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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사만화 탄압사 >

강개토 2008. 2. 16. 23:47
 
 
김진수 인터넷만화신문 ‘코카뉴스’(www.cocanews.com) 이사가 5월16일 열린 토론회 ‘시사만화·대학언론 탄압사 재조명’중에서 ... 
 
우리나라 일간신문에서 국내 작가가 만든 4칸짜리 연재만화가 등장한 것은 1955년 이후의 일이다. 실제로 1954년 7월 13일 『한국일보』가 미국 가정만화 ‘블론디’ 연재를 시작한 이후 국내 만화가들 사이에서 ‘우리도 우리 만화를 신문에 연재해 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칙영의 블론디는 1949년 9월부터 5개월간 『서울신문』에서 ‘뿔론디’란 이름으로 잠시 전재된 바 있다)
 
▲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자>   ©코카뉴스
그 결과 김성환의 ‘고바우영감’(동아일보), 김경언의 ‘두꺼비’(경향신문), 김기율의 ‘도토리’(서울신문), 신동헌의 ‘주태백’(연합신문) 등이 4칸 연재만화로 등장했다. 주로 신문 사회면에 배치된 4칸 연재만화들은 처음에는 정치성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사성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문만화들이 ‘시사성’을 갖추면서 자연스럽게 서민층의 대변자로 부각됐다. ‘고바우영감’이나 ‘두꺼비’ 같은 연재만화 주인공들은 무소불위 독재 권력을 비꼬고,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저항의 몸짓을 보여줌으로써 일반 서민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연재만화의 주인공들이 독재에 시달리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시사만화’에 대한 독자들의 애정과 관심도 증폭됐다. 이처럼 한국의 시사만화는 1956, 57년을 거치면서 독자들이 신문을 펼 때 가장 먼저 찾는 콘텐츠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4칸 ‘신문만화’는 ‘시사만화’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재’라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경험이 한국의 신문만화에 정치풍자란 성격을 가미시켜 ‘시사성’을 뚜렷하게 만들어냈던 것이다.

'고바우영감'도 초기에는 말풍선이 없는 코믹 만화였으나, 자유당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점차 정권과 권력을 비판하는 정치풍자만화로 성격을 바꿔나갔다.

자유당 시절 시사만화 탄압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고바우영감' 1958년 1월 23일자였다.

현재의 청와대 격인 경무대에 근무하는 사람은 심지어 ‘똥을 치는’ 사람도 ‘권력’이 있다는 내용을 다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만화의 내용 때문에 시사만화 작가가 유죄판결을 받은 첫 사례였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시사만화가들의 비판은 일간신문뿐 아니라 각종 잡지를 통해서도 활발히 이뤄졌다.

▲만화행진에 실린 김용환 작가 만평, 날짜 미상.     © 코카뉴스

날짜 미상의 이 만평은 만화잡지 <만화행진>에 실린 김용환 작가의 만평이다. 이 만평은 정권을 잡은 정당이 주요 공직을 독차지하는 이른바 ‘엽관제’로 인해 인사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꼬집고 있다. 만평에서 이 전 대통령은 자식을 많이 둔 늙은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다.
 
▲1960년 5월 조선일보 만평‘한국의 죠오지·와싱톤’     © 코카뉴스
1960년 5월 조선일보에 실린 ‘한국의 죠오지·와싱톤’이라는 제목의 만평은 손에 든 도끼로 민주주의란 나무를 꺾어버린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게 면목 없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용이다.
 
뒷짐 진 조지 워싱턴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으나 언짢은 표정이 역력하다. 이 대통령을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부른 이유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조지 워싱턴이기 때문.

한편, 1960년 4.19 혁명의 봄은 강렬했지만 무척 짧았다. 이승만 12년간의 독재는 41일간의 시위로 무너졌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은 가족들과 함께 자살했고, 노욕을 부리던 지도자는 미국으로 달아났다.

1960년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장면 정부의 무능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혁명은 지쳐가고, 민중들의 고난은 깊어가고 있었다. 1961년 봄이 되면서 세상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총’과 ‘칼’의 냄새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5월이 되면서 역사의 바람은 반역의 냄새를 더욱 짙게 흩날리고 있었지만, 당시 장면 정부는 그러한 움직임을 저지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