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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홍국영(洪國榮) 1748∼1781(영조 24∼정조 5))

강개토 2008. 4. 6. 11:45

 - 권력무상, 홍국영의 비극적인 최후

홍국영,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아마 한 인물에 대해 이처럼 분명하게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정조즉위에 기여한 공을 높이 평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또 어떤 사람은 정조즉위 이후 지나치게 권력을 남용한 것을 중요하게 여겨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에게는 남다른 야망이 있었고, 그 야망은 끝내 자신을 파괴하는 부메랑이 되어서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면 홍국영은 그저 권력에 영합한 난세의 세도가 였는가? 아니면 시대의 혼란속에 나름대로 흔적을 남긴 선비였는가?

홍국영은1748년 영조 24년에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풍산 홍씨로 정조의 외조부인 우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이조판서 홍인한(洪麟漢)은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친척들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조선시대 다른선비들과 마찬가지로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시작이었지만,  1762년 11세의 나이로 아버지였던 사도세자를 여위고 이제는 성인이 된 세손 이산이, 사도세자 사건의 주측인 노론 벽파로부터  끊없이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때로는 정면으로 돌파해 나가고, 때로는 권모술수를 부리기도하며 시대의 격동 그 한가운데 서게 된다.

 앞서 말하였듯, 홍국영은 사사롭게는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아 친인척 관계이긴 하였다. 하지만 당시 실세였던 홍봉한, 홍인한등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던 탓으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설서(說書)라는 작은 말단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사서에 승진했고,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또한 1776년 홍상간(洪相簡)·홍인한·윤양로(尹養老) 등이 세손을 모해하려는 모역을 적발해 처형시켰다. 그 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하였다. 그 뒤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숙위대장을 겸직하는 등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이것은 홍국영이 문관직과 무관직의 양대실권을 모두 장악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실권을 잡은 그는
삼사(三司)의 소계
(疏啓 : 상소문과 계문),
팔로(八路)의 장첩(狀牒 :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나 공문서),
묘염(廟剡 : 관아의 관원을 의정부에서 천거해 뽑음),
전랑(銓郎)의 임명 등을 모두 알거나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모든 관료들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정조의 신임마저 두터워 조정 백관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할 수 있어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시대 최악의 정치폐단이라 할 수 있는 세도정치가 이로써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의 권력의 절정은 1778년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 원빈(元嬪)으로 삼았을 때 였다. 여전히 정조는 후사를 보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라, 누이동생이 왕자만 출산하게 된다면 그의 권력독점은 완벽해 질수 있었다. 그 뒤 1780년(정조 4) 도승지 겸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요직을 두르걸치며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좌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비극이 다가왔다. 그의 누의 동생 원빈이 입궁한지 얼마되지 않아 후사 없이 죽게 되었다. 그의 권력이 최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시점에 일어난 어의없는 불행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 인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들여 왕실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다가 이것마저 실패하였다.
 
 결국 홍국영은 최후의 선택, 그러나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는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동생이었던   원빈을 독살하였다고 판단, 왕비의 음식에 독약을 넣는 극단적인 방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대신들은 당연히 홍국영을 극형으로 다스릴 것을 주청 들였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가고, 자신조차 위험에 빠뜨렸던 정순왕후를 용서한 성군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홍국영을 차마 사형시킬 수 없었다.  결국 정조는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그를 횡성현(橫城縣) 전리(田里)로 좌천시켰다가 다시 강릉부(江陵府)로 방축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인 파면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말단관직은 유지시켜 주었다.
 그러나 세도가 없는 그는 날개를 잃은 새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1781년 만 33세의 젊은 나이로 지병을 얻어 강릉부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그를 세도정치의 효시로 본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긴장관계 속에서도 개혁을 늦추지 않고 규장각을 확대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등 특유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를 오직 권력에만 집착하는 세도정치가로 볼수만도 없다. 그는 정조를 임금이 자리에 올린 1등공신이나 다름없었으며, 또한 자신의 시대를 열려고 했던 야심가이기도 했다.  그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는 각 개인마다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홍국영의 사망소식을 접한 정조는 한편으로는 안타까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것을 자신의 부덕함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 말하였다.

 “이 사람이 이런 죄에 빠진 것은 참으로 사려(思慮)가 올바른 데 이르지 못한 탓이다. 그가 공을 세운 것이 어떠하였으며, 내가 의지한 것이 어떠하였었는가?
처음에 나라와 휴척(休戚안락과 근심)을 함께한다는 것으로 지위가 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았기에 권병(權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을 임시로 맡겼던 것인데,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다는 것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총애만을 믿고 위복(威福 벌과 복을 줄수 있는 임금의 권력)을 멋대로 사용하여 끝내는 극죄(極罪)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


홍국영의 무덤이 있었다는 곳으로 전해지는 강릉기 수리골 일대
뒷편으로 종합경기장 조명탑이 보인다.


 강릉시 수리골에는 홍국영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 일대가 종합경기장으로 개발된지 오래여서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마지막 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가옥역시 정확한 고증이 뒷받침되질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때로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홍국영에게서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야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