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는 권좌에서 사라졌지만, 오스망 남작의 파리 재개발은 멈추지 않았다.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파리는 명실상부하게 여전히 유럽의 중심이었다.
이런 파리지앵의 염원을 담아내려는 듯, 생 라자레 역의 거리 명칭은 유럽 각국의 수도 이름을 붙여 놓았다.
도대체 이런 자부심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럽 최초로 군주제를 혁명으로 폐지하고 스스로 공화제를 수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을 것이다.
이른바 진보에 대한 확신이 프랑스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진보주의는 보불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상처 입은 영혼은 아프지 않은 척하기 마련이다.
파리지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한시바삐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과거의 삶을 회복하고 싶어했다.
르누아르는 누구보다도 이런 파리지앵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는 이 무렵에 퐁 네프로 나가서 역동적인 거리의 풍경을 담아내었다.
붐비는 군중들을 화폭에 재빨리 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르누아르가 짜낸 묘안은 희한한 것이었다.
그는 동생 에드몽을 시켜서 행인들을 붙잡고 가짜 설문조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그 틈을 타서 르누아르는 행인들의 인상을 잡아놓을 수 있었다.
그림 시장의 활성화와 살롱 미술의 퇴조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이 모두 르누아르처럼 쉽게 전쟁을 잊었던 것은 아니다.
피사로와 시슬리는 한동안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사로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프러시아 군인들이 자신의 집을 도살장으로 쓰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왔을 때 상황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당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실내는 도살된 가축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들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프러시아 군인들은 그림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캔버스 천을 찢어서 앞치마로 사용했다.
참으로 값비싼 앞치마였다고 할 수 있다.
시슬리는 파괴된 아버지의 상가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드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운영하던 은행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전쟁이 초래한 일시적 경제난은 곧 해결되었다.
예전보다 훨씬 쉽게 그림을 사고 팔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경제적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불전쟁은 귀족의 영향력을 프랑스에서 퇴조시켰다.
부르주아가 경제권을 장악했고, 거대 산업자본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시장논리가 더욱 강력하게 관철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상인들이 한몫을 잡을 수 있는 기회들이 빈번해졌다.
당연히 그림 시장도 활기를 띠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살롱 미술의 퇴조와 더불어서 인상파에게도 혜택이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