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은 충무로 영입 1순위 만화 원작자다. 지난해 개봉해 흥행성공을 거둔 ‘타짜’에 ‘식객’이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30년 넘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사람’ 이야기로 감동을 주는 한국만화 대표 작가 허영만을 만났다.
트럭에 채소와 생선 등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성찬에게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맛’을 내는 재주가 있다. 최근 성찬은 일본의 초밥왕 쇼타와 만나 양국의 맛과 문화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의 만화 ‘식객’의 허영만(60)이 ‘미스터초밥왕’의 테라사와 다이스케(48)를 만났다. 지난달 3일 허영만은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서 테라사와 다이스케를 만나 한·일 양국의 음식문화와 음식만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본격적인 대담이 시작되기 전, 허영만은 예정시간보다 조금 일찍 현장에 도착해 2층에 마련된 테라사와 다이스케 작품 전시회를 주의 깊게 관람했다. 좀처럼 언론에서 얼굴을 볼 수 없던 그와 그곳에서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자가 “왜 그렇게 언론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라고 묻자 허영만은 싱긋 웃으며 ‘익숙지 않아 쑥스러워서’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주름은 깊지만 웃는 모습이 꼭 ‘식객’의 주인공 성찬을 연상시킨다.
만화 속에 인간미 녹여내는 작가 허영만이 ‘식객’을 발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음식을 소재로 한 만화는 전무했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음식만화를 기획하면서 허영만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
“오래전부터 음식만화에 대한 욕심은 있었지만 국내에 처음 시도되는 소재라 고민이 많았죠. ‘식객’을 시작하기 전에 일본 음식만화를 보면서 행여 일본 만화의 아류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더라구요. 지인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테마가 비슷하다고 해도 주된 소재인 음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며 용기를 주더군요.”
허영만의 고민과 달리 ‘식객’과 ‘미스터 초밥왕’은 한국과 일본의 음식만큼이나 전혀 다른 느낌이다. 그 차이는 비단 서로 다른 음식 때문만은 아니다. ‘화투’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고, 음식을 이야기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허영만의 만화 속 화두는 언제나 ‘사람’이다. 작품을 시작하기 전, 전문 도박사나 요리사 못지않은 자료와 지식을 준비한 작가는 절대 ‘척’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자신이 오랫동안 준비한 재료를 사람 속에 녹여낸다. 덕분에 ‘식객’에서는 일본의 음식만화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작가 특유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저는 가급적 만화 속에 사람의 모습을 담고 싶어요. ‘미스터 초밥왕’ 등에서 볼 수 있는 대결구도는 일본 청소년 만화의 한 틀이에요. 식객을 그리면서 되도록이면 대결구도는 피하고 사람을 통해 음식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물론 ‘식객’에서도 대결구도를 볼 수 있다. 작가는 이에 대해 “자료가 넘치거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대결구도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특유의 정이 묻어나는 음식만화를 탄생시킨 그에게 “식객을 언제까지 볼 수 있냐?”고 묻자 엉뚱하게도 “신문사에서 그만 그리라고 할 때까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식객’을 계기로 지금보다 더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나오기를 바랐다.
“아쉬운 얘기지만 우리나라 만화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 말쯤이에요. 아직도 일본 만화와 한국 만화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가깝게 지내는 만화가 후배 중에도 ‘바벨 2세’가 한국 만화라고 믿고 있을 정도죠. 사실 한국 만화와 일본 만화의 차이는 미미해요. 물론 지금도 자의든 타의든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이구요.
‘식객’에서 주인공의 대결구도가 펼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아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2편, 3편이 넘어가면서 그런 말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허영만식이란 꼬리표가 붙었어요. 앞으로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많이 시도됐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허영만은 식객의 신문연재가 끝날 때까지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또한 독자들의 의견도 문하생들이 “꼭 봐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보지 않는다.
“저는 컴맹이에요. 보고 싶어도 인터넷 게시판을 잘 볼 수 없어요. 그런데 일부러라도 안 보는 편이기도 해요. ‘작은 논쟁에 큰 흐름이 흔들린다’란 말이 있는데, 아무리 작은 말이라도 작품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보지 않아요.”
