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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희, 막 내린 드라마 ‘엄뿔’로 다시 각광

강개토 2008. 9. 30. 12:53

 



[중앙일보 기선민]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면, 드라마는 끝나면서 배역을 남긴다.

자체 최고 시청률 40.4%(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기록하며 28일 종영한

KBS-2TV '엄마가 뿔났다'(이하 '엄뿔')가 남긴 최고의 캐릭터가 부잣집 사모님 고은아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까.

'엄뿔'이 시작된 올 2월 이래 고은아는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걸핏하면 올랐고,

시청자들로부터 “고은아 보는 재미에 '엄뿔' 본다”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속물인 듯하면서도 타고난 귀족스러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얄밉고 재수 없는 것 같다가도 어딘지 귀여운 구석에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인물. 그것이 고은아였다.


고은아가 고은아일 수 있었던 것은 장미희(51)라는 배우를 빼놓고는 설명이 힘들다.

'고은아 패션''고은아 커트'부터 '고은아 굴욕'에 이르기까지 지난 8개월간 고은아는 장미희였고 장미희는 고은아였다.

1980년대 정윤희·유지인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손꼽혔으면서도 대중과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던 그는 이번 역할로 시청자에게 성큼 다가섰다.

'엄뿔' 종영일인 2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엄뿔'에 관련된 질문만 한다”는 조건을 내건 인터뷰는 약 3시간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시쳇말로 고은아 역으로 대박이 났다.

'엄뿔' 방영 이후 대한민국 매체라면 한번쯤 장미희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인터뷰가 쇄도한 건 사실이다.

학교(명지전문대 연극영상과) 조교를 비롯한 지인들을 통해 숱한 경로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인터뷰를 할 여유도, 인기를 실감할 겨를도 없었다.

일주일에 본녹화 하루, 야외녹화 이틀을 빼놓으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나흘이었다.

나흘 동안 캐릭터 분석은 물론 외적인 표현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만도 빠듯했다.

어떤 작품이건 일단 시작하면 나는 완전히 고립된 생활을 한다.

학교에 이틀 나가 강의하는 일만 빼고 공사를 막론한 그 어떤 일정도 잡지 못했다.

매주 일요일 어머니와 브런치를 하는데, '엄뿔' 하는 동안은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촬영장에서도 고은아로 살기 위해 나 스스로를 고립시킬 때가 있었다.

그래서 며느리 영미 역을 맡은 이유리씨와는 가급적 대화를 피했다.

반면 남편 역인 김용건씨와는 신경을 써서 가깝게 지냈다. 식사도 같이 하고 다정하게 대화도 많이 나눴다.”


-이유리씨는 한참 후배인데, 감정적으로 힘들어했을 수 있겠다.

“은아와 영미의 관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다. 권력관계다.

영미가 은아에게 '저를 보는 어머니 시선이 따뜻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사적으로 가까워지면 행여 은아가 영미를 보는 눈길이 따뜻해질까 걱정됐다.

배우는 일상조차도 무대에 섰을 때를 대비해 감정적·정서적으로 훈련이 돼 있어야 한다.”


-그만큼 고은아에 몰입했다는 얘기겠다.

“남편한테 침대에서 거절당하는 장면을 찍고 나서는 정말 화가 났다.

분이 안 풀려서 촬영 끝나고 출연진과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하는데 그냥 와버렸다.

오는 차 안에서 비로소 정신이 들어 '어머, 내가 너무 어린애처럼 굴었나' 후회했다(웃음).

은아를 가족들이 놀리는 장면을 찍을 때는 '내가 말을 하는데 왜 자꾸 날 놀리지'싶어 짜증 나고 언짢았다.”


-고은아 같은 캐릭터는 앞으로 우리 드라마에서 몇 년 내에 다시 나오기 힘들 것 같다.

그만큼 독특하고 복합적이다.


“고은아는 스펙트럼이 정말, 정말 다양한 캐릭터여서 연기하기가 무지무지하게 힘들었다.

캐릭터 분석이 마치 숨은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리광과 애교를 부릴 때는 페르시아 고양이 같다가

자신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침범당했다고 느꼈을 때는 암사자처럼 돌변한다.

한 장면에서 그 감정 변화가 예닐곱 단계로 나뉠 때도 있다.

자애롭다가도 냉혹한 얼굴을 보여주는 그 예측 불가능함은 마치 여신과 같다고나 할까.”


-은아는 전통적인 악역과는 다르다. 미워할 수 없는 여자다.

“'이거 나 줘'라고 떼쓰는 아이에겐 악의가 없다.

귀엽다.

그래서 그냥 주게 된다.

은아도 그렇다.

솔직담백하고 단순하다.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콤플렉스가 전혀, 전혀 없는 희한한 캐릭터다.

며느리 얘기를 다 듣고 나서 '그래? 대화 유익했다'라고 깔끔하게 말할 수 있는 여자다.”


-고은아 안에 배우 장미희가 있다고 할까, 겹치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대중이 장미희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는 여성성이 강조된, 매력적이고 화려하고 섹시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내 안에 한자(김혜자) 같은 면도 있고 은아 같은 면도 있지만 은아 같은 역을 연기했을 때 임팩트가 더 강하다.

