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쓰이지 않지만 한때 널리 이용되던 한글 세벌식 타자기의 이름은 ‘공병우 타자기’다.
타자기를 발명한 공병우 박사는 서울 광화문 공안과의 초대 원장이었다. 아마추어 사진가 겸 자동차 연구가이기도 했던 그는 해방 이후의 대표적 기인(奇人)이었다.
공 박사는 1906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의학교습소를 거쳐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36년 우리나라 첫 안과의사가 돼 돌아온다.
공안과를 개원해 환자들을 보던 38년 어느날,
독일 베를린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한글학자 이극로가 찾아왔다.
눈병을 치료하러 왔던 그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고,
공 박사는 큰 감화를 받는다.
마침 일본어로 쓴 자신의 저서를 한글로 번역하던 그는 한글 타자기 개발에 뛰어든다.
10여년 뒤인 49년 첫 ‘공병우 타자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초성-중성-종성이라는 한글 창제 원리를 따른 것이다.
요즘 우리가 쓰는 자판은 ‘자음-모음’의 두벌식으로, 자음을 한 번 더 찍어 받침을 완성한다.
세벌식은 자판 오른쪽에 자음, 왼쪽에 모음, 왼쪽 끝에 받침을 배치한 형태다.
자음-모음-받침을 모아 찍을 수 있어 속도가 빠르다.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글자 크기가 다르다.
요즘의 ‘안상수체’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빠르게 보급됐던 공병우 타자기는
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네벌식을 표준으로 채택하면서 밀리기 시작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네모 반듯한 모양이 좋다’며 두벌식을 컴퓨터 표준 자판으로 채택하자
세벌식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20여년간 한글학회 이사를 지내기도 한 공 박사는
정사각형 모양의 글자가 한글 창제 원리와 맞지 않는다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88년에는 팔순의 고령이었음에도 한글문화원을 설립해 한글 글자꼴을 연구했다.
공 박사의 지원을 받은 젊은 연구자
박흥호, 이찬진 등은 훗날 한글 타자 입력 소프트웨어 ‘아래아 한글’을 만든다.
공 박사는 겉치레를 파괴한 생활 태도로도 유명했다.
“옷 치장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며 한복을 입지 않았고,
폐백 인사를 하러 온 며느리에게 “절은 그만두고 악수나 하자”고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매장 대신 화장(火葬)을 주장했으며,
자신의 시신은 죽은 뒤 해부학 교실에 기증하라고 유언했다.
‘조선 몇 대 고집쟁이’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던 그는
95년 3월7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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