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895년 10월 8일 오전
일본 '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진
일왕 직속의 군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에 의해 저질러진
국가 범죄임을 밝힌 재일교포 역사학자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 출간된다.
일본 여류사학자
김문자(金文子·60) 씨가 일본 군부 자료를 분석해 쓴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태학사)이 10일경 국내에 소개된다.
일본에서 2009년 2월 출간된 책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가 입수해 국내 출간하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은
일왕의 지휘를 받는 대본영의 육군 수뇌부인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 육군대신 등이었고
이들의 계획에 따라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조선공사로 부임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김 씨는
명성황후에게
처음 칼을 휘둘러 치명상을 입힌 인물로
일본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를 지목했다.
김 씨는
미우라가 공사로 서울에 부임한 이후
일본공사관과 도쿄 외무성 및 대본영과 주고받은
통신기록과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외교문서 등을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김 씨는
일본 나라여대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1979년부터 같은 대학 사학과에서 연구하고 있는 재일교포 2세다.
지금까지 명성황후 시해는
당시 공사였던 미우라 주도로
일본 낭인과 장사치들이 저질렀다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 씨의 연구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에는 처음부터 대본영이 깊숙이 개입했다.
대본영은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압력을 넣어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를 사건 한 달 전에 조선 공사에 취임시켰다.
이후
미우라는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지휘권을 직접 요청할 정도로 대본영과 긴밀하게 교신하며 움직였다.
결국 미우라는 조선공사로 부임한 지 한 달,
군 지휘권을 획득한 지 사흘 만에 명성황후 시해를 감행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군부가 이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인 직접 이유는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한 장거리 통신시설로 전쟁 수행에 핵심적이었던
전신선(電信線)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고 김 씨는 분석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서로전신(의주∼서울), 남로전신(서울∼부산), 북로전신(서울∼원산)이 있었고
이를 통해서만
조선과 대륙 침략을 노리는 일본군에게 실시간으로 전문(電文)을 전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개전 이틀 전인
1894년 7월 23일 새벽에도
일본은 경복궁에 난입해 전신시설의 총괄권을 가진 고종을 감금하고
경복궁 바로 앞의 조선전보총국을 장악했다.
일본군이 7개월여 만에 청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전신시설의 장악 덕분이었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전개될 무력 충돌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신선 확보가 결정적이었는데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전신선 확보와 일본군의 주둔을 극구 막았던 것이다.
김 씨는
일본 군부가 시해의 주체를 감추기 위해
시해를 10월 8일 오전 4시에 끝내기로 했지만
입궐을 강요받은 흥선대원군이 1시간 이상 망설인 데다
서대문에서 합류하기로 한
일본 수비대가 길을 잃어 오전 6시 무렵에야 만행을 저지르게 돼
일본인들이 시해의 주체라는 사실을 감추는 데는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대원군이 미우라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종래 이에 대한 증거로 제시됐던 것들은 날조됐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태진 교수는
"김 씨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조선 왕비 시해는 (일본의) 명백한 국가 범죄다.
근대 한일관계사의 틀을 바꿔 놓을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연구"라고 추천사에서 평가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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