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경험한 가족의 죽음과 이로 인한 공포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허약 체질로 태어나 잔병치레가 잦았던 뭉크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변해가는 아버지와 계속되는 가난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뭉크의 아버지는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며 점점 더 광적으로 변했고 종종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어머니가 천국에서 지켜보며 슬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이런 영향으로 뭉크는 악몽을 꾸거나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기도 했다. 뭉크는 후에 “나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라고 술회하였다.
뭉크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으며, 5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했던 남동생 안드레아마저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 만에 죽었다. 뭉크 또한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런 성장 환경은 뭉크를 죽음의 미학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뭉크의 가족은 1864년에 지금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Kristiania)로 이사하지만, 아버지의 벌이가 신통치 않아 자주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 10대의 뭉크에게 미술은 가장 큰 취미였으며, 이때 그린 드로잉과 수채화의 소재는 주로 집안의 내부나 약병 따위의 물건들, 그리고 풍경이었다.
화가로서의 출발과 첫사랑
뭉크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기술대학에 들어가서 공학,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을 공부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고 이윽고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이듬해 아버지의 실망을 뒤로 한 채 학교를 떠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뭉크는 1881년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예술학교(Royal School of Art and Design of Kristiania)에 등록하여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1년 후 학교를 떠나 젊은 동료들과 함께 도심의 칼 요한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를 빌려 작업실을 차리고, 1883년 산업미술전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뭉크의 화가로서의 인생이 펼쳐진다. 그런 와중에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오던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가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파리로 보낸다. 이 때 파리에서 머문 3주간의 경험은 뭉크로 하여금 그의 모든 감각을 기민하게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1885년 여름 뭉크는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Milly Thaulow)에게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감정이었다(뭉크의 일기에서 하이베르그 부인으로 회상됨). 뭉크는 밀리에게 매우 순정적인 사랑을 바치지만, 그녀는 매우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었다. 1889년 26살 무렵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이런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 뭉크는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결국에는 여성 전체를 가증스럽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에게 여성은 마돈나이자, 메두사의 얼굴을 뒤에 숨긴 존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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