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준의영화창고

내 깡패 같은 애인

강개토 2010. 5. 25. 23:27

 

 

기획 단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제작되는 내내 관심을 받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무 소식도 없다가 개봉을 한두달 앞두고 불쑥 대중 앞에 나타나는 영화가 있다.

대부분 전자의 경우는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반면, 후자의 경우는 기대감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제작 단계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영화라면 완성도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을 시원하게 빗나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 <과속스캔들>이 그런 예다.

 

위의 두 영화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많은 장르들 중에서도 양질의 결과물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코미디 장르였다는 것이다.

제작 단계에서는 별로 관심도 없고 뭔지도 몰랐던 영화가 불쑥 나와서는 매우 효과적으로 웃기고 뭔가 곱씹을 만한 감정마저 안길 때,

그것은 기분 좋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다. 이번에 나온 <내 깡패 같은 애인>도 그런 영화다.

이런 영화를 찍고 있었나 의아했던 분들도 많이 계실 것이다.

대관절 나타나 건달과 평범녀의 사랑이야기라는 닳고 닳은 이야기를 들고 나온 이 영화는 상당히 놀랍게도, 애정을 줄 구석이 많은 영화다.

 
 

건달 오동철(박중훈)은 나이와 상관없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40이 되어서도 여전히 미수금 찾으러 다니는 일만 하고, 기껏 일을 주면 맞고 다니기나 하고,

그러면서 '가오' 생각한답시고 괴팍하게 성질 부리는 건 잊지 않는 철없는 남자다. 

저멀리 한강다리가 보일 만큼 높은 언덕바지에 위치한 그의 반지하방 옆에 어느날 20대 후반의 취업준비 세대 한세진(정유미)이 들어온다.

세진은 지방대를 나와 힘들게 서울에서 취직했건만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졸지에 백수가 된 신세.

열심히 취업을 준비하지만 가는 회사마다 지방대 출신인 그녀를 얕볼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속 없어 보이는 깡패같은 동철은 사뭇 거슬린다.

하지만 잦은 취업 좌절 때문에 침체되어 있던 세진의 삶에 수시로 동철이 끼어들면서 나름의 활력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세진은 그런 동철이 점점 친근해지기 시작한다.

 

10억원 내외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몇몇의 한정된 장소를 배경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결정적 동력으로 삼고 펼쳐진다.

이 속에서 박중훈과 정유미가 펼치는 화학작용은 예상보다 상당히 잘 어울린다.

<해운대>에서 영 적응 안되는 평범한 연기(물론 시나리오가 요구한 것일테지만)를 보여줬던 박중훈은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맞춤옷을 입은 완벽하게 몸에 스며든 연기를 펼친다.

 

(아마도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윤제균 감독이

<해운대>에서 박중훈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던 게 미안해서 이 역할을 준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가 과거에 여러 편 출연했던 사회물 속 캐릭터와 근작 <라디오 스타>에까지 이어져 온 '인간적인 루저'의 이미지가 잘 혼합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장면에서 특유의 천연덕스런 멘트 날리기로 웃음을 선사하다가도 그것이 어느 순간 페이소스가 되어 짠한 여운이 남게 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그가 정색하는 것을 보는 것을 어색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가 훌륭한 코미디 배우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훌륭한 코미디 배우는 절대 웃기는 것만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언뜻 박중훈과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정유미는 예상외로 잘 맞는 호흡을 과시하며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가족의 탄생>, 드라마 <케세라세라>에서 그랬듯

그녀는 화려한 외모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또래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도 그녀의 그런 소탈하고 솔직한 연기는 그런 능력치를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취업의 좌절 속에서 여러 번 실망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부유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담백하게 드러난다.

아무렇지 않은 듯 박중훈과 보여주는 코미디 연기의 합도 은근히 잘 맞아서 둘은 꽤 나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고 이 영화 속에서 꽤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되었다.

 

이렇게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의 외형을 지닌 듯 하고,

나 역시 여기서 박중훈과 정유미를 편의상 '커플'이라고 칭하지만,

이 영화는 엄밀히 말하면 로맨틱 코미디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버디무비와 로맨틱 코미디의 중간 단계에 서 있는 영화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동철과 세진 사이에는 단순히 '애정전선'이라는 말로만은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강력한 유대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좌절한 삶을 사는 사람'과 '곧 좌절할지도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의 유대감이다.

 
 

두 사람이 애틋한 감정을 서로에게 품게 되는 것은, 서로의 외모가 취향에 맞다거나,

성격에 맞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로 '이성적'으로 끌리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실패한 듯한 삶을 살고 있는 동철이 아직 젊은 세진을 '동경'하는 것도 아니고,

세진이 동철을 '동정'하기 때문도 아닌 듯 하다.

그들의 교감은 서로만이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삶'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는 않을 자신들만의 삶을 서로가 들여다보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들 사이의 감정은 단순히 달콤하기만 한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우정, 유대감으로 확장된다.

 

동철과 세진 중 현재 인생에서 '위너'라고 칭할 만한 사람은 없다.

동철은 이미 '루저'로 낙인찍인 사람이고, 세진은 까딱 잘못하면 '루저'가 될 기로에 서 있는 위태로운 청춘이다.

