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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포로로 잡혔을때의 제로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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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모는 물론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고야틀레이, 즉 ‘하품하는 자’였다. 최고 용맹한 자에게 ‘하품하는 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 자체가 전략적인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전사의 이름은 나중에 제로니모가 되는데, 제로니모의 생애를 소설화한 포리스트 카터는 그가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 사연을 매우 재미있게, 아니 슬프게 그리고 있다.
멕시코의 ‘카스키예’라는 마을에서였다. 아파치족은 카스키예의 수호성인인 성 제로니모의 축일에 카스키예를 습격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카스키예 성당의 도미니크 신부는 인디언을 끔찍이 싫어하는사람이었다. 그는 인디언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다. 성당에서는 성 제로니모의 생을 재현하는 연극이 상연될 예정이었다. 막이 오르자 한 사내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어디를 보아도 성인 제로니모 같지는 않았다. 비교적 작은 키에 단단한 체구, 부수수한 머리칼에 사슴가죽 머리띠를 두르고, 두 뺨에는 노란 줄무늬를 그린 이 친구는 인디언이었다. 두리번거리는 두 눈빛은 마치 상대방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가 아파치임을 깨달았다. 성당 안에는 멕시코군의 펠리페 대장이 있었다. 축제일에 이미 한잔 걸친 그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대장은 독 안에 든 쥐를 코미디로 위협하고자 했다.
그는 만세를 외쳤다.
“성 제로니모 만세! 성 제로니모 만세!” 대장이 외치니 사람들도 따라 외쳤다. “성 제로니모 만세! 성 제로니모 만세!”
그때 인디언 전사는 활에 화살을 쟁여서 도미니크 신부를 쏘았다. 웃으면서 쓰러지는 도미니크 신부를 바라보며 그는 사막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그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제로니모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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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군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아파치와 멕시코군의 전면전은 필연적이었다. 멕시코군은 기병 2개 중대와 보병 2개 중대의 막강한 병력이었다. 제로니모는 몇 명의 전사들을 보내 적진의 후방을 교란하도록 한 뒤 돌격을 개시했다. 제로니모의 칼날 앞에서 수많은 적이 낙엽처럼 쓰러졌지만, 아파치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전투는 두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제로니모가 마지막 적을 칼로 찌르고 보니, 멕시코군은 전멸이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사이에서 제로니모는 아파치 부족 전체의 전시추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영웅이자 악마인 제로니모의 활약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전시추장이 된 제로니모는 이후 30년 동안 백인들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인디언 지도자가 되었다. 아파치 인디언들에게 제로니모는 ‘전쟁주술사’와 같았다. 평시에 추장이나 주술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전쟁주술사는 위기에 처한 부족을 구해주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였다. 카스키예에서 대대적인 복수를 감행했지만 제로니모의 분노는 사그라 들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어떤 복수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로니모는 계속해서 결사대를 조직해 멕시코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전을 벌였기 때문에 멕시코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고, 애리조나에서는 미군도 인디언 소탕작전을 벌였다.
제로니모는 매우 감각적인 전사였다. 그는 오감을 이용할 줄 알았으며, 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1884년 제로니모는 멕시코군과 마지막 큰 전투를 벌인다. 위에서는 미군이 인디언을 소탕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을 때 제로니모는 멕시코로 남하한다. 그는 야영지를 자주 바꾸면서 자신의 위치를 들키지 않았다. 잠을 잘 때는 반드시 정찰병을 세웠다. 어느 날 동틀 무렵 정찰병이 뛰어와 멕시코군이 접근해오고 있다고 알렸다. 5분도 채 안 되어 총알이 날아왔고, 제로니모는 즉각적으로 전사들을 비롯한 인디언들을 냇가 옆 도랑으로 들어가게 했다. 전사들에게는 꼭꼭 숨어서 총알을 허비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던 오후 세 시 무렵, 제로니모는 적군이 회의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마침 바람이 회의 장소에서 제로니모 쪽으로 불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인디언 일당을 뿌리 뽑아야 한다. 진격하라.” ‘진격하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제로니모는 장군을 쏘았다. 제로니모를 향해 수많은 총알이 쏟아졌지만 제로니모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제로니모의 전사 십여 명이 멕시코군 후방으로 잠입하여 일망타진했으며, 이후 미군과의 싸움은 한층 치열했다. 1874년 미국 정부는 4천여 명의 아파치족을 애리조나 중동부에 있는 불모지인 산칼로스의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사냥해서 먹고 사는 유목민인 아파치족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제로니모는 설득의 대가였다. 그는 항상 부족민들 스스로가 나서서 싸우도록 독려했다. 어떤 강요도 없이 그는 상대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산칼로스의 보호구역에서 제로니모는 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아파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아파치들이 결국 목숨을 내걸고 제로니모를 따랐다. 뒤쫓아오는 미군을 따돌리는 제로니모의 지략에 미군은 번번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족민들은 계속해서 죽어갔고 전사의 수는 날로 줄었다 . 불사조 같았던 제로니모에게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5천 명의 토벌대에 맞선 아파치족은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 36명에 불과했다. 1886년 9월 3일 제로니모와 만난 토벌대의 사령관 넬슨 마일스는 제로니모에게 플로리다에서 잠시 생활한 뒤 반드시 애리조나로 되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이튿날 공식적으로 항복한 제로니모는 이후 다시는 전사의 길을 갈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애리조나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미국 정부는 수락하지 않았다. 반면에 제로니모와 아파치는 요새 밖에서 점점 유명해지고 있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야성의 시대가 흥미로운 추억거리가 된 것이다. 1898년 제로니모는 트랜스미시시피와 오마하의 국제박람회에 구경거리로 전시되었다. 그는 여행 도중 기차 안에서 외투 단추를 떼어내 사람들에게 팔았다. 자신의 물건이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안 제로니모는 신이 났다.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그것으로 영웅 제로니모도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1909년 2월 17일 제로니모는 상처투성이인 육신을 벗어 던졌다. 그러나 제로니모 신화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제로니모!”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낙하병들은 적지 상공의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이렇게 외쳤다. 제로니모는 곧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수영장의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까지도 “제로니모~!”라고 외치면서 뛰어내렸다. 헬리콥터 이름에는 ‘아파치’가 붙었으며, 컴퓨터 소프트웨어 게임에도 ‘아파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로니모와 아파치족을 소재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부영화에 제로니모와 아파치는 끊임없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제로니모의 리더십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공전략으로 삼으려는 시도도 보인다. 제로니모의 지혜와 용기와 희생이 그럴싸한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로니모 신화 속에는 가슴 아픈 비극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제로니모의 죽음에 대해 영웅답지 않은 죽음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죽음에는 역사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참으로 아픈 침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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