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광무 1년) 9월 17일
고종황제가 세자(순종)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하사한 이 금책은 일종의 송덕문을 금에 새긴 것이다.
기존에는 왕비 등에게 옥으로 만든 옥책을 하사하고,
왕세자 등에게 죽편으로 만든 죽책을 하사하였는데,
1897년 고종이 조선의 국왕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서
단계가 격상된 금(金)으로 이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 |
황태자 금책 앞면.
김영수가 짓고, 민병석이 쓴 금책문이 보인다.
본래 당주홍으로 글자가 메워져 있어야 하는데,현전하는 황태자 금책은 모두 세척된 상태이다.
1897년, 23.5x10.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책의 제작 방식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대례의궤]
[대례의궤(大禮儀軌)]는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 의례와 절차를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황제국가의 위상에 맞게
새롭게 제작된 어보와 금책 등의 제작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어보와 금책은
재질, 문양, 용어 등을 모두 황제국가에 걸맞게 격상시켜야 하는
국가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당시 모두 새롭게 제작되었다.
[대례의궤]에 따르면
황태자 금책문(金冊文)은 매첩(每貼)에 5열로 배자하고,
극항(極行)의 경우 17자, 평항(平行)의 경우 15자로 만들었다.
또한 금책문의 제술관은 홍문관의 대학사였던 김영수였으며, 서사관은 홍문관의 학사였던 민병석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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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금책 뒷면.
홍선자지(紅扇子紙)로 배접된 뒷면의 사방에는
초룡(草龍)이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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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의궤] 부분.
황태자 금책 두 첩을 연결하고 있는 붉은색 끈이 그림에 보이고 있다.
현재 전하는 황태자 금책에는 이 끈이 전하지 않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
[대례의궤]에는
황태자 금책의 제작 사항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게 7근 12량의 황금으로 도금하여 2편을 제작한다.
매편의 길이는 1척 2촌, 너비는 5촌, 두께는 2분 5리이다.
이때 치수는 예기척(禮器尺)을 적용한다.
2첩(貼)에 책문을 서각하는데,
최초 책문을 서사한 대로
그 자수의 다과(多寡)와 배자(排字), 배항(排行)을 따른다.
당주홍(중국산 주홍색 물감)으로 서각한 글자를 메우고,
측변의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홍조(붉은색 끈)로 묶어서 열고 닫을 수 있는 서책(書冊)과 같은 형식으로 만든다.
뒷면은 홍운문(붉은 구름 문양)의 한단(중국 비단)으로 옷처럼 감싸서 보호하며,
홍선자지(붉은색의 부채 종이)로 뒤를 배접한다.
사변(四邊)은 초룡(용의 형상을 간단하게 한 것)을 조각한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해 황태자 책봉하며 하사한 유일한 금책
[대례의궤]에 설명되고 있는
황태자 금책의 제작 내용과
현전하는 황태자(순종) 금책의 상태를 비교해보면
두 가지 부분에서 현존하는 금책이 온전하게 전해져 내려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첫째,
글자가 붉은색 물감인 당주홍으로 칠해져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에 의해 깨끗하게 세척된 점이다.
이는 본 금책이 왕실에서 계속 세전되지 못하고,
중간에 유출되어 외국까지 나갔다 돌아오는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추정된다.
둘째,
두 편이 붉은색 끈인 홍조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홍조 또한 분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본래의 형태에서 이 두 가지가 훼손되었다고 하여
본 금책의 학술적이며 문화재적인 가치가 저하된다고는 할 수 없다.
금책을 둘러싼
홍운문 한단(漢緞) 등 부속적인 유물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고,
또한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해에
황태자를 책봉하면서 하사한 유일한 금책이라는 점,
제작 내역이 [대례의궤]를 통해서
거의 그대로 복원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 |
철인왕후 옥책(玉冊). 철인왕후(1837-1878)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옥책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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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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