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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당나귀

강개토 2008. 2. 19. 22:01

무관심 속에 사라진 멸종 동물 ―한국 당나귀

육 칠 년 전, 휴가차 중국 용정에 다녀왔었다.

속초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자르비노 항으로 가서 거기서 다시 중국 훈춘으로 들어가

버스를 타고 연길을 거쳐 용정으로 가는 길고도 힘든 길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용정까지 하루 반이 꼬박 걸리는 힘든 길이었지만 그런대로

낭만이 있었다.


여관을 잡고 원래 잘 알던 용정 시청의 간부에게  전화를 했더니 반갑게 달려

나와서 나를 시청 앞의 큰 식당으로 안내 했다.

나는 이 식당에서 처음 맛보는 진미를 만났다. 

소고기보다 색깔이 더 붉은 고기인데 연하기가 마치 두부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맛 또한 소고기 보다 더 좋았다.


몇 점 먹어 보며 관심을 가지는 나를 보자 초대한 분은 기대치 않은 말을 했다.

“ 맛있지요? 한국에서도 당나귀 고기를 많이 먹습니까?”

나는 질겁을 하고 물었다.

“ 예? 이것이 당나귀 고기라고요?"

“ 맞아요.  하늘에는 용 고기, 땅에는 당나귀 고기라고 하는 중국 속담이 있잖아요.”


보통 한국인에게는 말 종류의 고기는 미국인에게 개고기만큼이나 멀리 느껴지는 식품이다.

지금이야 일본 풍속의 영향인지 뭔지 몰라도 제주도에서부터 말고기 사시미를 먹는 풍습이 퍼지고 있지만 그 때 그곳 식당에서의 나에게는 당나귀 고기 먹기는 무척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감칠 맛 나는 고기 맛은 젓가락을 거두어 치울만큼 일어나는

거부감을 잠재워 버렸다.


그리고 고기맛과 함께 가슴 속에 일어나는 한 가지 느낌, 한국 당나귀에 관한

의식의 발동이 있었다.

정말 어린 시절 이후 몇 십 년 만에 당나귀라는 존재가 나에게 의식 세계 속에

투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다음날 거리 관광에 나섰다.

외국이라지만 연변지역은 우리 동포들이 많아서 그렇게 낯선 감정은 없었다.

두만강도 가보고 일송정도 보았는데 이런 볼만한 관광거리와 함께 거리 도처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수레를 끄는 당나귀였다.



동물에 관심이 많다는 나도 당나귀는 중국에서 처음 보았다.


당나귀는 생각보다 아주 작았다.

나는 적어도 제주 말 크기는 되지 않겠나 했었는데 그 보다도 훨씬 작았다.

리어카보다 조금 더 큰 수레를 끌고 다니기도 하고 등에 나뭇짐을 가득 얹고

산길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전체적인 인상을 이야기 해보라면 대단히 귀엽다는 말로 표현 할 수 있을듯하다.

자기 몸보다 더 커다란 짐을 실은 수레를 싫은 표정도 없이 종종 걸음으로 끄는 모습을

보면서 왜 당나귀가 이솝 우화의 여러 곳에 주인공으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인간에 대한 친화적 특징, 다시 말하면 귀여운 모습이 당나귀의
브랜드 이미지였던 것이다.


머나먼 외국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에도 신라 경문왕 귀가 당나귀 귀라는 우화로서
역사에 처음 얼굴을 내민다.

정작 당나귀는 조선시대에 와서 우리와 더욱 친숙한 동물이 된다.


조선 시대 당나귀는 인간을 위하여 두 가지의 소임을 했었다.


하나는 화물 운반이다.

지금의 화물차나 용달차의 역할을 했었다.

TV 연속 사극을 보면 보부상이라는 조선의 오래된 상조직(商組織) 상인들이 항상 지게를 지고 장삿길을다닌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대개는 당나귀 같은 동물을 운반용으로
썼었다.


우리 민족 정서에 영원히 남을 문학 작품 중의 하나인 이효석 작가님의 “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면 떠돌이 장사꾼 허생원이 ‘동이’라는 소년과  메밀꽃이 소금처럼

뿌려진 밤길을 가는 유명한 장면에 동행하는 당나귀가 등장한다.


나의 기억 속에 깊숙이 남아 있는 특별한 조선 당나귀의 인상이 있다. 

선조 때 자유분방하게 살던 시인 권필의 친구가 생각난다.