이들이 나누는 교감을 통해,

영화는 결코 우월한 위치에서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해 훈계하려 하지 않고,

같은 눈높이에서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세진이 생애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힘이 된 인물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히려 세진보다 못한 위치에 놓여 있던 동철이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여러 차례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세진을 바라보는 동철의 눈빛은,

성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어깨 너머로 구경하듯 지켜보는 여유로운 눈빛이 아니라 이미 겪어 봐서 잘 알기에 그녀만은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는,

그래서 더 깊은 걱정이 담긴 눈빛이다.

 
 

얕은 로맨틱 코미디로 생각될 수도 있었던 이 영화는

사실 현대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겪는 고민이 꽤 섬세하게 담겨있다.

특히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류전형에서부터 퇴짜맞기 일쑤인 세진의 고군분투를 통해

'88만원세대'가 겪는 극심한 취업난의 단면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무래도 영화다 보니 살짝씩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면접장에서 세진이 겪는 굴욕적인 상황이나 더 도전하고 싶은 세진이 오히려 다칠까봐 걱정되어

만류하는 아버지의 모습 등 보는 내내 '그래 저렇지'하며 고개를 끄덕일 만한 공감대가 얼마든지 이루어진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영리함을 자처하지 않는 이 영화는, 사회를 차분히 바라보되 어렵게 헤쳐나가려 하지 않는다. 

물론 참 뭐같은 현실이지만 현재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안타깝지만 인정하면서,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이 현실을 아프지 않게끔 받아들이고 끈질기게 맞서 싸우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더라도, 상당한 배려심이 담긴 위로임은 분명하다.

 

동철이 세진에게 때때로 건네는 대사 속에 이런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이미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기에 뭔가 거창한 충고는 못 해주지만,

동철의 말은 당장에 말이 안되는 것 같아도 어느 순간 가슴에 은근하게 사무치는 무언가가 있다.

 

대표적인 대사.

'외국에서는 취업 안시켜준다고 시위까지 한다는데,

우리나라 애들은 취업 안되는 게 자기 잘못인 줄 알아.

하지만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냐. 힘내 씨X.'

 

현실을 모르고 막 하는 소리같다.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동철의 이 말은

사실 우리가 사회의 잣대에 너무 휩쓸린 나머지 당연히 인식했어야 할 진실을 새삼스럽게 드러낸 것일 뿐이다.

결코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깡패답게 '힘내라'는 말 뒤에마저도 육두문자를 붙이는 그의 모습에서 당장은 웃음이 터지지만,

한편으로는 이 팍팍한 현실을 향해 일단은 막무가내로 돌진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격하게 다독이는 듯해 살짝 찡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처럼 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이 평균적인 위치에 있는 세진보다도

오히려 상대적으로 소외된 위치에 있는 동철의 시선을 통해 더 잘 드러나는 점이 흥미롭다.

현재 헤쳐나가고 있는 사람보다도, 한번 헤쳐나가보려 했다가 좌절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세상의 고통은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영화 속에서 동철이 몸담고 있는 조직 환경은

여느 조폭 영화에서처럼 매우 멋있다든가 매우 난폭하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현장이라기보다,

숱한 실패와 과오가 깃든 지긋지긋한 삶의 현장이다.

이런 곳에서 동철은 뭔가 중요한 위치에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었건만 여전히 조직 안에서 '쩌리' 취급을 당한다.

계속되는 쩌리 생활에 동철은 점점 지쳐가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는 점점 짙어진다.

뭔 말인지 몰라도 집에서 평상시에 교육방송에 TV 채널을 고정시켜 놓을 만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은 그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세진은, 세진에게 그가 그랬듯 지지부진했던 삶의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그의 삶에 대한 투쟁 의지는 자신을 바보처럼 믿고 따르는 새내기 조직원 재영(권세인)에게까지 파급력을 미친다.

 

결국 이 영화는 남과 여의 알콩달콩한 로맨스 뿐이 아닌,

밑바닥 사회와 평균 사회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팍팍한 삶을 향한 사람들 나름의 소박한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곱씹어 보면 이 정도의 저릿한 여운을 남기지만, 이를 대놓고 인상 쓰며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내 깡패 같은 애인>의 미덕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박중훈이 필두에 선 개그 코드도 상당히 알차고, 두 남녀가 펼치는 러브라인도 과장되지 않은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다.

그 속에 우리가 현실에서 결코 외면할 수는 없는,

바라봐야만 하는 씁쓸한 현실을 너털웃음에 담아 보여주면서 영화는 세상에 대한 재지 않고 소탈한 시선을 보여준다.

찡한 부분은 있어도 극도로 눈물을 짜내는 부분은 없다.

 

이 영화가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면,

그것은 뭐 누구의 죽음이나 청천벽력같은 갑작스런 사건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어떻게든 세상과 싸워보려 이를 꽉 물어보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부담없는 소품일 줄만 알았던 <내 깡패 같은 애인>은 사실,

현실에 숱하게 다친 우리의 마음을 투박하지만 진심어리게 쓰다듬을 줄 아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