한일 대표 두 만화가가 말하는 한일 문화의 특징 허영만과 대담을 나눈 테라사와 다이스케는 지난 1986년 연재를 시작한 ‘미스터 맛짱’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음식만화의 달인이다. 그는 1996년 ‘미스터 초밥왕’(원제·쇼타의 스시)이 다시 선풍적이 인기를 끌며 5년 동안 연재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만화는 단행본만 44권이 발간됐고 일본에서 1000만부 이상, 한국에서는 250만부가 넘게 팔렸다. 일본 음식만화의 거장 테라사 다이스케는 허영만의 식객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는 과거 ‘미스터 맛짱’과 ‘미스터 초밥왕’ 사이에 네 권짜리 단행본도 발표하고 몇 번의 다른 도전을 시도했지만 완전히 망했습니다.(웃음) 제 작품은 주로 작은 기쁨이나 행복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식객’은 묵직한 작가의 주제의식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선이 굵고 인간적인 이야기 전개가 돋보이는 허영만 선생님의 작품을 본받고 싶지만 사실 저는 그런 표현을 잘 못합니다. 앞으로 다양한 시도를 통해 허영만 선생님처럼 장르의 폭을 넓히고 싶습니다.”
국경을 넘어 선배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미덕에 허영만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처음 식객을 구상할 때는 김치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김치만 가지고는 만화 전체를 꾸미기에 모자라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음식들을 추가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다양한 한국의 음식들을 다루게 됐죠. 한 가지 음식을 가지고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긴 이야기를 만드는 테라사와 다이스케씨의 재주가 놀라워요.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 방문이 두 번째인 테라사와 다이스케는 한국에 오기 전 ‘식객’을 읽고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한국과 일본의 차이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식객을 읽기 전까지 한국과 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젊음의 거리 신촌이나 강남 등에 갔을 때, 일본과 다르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 오기 전, 일본어로 번역된 ‘식객’을 읽으면서 우리는 같은 동양 사람이지만 먹는 문화 하나만 보더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허영만 역시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점은 일단 만화책을 넘기는 방향이 반대죠.(웃음) 저는 고향이 여수라 생선회를 좋아해요. 그런데 일본식 생선회는 한국의 생선회와 조금 다르더라구요. 우리는 씹는 맛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은 모양과 색을 중요하게 생각하더라구요. 그 외에도 일본 사람들은 우리네 밥 먹는 모습을 보고 ‘밥에 절을 한다’고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밥을 들고 먹는 것은 머슴이 빨리 일하러 가야할 때’라고 배웠거든요. 요즘은 그런 문화가 많이 없어져서 일본이나 중국처럼 밥을 들고 먹는 신세대들이 많은데 그런 작은 차이까지 만화 속에 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돼요.”
‘허영만표’ 만화가 가지는 세상의 ‘맛’ 허영만은 늘 카메라가 든 허름한 검은색 가방을 들고 다닌다. 그는 ‘식객’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약 3년간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그런 자료수집 작업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저에게는 문하생이 4명 있는데, 식객을 시작하기 전에 ‘무협만화는 칼을 정말 잘 그리고, 전쟁만화는 전쟁장면을 실감나게 그려야 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음식을 정말 먹음직스럽게 그리고 맛깔나게 그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음식의 탄생 배경까지 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해요. 통상 수집한 정보 중 1/3 정도만 사용할 만큼 늘 많은 정보를 수집해요.”
허영만은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자신과 닮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금물이라고 못박았다.
“작가는 작품 속에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이든 단연이든 모든 인물에 녹아 있어요. 저는 식객의 성찬처럼 낙천적이지도 꾸준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변덕스럽고 성격이 급한 편이죠. 그리고 저는 요리를 잘 못해요. 제 전공은 먹는 거죠.”
