기도 일대 보충 사진 찍으러 다닐 때 1박2일 동안 운전을 해주었다.
박봄이 기자는 디자인 작업을 했고, 이동환 기자는 추천사를 써주었다.
김기 기자는 문화 분야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이 기사 한편 쓸 시간이면 다른 기사 대여섯 썼을 것"
▲ 최육상 기자. 전체 기획을 맡았다. | |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오마이뉴스 : 책 얘기를 해보자.
무려 1년 8개월 동안 연재한 글을 묶었다.
그 긴 기간 동안 연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한 : 매 글의 방향 잡기가 힘들었다.
1주일에 한 편씩 꼭 쓰자고 다짐했지만,
보름 동안 글을 못 올린 적도 있다.
그럴 때면 독자들이 '왜 안 쓰냐'고 쪽지를 보내곤 했다.
자료 수집이 힘들었고, 분석과정이 길었다.
오마이뉴스
어떻게
'조선왕릉'이라는 딱딱한 소재를 연재할 생각을 하게 됐나.
한 2004년 3월부터 공순영릉 문화관광해설사를 맡았다.
그때 왕릉 관련 책들을 많이 뒤지게 됐는데, 신경질이 났다. 기본 내용이 부족했고, 너무 딱딱했다.
수치가 틀려 오히려 헷갈리는 부분도 많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제대로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이뉴스 : 딱딱한 소재였는데도 조회수가 꽤 높았다.
'연산군 독살' '북벌 영웅 효종 뒤집어보기' 등
논쟁성 기사들이 많아 관심을 끈 듯하다.
한 : 아마 기자의 시각으로 접근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이상하다 싶으면 관련 자료를 모두 뒤졌다.
'연산군 독살'에 관해 글을 쓸 때는
연산군 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뒤졌다.
그런데 일기가 너무 부실했다.
그래도 왕인데,
어떻게 초등학생 일기 수준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폭군이라도 기록은 남겼을 텐데.
조작됐을 거란 의심이 들었다.
기록을 살펴보니 중종반정 성공 뒤 얼마 뒤 연산군이 죽었다. 이유가 '학질'이다.
학질이 무언가. 말라리아다. 그 때가 음력 11월 6일이었다.
즉 12월이란 뜻인데, 한 겨울에 말라리아에 걸리는 게 말이 되나. 독살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오마이뉴스 : 독자 반응이 꽤 좋았다. 대부분 호평이었다.
한 : 보고 울었다는 독자가 많았다.
날카로운 독자도 많았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공부가 많이 됐다. 한편으론 더 잘 써야겠다는 부담감도 들었다.
오마이뉴스 : 폐비윤씨에서 부친의 이름을 잘못 썼다는 댓글도 있었다.
독자들이 굉장히 꼼꼼하게 보더라.
한 : 그것은 원 자료인 조선실록이 잘못돼 있었다.
나도 나중에 윤씨집안 족보를 보고 잘못 된 걸 알았다.
사관들도 잘못 쓴 게 많더라. 사실 쓰는 동안 머리가 많이 아팠다.
한 독자는 연산군 자식이 5남2녀인데, 왜 7남2녀라고 쓰냐고 따지더라.
긴장이 많이 됐다. 기사를 굉장히 빠르게 쓰는 편인데, 이 기사 쓸 때는 그렇지 못했다.
아마 이 기사 하나 쓰는 시간이면 다른 기사 대여섯 편은 썼을 것이다.
바퀴벌레 나오는 여관에서 작업
▲ 저자인 한성희 기자. | |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오마이뉴스
왕릉 취재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다고 들었다.
한 : 왕릉이 참 신기하다.
동구릉에 갔을 때 찌는 듯이 더운 날씨였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가 쳤다.
30분을 내리다가 사진을 찍을 땐 감쪽같이 그쳤다.
사진을 다 찍고 나니 다시 내리더라.
게다가 왕릉 근처에선 핸드폰이 잘 안 터진다.
평지라서 안 터질 이유가 없다.
아, 그리고 막바지 작업 때 바퀴벌레 나오는 여관에서
보름 정도 머물렀던 게 기억난다.(웃음)
최 : 한성희 기자는 왕릉에 미쳤다고 보면 된다.
사무실 계단 걷기 싫어서
한 번 사무실에 들어가면 안 나오는 게 한 기자였다.
그런데 왕릉에만 가면 날아다녔다.
나와 나영준 기자가 좇아다니느라고 무척 고생했다.
나 : 따옴표 바꾸는 게 너무 힘들었다.
기사에선 영문 따옴표를 쓴다.
그러나 책에선 한글 따옴표다.
일일이 바꾸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겹다.
오마이뉴스 앞으로 계획은? 또 다시 작업할 생각이 있나.
최 : 지금은 많이 읽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다.
앞으로 이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CD 또는 만화영화로 낼 생각을 갖고 있다.
한 : 이번 책을 내는데 수많은 시민기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아마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책 못 만들었을 것이다. 숨은 인재들이 참 많았다.
덕분에 일이 쉬웠다.
고려왕릉편을 써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당분간 힘들 것 같다.
고려왕릉이 대부분 북한에 있고, 훼손상태가 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선왕궁 쪽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나 : '책 끝내고 난 뒤 쉬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 끝내고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도망 못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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