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家 · Writer

폴세잔

강개토 2010. 4. 10. 11:54

자화상

세잔은 언제나 논란을 몰고 다니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그는 괴이한 존재로 종종 비쳤다.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를 기획할 때에도 그를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세잔을 다독거리고 이끌어준 이는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세잔뿐만 아니라, 인상파 화가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특히 세잔에게 더욱 그랬다.

세잔은 피사로의 집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피사로의 가족과 어울렸다.

 

 

특이한 성격의 괴짜 화가 폴 세잔

1877년 세잔에게 불편한 존재가 한 명 나타났다.

그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폴 고갱이다.

후일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그 타히티의 고갱 말이다.

세잔은 자신의 그림을 팔아볼 요량으로 파리에 머물렀지만 허사였다.

구매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인상파 화가들은 아름아름 인맥으로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대가족을 거느린 피사로도 살기에 벅찼다. 밭에 버려진 감자를 주워서 끼니를 해결하고, 외상으로 잡화나 옷을 사야 했다.

피사로를 먹여 살린 구세주는 카유보트였다.

마치 마르크스에게 엥겔스가 그랬듯이, 카유보트는 피사로의 그림 세 점을 750프랑에 사서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했다.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피사로는 어쩔 수 없이 한때 르누아르가 그랬던 것처럼 도자기 공장에 취직해서 타일이나 도자기의 문양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피사로는 자신의 그림을 모사해서 타일을 장식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타일을 주택에 사용한 사람들은 호사를 누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은 요즘에야 정당한 것이고, 그때는 피사로의 이름은 일부 미술애호가들이나 알고 있을 뿐이었다.

2년여 동안 그는 40여 개의 타일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양치기 소녀나 소떼들, 또 자신의 그림에 종종 등장했던 사과나 배추 수확하는 농부들이 주요 주제였다.

 

  

피사로의 문하로 들어온 고갱과 세잔의 만남

세잔은 빈손으로 퐁투아즈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었다.

오랜만에 피사로를 만난 세잔은 깜짝 놀랐다.

새로운 문하생이 피사로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29살 먹은 고갱이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고갱은 약관의 나이에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래서 너무 일찍 세상 물정을 알았던 것일까?

고갱은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부르주아의 안락을 버리고 화가의 삶을 택하고자 했다.

그것도 피사로처럼 혁명파에 붙어서 그림을 배우려고 했으니 그 앞날이 어떠할 것인지는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피사로는 세잔에게 그랬듯이 극진히 고갱을 가르쳤다.

그것이 세잔에게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

피사로와 세잔, 그리고 고갱은 퐁투아즈의 야외로 나가서 함께 그림을 그렸다.

카유보트처럼 고갱도 역시 화가 지망생이자 후원자였다.

고갱은 그 희한한 세잔의 그림도 사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갱에 대한 세잔의 시선이 바뀔 리 없었다.

그랬다면 어디 세잔이겠는가?

자화상에 드러나는 세잔의 모습을 보라.

고집스럽고 불만 가득한 표정은 세상과 절연하고 오직 그림만을 생각한 한 고독한 남성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피사로는 세잔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인상파 일원들에게 고갱을 소개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첫인상도 세잔과 비슷했다. 모네는 고갱을 대놓고 경멸했다. 그에게 고갱은 그냥 철없는 딜레탕트처럼 보였다. 돈도 좀 벌고 살 걱정이 없어지니까 그림이나 그리려고 기웃거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갱의 그림이 문제였다. 모네에게 그 그림들은 도대체 재능 따위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직 드가만이 고갱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드가의 심미안이 놀라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런 판단은 옳았기 때문이다.

 

그때 드가가 고갱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후일 고갱은 피사로에게 배운 것과 결별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고갱다운 특유의 그림들이 출현한다. 고갱은 인상파에게 중요했던 야외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고갱은 ‘자연’이라는 범주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던 인상파와 전혀 다른 미학의 차원을 발견한 것이다. 세잔과 고갱의 자화상 [레 미제라블]을 비교해보면, 그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중에 세잔이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실험들을 보면, 고갱은 분명 인상파를 계승하는 측면을 갖고 있다.

예술가는 닮은꼴을 싫어하는 것일까?

이런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세잔과 고갱은 악연이었다고 하겠다.

여하튼 전시회는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악명도 명성은 명성이었다.

 점차 비평가들 사이에서 인상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승세를 등에 업고 모네의 생 라자르 역 연작이 최고의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피가로>지에 모네의 그림을 호평하는 비평이 실리기도 했다.

모두 삐거덕거리면서 살아가긴 했지만, 서서히 인상파의 존재감은 파리의 미술시장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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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문화비평가,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대학교에서 철학석사학위를, 셰필드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지 The Bridgeman Art Library / 멀티비츠, TOPIC / corb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