먹는 게 전공인 허영만은 음식 맛에 있어서 웬만한 미식가 못지않게 까다롭다. 외식을 하고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집에 돌아와 다시 밥을 먹는 일도 있다고.
“밖에서 밥을 먹다 보면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아마도 화학조미료 탓인 것 같아요. 저는 음식의 맛 뒤에는 정성이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그 정성도 종국에는 맛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하숙생활을 오래 했을 때 주인 할머니께서 무척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주셨지만 입맛에 맞지 않아 열흘 만에 그 집을 떠난 적도 있어요. 음식은 정성이지만 정성이 맛이 될 수는 없는 거죠.”
그렇다면 음식만화를 그리고 있는 허영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만화 ‘식객’에서 찾을 수 있다. ‘집 나간 며느리도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 식객의 주인공 성찬은 죽기 위해 한강대교 교각에 올라간 사람을 구운 전어 냄새로 내려오게 만든다.
“저는 전어를 좋아해요. 밥과 함께 무채를 넣고 초고추장에 비벼 먹으면 일품이죠. 요즘에는 서울 사람들도 전어를 좋아해서 값이 비싸졌지만 과거에는 5천원이면 삽으로 퍼줬을 정도로 값이 쌌어요. 얼마 전 여수에 사는 동생이 ‘요즘에는 서울 사람들까지 전어 맛을 알아버려서 맛을 못 보겠다’며 하소연을 하더군요.” 허영만은 아직까지 ‘식객’에서 회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담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일본식 회와 한국식 회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룰 생각이다. “저는 고추냉이와 함께 먹는 일본식 회보다는 무침을 좋아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일본식 회를 먹어본 기억이 없어요. 앞으로 ‘식객’에서 이 같은 일본식 회와 한국식 회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에요.”
충무로 영입 1순위 만화 원작자 대한민국 사람 중에 만화가 허영만이 풀어 놓은 이야기를 듣고,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깝게는 지난해 개봉해 흥행에 성공한 영화 ‘타짜’, 1990년 첫 방송 이후 42.8%라는 경이적인 시청률(1992년 11월 기준)을 기록하며 ‘사오정 시리즈’까지 탄생시킨 ‘미스터 손’, 그리고 이현세의 ‘까치’ 못지않게 만화가게 세대에게 익숙한 이름 ‘이강토’까지. 그의 작품은 세대를 걸쳐 읽혀 왔다.
요즘 충무로에서는 그런 허영만을 모시기에 바쁘다. 그가 지금까지 그린 스포츠, 기업,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는 웬만한 소설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과 흡인력을 갖고 있다. 현재 그의 작품 창고 속에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 예비흥행작들이 가득하다. 영화 ‘식객’은 곧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각시탈’(1974년)의 판권은 일찍부터 ‘비트’를 만들었던 김성수 감독에게 넘어갔다.
“만화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결과가 항상 조심스러워요. 예전에는 충무로에서 어깨너머로 영화를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는데, 요즘은 제대로 공부한 분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안심이 돼요. 그래도 원작을 넘겨줄 때는 영화사의 이력이나 제작자, 감독에 대해 조심스럽게 살펴요.” 흥행보증수표 허영만일지라도 항상 결과가 만족스러웠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만화를 영화화한 감독에게 따지려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예전에 시사회에서 여기저기에 허점이 드러나서 감독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던 작품이 있어요. 그날 시사회장에는 영화를 만든 스태프들이 스무 명 가까이 있었거든요. 감독이 그들의 우두머리인데 차마 그 앞에서 뭐라 말할 수가 있어야죠. 또 괜히 잘못 이야기했다가 스무 명에게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참았죠.(웃음) 애를 낳았을 때 아이의 품성이 떨어진다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처럼 비록 결과가 나쁘게 나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날 이후 허영만은 원작을 넘기고 난 뒤에는 일절 제작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30년 넘게 한국만화 대표 작가로 활동해온 허영만. 작품에서뿐 아니라 사석에서조차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에게서는 어린시절 향수가 느껴진다. 그의 만화 속에서 느껴지는 감동처럼 말이다.
■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이성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