궁핍하게 살던 그 친구는 삶의 끔찍한 고통을 못 버티고 허울 좋은 양반 계급을

버리기로 했다.

양반은 절대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만든 당시의 웃기는 법률 때문에

스스로 자해하듯 양반을 반납하고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상민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노비를 팔아서 장사 밑천을 삼아 당나귀와 상품을 마련해서 장삿길을 떠난다.

가족의 생계를 챙기느라 상민이 되어 장사를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면서 시인 권필은 
비감한 심정을 표현한 시를 남겼다.  
당시 직장을 잃고 잠시 어려운 형편이었던 나는 이 시가 가슴이 시리게 느껴지던
기억이 난다.  


당나귀의 다른 소임은 사람들을 모시는 것이다.

즉 승용으로서의 임무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와 제일 친숙한 당나귀의 모습은 선비나 아녀자들을 태운

민화나 한국화의 모습이다.

말은 가끔 화가 나면 예측 불허의 모습을 보인다.

갑자기 날뛰어 사람을 안장에서 떨어뜨리거나 뒷발질로 사람을 다치게 한다.

당나귀는 이런 말에 비하면 무척 순하기 때문에 여자나 노인이라도 승용으로

사용하기가 좋다.


내가 중국에서 본 아장아장하게 걷는 작은 당나귀 위에 사람이 올라 탈 수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현재 중국에서도 당나귀를 승용으로 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옛날 선비들이나 여성들이 당나귀를 타고 앞에 집의 어린 종이 고삐를 잡고 걸어가는 장면은 한국화에서 잘 다루는 주요 모티브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당나귀는 양반들에게 운전 기사를 둔 자가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나귀가 말이 승마나 폴로 등의 스포츠에 사용 되는 것처럼 당나귀도
스포츠에
사용된 희귀한 사례도 있다.

옛날 골샌님인 양반들 중에도 들에 나가서 스포츠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체통을 중시하는 그들에게는 때로 힘들게 뛰어야 하는 매 사냥 같은 스포츠도
점잖지 못한 스포츠였다.


그래서 그들은 매대신 작은 새매를 길들여서 이것을 이용하여 점잖은 사냥을 다녔다.

점잖게 당나귀를 타고 종은 고삐를 끌고 개를 앞세운 양반은 논두렁길을

아장아장 다니며 멀리 못 가는 메추리를 튀겨 내서 새매를 날려 잡게 하였다.

양반답게 힘들지도 않고 점잖은 사냥을 즐겼던 것이다.


당나귀는 일제시대가 되고 근대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점점 우리의 곁에서

사라져 갔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 평생 살아 오면서 한국 당나귀를 본 것 같지는 않다.

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는 멸종되었다고 하는 진짜 청 삽살개까지도 보았지만

한국의 당나귀를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와 주변의 여러 어른들에게 한국 전쟁 후에 당나귀를 보았는지
물어봤는데
오직 한 분 만이 지금 서울 서부역 건너편에서 한 마부가 팔려고 말과 함께 끌고 다니는 당나귀를 보았다고 했다.
이 곳 염천교를 지나서 서부역 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은 옛날의 용달차격인 마차들이 집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 당나귀의 운명은 정말 무정한 한국인들의 망각과 필요성 소멸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수레바퀴에 의해서 그대로 뭉개진 것이다.


토종닭이나 진돗개 같은 우리의 전통 개도 열심히 외쳐서 찾고 그리고 제주말도

다 보존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과거 삶에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당나귀를 찾아 보자는 움직임은커녕 이의 멸종을 지적하는 글이나 소리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우리 주변에서  한민족에게 외면당하고 망각된 당나귀의 존재가 소리 없이 그리고 흔적 없이 소멸되어 버린 것을 새삼 안 느낄 수가 없었다.


인간 연애사를 노래한 어떤 시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은

잊혀진 여자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신라 경문왕이래 한민족과 삶을 같이해온 한국 당나귀에게도
사람처럼 느끼는 심정이 있다면
철저히 잊혀진 자기 신세를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뿌리며 서러워 할 것 같다.


요새 유원지에 가보면 어디서 수입했는지 당나귀들을 볼 수가 있다.

이미 당나귀 실체가 흔적 없이 사라졌으니 출신이 한국이냐 중국이냐를 따지지 말고

이렇게 해서라도 들어온 당나귀들의 숫자가 늘어나 한국의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는 모습이라도 자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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