'육남매'의 장미희보다 '겨울여자''깊고 푸른 밤''적도의 꽃'의 장미희가 더 반응이 좋았다.”


“화려한 고은아 패션 위해 7억짜리 목걸이도 해봤죠”

-'미세스 문∼'을 비롯해 회자되는 대사가 많았다. 연기하면서 스스로도 웃었던 대사가 있었는지.

“딱 하나 있었다.

아들 정현(기태영)이 결혼 허락 안 해준다고 식음을 전폐하는 대목에서

은아가 '여보, 쟤 좀 돈 거 아니에요?' 하는 장면이다.

대본 연습할 적에 나를 포함해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정을영 감독님이 '이 대사는 미희씨만이 할 수 있어요'라고 해서 부담도 됐다.

'미세스 문'이 인기를 끈 건 나보다도 김수현 선생님이 대단해서다.

대본에 그냥 '미세스 문'이라고만 적힐 때가 있고, '미세스 무은'이라고 적힐 때가 있다.

그 각기 다른 뉘앙스를 선생님은 다 구분해줬다.

선생님은 내가 이 대사를 하면 사람들한테 회자될 거라고 예측한 것 같다.

나는 적힌 대로만 했다.”


김수현 작가는 지난달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고은아는 원래 재미없는 캐릭터인데 장미희씨가 잘해서 밉지 않고 귀여운 인물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장미희에게 이 얘기를 전하자 크게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다 김 선생님 덕분”이라고 펄쩍 뛰었다.

데뷔 32년이 됐지만, 김 작가와 작품을 함께한 건 '엄뿔'이 처음.

“배역이 마음에 든다는 전제하에서 다시 김수현 드라마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그럼요, 그럼요”라고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연기자라면 누구나 하고 싶어하면서도, 하는 동안은 많이 힘들어한다고 한다.

“김 선생님은 천재다.

어떨 땐 선생님 영혼이 우리 집 근처를 다녀가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가 느끼는 심리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신다. 내가 된장찌개는 잘 먹어도 김치찌개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찌 알았는지 은아가 김치찌개를 못 먹는 걸로 설정했더라.

선생님 작품은 그 안에 이미 인물이 다 구축돼 있기 때문에 신인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반면 나 같은 중견 연기자들은 이미 구축돼 있는 인물에 플러스 알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대단한 도전이다.

대사 한마디가 엄청난 다양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광산이 될 수 있다.

거기서 발견하는 게 다이아몬드냐, 루비냐, 아니면 주석이나 돌이냐는 연기자 몫이다.”


-주부의 권리 찾기, 노년의 알콩달콩한 사랑 등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대목도 이 드라마의 미덕이었다.

“다양한 가족, 다양한 개인,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이처럼 한 드라마 안에 골고루 뿌리내리게 하는 작가가 김수현말고 또 있을까. 대단한 혜안의 작가다.”

장미희의 고은아는 패션과 스타일로도 방영 내내 여성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날씬하고 탄력 있는 그의 몸이 소화하는 고급 의상과 장신구는 대를 이은 부잣집 딸의 우아한 매력을 한껏 과시했다.

이날도 그는 평소 즐겨 입는 벨기에 디자이너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슈트와 구두를 착용했다.

대담한 디자인의 목걸이와 팔찌도 고은아다웠다.


-고은아 패션에서 염두에 뒀던 점은.

“정 감독님이 '볼거리를 많이 제공해달라'고 주문하셨다.

그래서 원 없이 은아의 화려한 면모를 표현할 수 있었다.

밥먹는 장면에서 귀걸이에 팔찌까지 하고 나오는 게 현실성이 있느냐 논란도 있었지만,

고은아 패션을 통해 '대한민국 5%'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자 마음 먹었다.

극중 영미의 '전 어머니 발꿈치도 못 따라가요'라는 대사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스타일리스트 4명이 함께했는데, 내 원칙은 이랬다.

의상은 광택 나는 옷감일 것,

움직일 때마다 옷에 실루엣의 여운이 느껴질 것,

귀걸이는 달랑거리며 시선을 뺏으면 안 된다,

가급적 목걸이 대신 반지·팔찌·귀걸이 세트를 한다 등등.

한 복장에 든 비용이 최소 2000만원에서 최고 10억원까지였다.

옷도 옷이지만 보석이 비쌌다.

유명 업체에서 협찬 의뢰가 많이 들어왔는데, 고은아 컨셉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돼 거절한 적도 있었다.

불가리 제품(목걸이 7억원, 반지 2억원)이 최고가였는데

보안업체 직원이 촬영장으로 제품을 들고와 직접 목에 걸어주고 벗겨갔다.

고은아는 졸부가 아니라 유서 깊은 부잣집 딸이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던 1970, 80년대 빈티지 의상도 간간이 섞었다.”


-중년 여배우가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것도 드문 일이다.

“배우의 몸은 연장이다. 항상 기름 치고 갈고 닦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엄뿔' 찍기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2~3회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집에서는 명상 요가와 스트레칭을 한다.

누군가는 내게 살을 확 찌워서 편안한 엄마 이미지로 가보라고 하는데,

내겐 살을 빼는 것보다 찌우는 게 더 힘든 일이다.

10대, 20대 관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기억하는 세대와 함께 간다는 생각이 항상 있다.”


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