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은 언제나 논란을 몰고 다니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그는 괴이한 존재로 종종 비쳤다.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를 기획할 때에도 그를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세잔을 다독거리고 이끌어준 이는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세잔뿐만 아니라, 인상파 화가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특히 세잔에게 더욱 그랬다.
세잔은 피사로의 집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하면서 피사로의 가족과 어울렸다.
특이한 성격의 괴짜 화가 폴 세잔
1877년 세잔에게 불편한 존재가 한 명 나타났다.
그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폴 고갱이다.
후일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그 타히티의 고갱 말이다.
세잔은 자신의 그림을 팔아볼 요량으로 파리에 머물렀지만 허사였다.
구매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인상파 화가들은 아름아름 인맥으로 자신의 그림을 팔아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대가족을 거느린 피사로도 살기에 벅찼다. 밭에 버려진 감자를 주워서 끼니를 해결하고, 외상으로 잡화나 옷을 사야 했다.
피사로를 먹여 살린 구세주는 카유보트였다.
마치 마르크스에게 엥겔스가 그랬듯이, 카유보트는 피사로의 그림 세 점을 750프랑에 사서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했다.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피사로는 어쩔 수 없이 한때 르누아르가 그랬던 것처럼 도자기 공장에 취직해서 타일이나 도자기의 문양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피사로는 자신의 그림을 모사해서 타일을 장식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타일을 주택에 사용한 사람들은 호사를 누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은 요즘에야 정당한 것이고, 그때는 피사로의 이름은 일부 미술애호가들이나 알고 있을 뿐이었다.
2년여 동안 그는 40여 개의 타일그림을 그렸는데, 주로 양치기 소녀나 소떼들, 또 자신의 그림에 종종 등장했던 사과나 배추 수확하는 농부들이 주요 주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