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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와르 [퐁네프 다리] 1872

강개토 2010. 2. 11. 15:09

퐁 네프 다리

1872년 프랑스 정부군은 파리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전쟁의 상흔을 덮어둔 채 도시는 서서히 일상의 생활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파리코뮌의 결과는 참혹했다.

새로운 공화주의자들이 집권했는데, 이들은 대체로 군주제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파리코뮌에 가담했던 좌파들에 대한 조처는 무시무시했다.

쿠르베를 비롯해서, 숱한 코뮌의 지도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처형되었다.

감옥에 수감되는 건 그 중에서도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쟁의 기억을 씻어내는 퐁 네프의 역동적인 풍경


티에르 정부는 차관을 빌려와서 전쟁에서 진 빚을 갚았고, 프러시아군은 새롭게 설정된 국경선 너머로 재배치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파리지앵을 비롯한 프랑스인의 자존심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이런 프랑스인의 심정에 대한 토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이때 지어졌다.

나폴레옹 3세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은 신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치세를 기념하기 위해 몽마르트 언덕에 백색의 성당을 축성했다.

이 성당이 바로 지금 파리에서 볼 수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이다.

 

 

 

나폴레옹 3세는 권좌에서 사라졌지만, 오스망 남작의 파리 재개발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파리는 명실상부하게 여전히 유럽의 중심이었다.

이런 파리지앵의 염원을 담아내려는 듯, 생 라자레 역의 거리 명칭은 유럽 각국의 수도 이름을 붙여 놓았다.

도대체 이런 자부심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럽 최초로 군주제를 혁명으로 폐지하고 스스로 공화제를 수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을 것이다.

이른바 진보에 대한 확신이 프랑스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보주의는 보불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상처 입은 영혼은 아프지 않은 척하기 마련이다.

파리지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한시바삐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과거의 삶을 회복하고 싶어했다.

르누아르는 누구보다도 이런 파리지앵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는 이 무렵에 퐁 네프로 나가서 역동적인 거리의 풍경을 담아내었다.

붐비는 군중들을 화폭에 재빨리 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르누아르가 짜낸 묘안은 희한한 것이었다.

그는 동생 에드몽을 시켜서 행인들을 붙잡고 가짜 설문조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그 틈을 타서 르누아르는 행인들의 인상을 잡아놓을 수 있었다.

 

 

그림 시장의 활성화와 살롱 미술의 퇴조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이 모두 르누아르처럼 쉽게 전쟁을 잊었던 것은 아니다.

피사로시슬리는 한동안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사로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프러시아 군인들이 자신의 집을 도살장으로 쓰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왔을 때 상황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당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실내는 도살된 가축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들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프러시아 군인들은 그림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캔버스 천을 찢어서 앞치마로 사용했다.

참으로 값비싼 앞치마였다고 할 수 있다.

시슬리는 파괴된 아버지의 상가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드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운영하던 은행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전쟁이 초래한 일시적 경제난은 곧 해결되었다.

예전보다 훨씬 쉽게 그림을 사고 팔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경제적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불전쟁은 귀족의 영향력을 프랑스에서 퇴조시켰다.

부르주아가 경제권을 장악했고, 거대 산업자본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시장논리가 더욱 강력하게 관철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상인들이 한몫을 잡을 수 있는 기회들이 빈번해졌다.

당연히 그림 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살롱 미술의 퇴조와 더불어서 인상파에게도 혜택이 돌아왔다.

 

 

푸른 색 드레스와 파란 하늘에 담긴 파리의 순결함

르누아르는 이 사실을 잘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1872년에 그려진 퐁 네프의 풍경에서 시가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파리에 가서 볼 수 있는 평화로운 파리의 모습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양산을 받쳐 든 여인과 모자를 쓴 신사들,

그리고 산보 나온 강아지까지,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는 퐁 네프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도 보이지만, 위협적인 느낌을 주기보다,

행인 속에 섞여서 파리의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한가해 보인다.

1874년에 그린 [파리지엔느]에서

우리는 파리에 대한 르누아르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첫 번째 인상파 화가전에 전시했던 작품이다.

모델은 앙리에트 앙리오트인데 오데온이라는 극장에서 연기를 했던 배우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초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상파의 그림들이 으레 그렇듯,

이 그림은 앙리에트라는 개인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파리지엔느"라는 일반적인 파리의 시민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제공하는 것은 푸른빛 드레스이다.

천상의 빛깔 같은 이 색채에서

르누아르 특유의 직관을 읽을 수 있어서 신선하다.

푸른색은 말 그대로 순결을 상징한다.

여성의 얼굴은 요즘 말로 한다면 옷에 걸맞지 않은 ‘동안’을 하고 있다.

성숙하면서도 앳된 분위기를 동시에 풍기는 그림이다.

파리지앤느라는 보편적 존재가 제시하는 양면성을

 르누아르는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퐁 네프 다리]에서 르누아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이라는 상처의 기억과 이상이라는 꿈의 열망을 담아서

그는 하얀 구름으로 수놓아진 파리의 하늘을 그렸다.


 

 

이 하늘이야말로 [파리지엔느]의 푸른빛 드레스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전쟁의 흔적이 가시지 않았지만, 파리의 순결은 여전하다는 느낌이 두 그림에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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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