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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하마을 사저에서 참여정부 시절 참모들과 토론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
ⓒ 노무현 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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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도에 간다고 했을 때 가장 갖고 가고 싶은 것 세 가지를 꼽는다면?
"책하고 컴퓨터하고... 두 개만 가지고 가지 뭐."
2002년 2월 5일 기자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노무현 상임고문과의 차량 동승 인터뷰 때 주고받은 일문일답 가운데 하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서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정작 자신에 대한 기록은 미완으로 남기고 떠나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학고재에서 펴낸 <성공과 좌절>은 노무현의 인생역정과 고뇌를 그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부제처럼 이 책은 '못다 쓴 회고록'이다. 그런 탓에 읽는 이들 스스로 미완성 텍스트 속에서 한 줄 한 줄 행간의 의미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다.
흔히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의 회고록은 화장품 냄새 풀풀 나는 성공담으로 치장돼있기 십상이다. 실패나 좌절의 기록은 성공담을 빛내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공과 좌절>에 기록된 노 전 대통령의 육필 회고록은 좌절과 실패의 기록에 가깝다. 때론 역설을 담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자기자신을 냉정하게 객체화해서 평가한 '결벽증'이 더욱 도드라진다.
"성공도 있었고 좌절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공과 영광의 기억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의 기억들이다."
"말년이 되면서 나는 정치적 좌절을 이야기했다. 정치를 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나의 목표는 분명히 좌절이었다."
"나의 실패를 진보의 좌절, 민주주의의 좌절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고는 역사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패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뼈아픈 고통이다. 그것도 회복이 가능하지 않은 실패인 경우에는 죽음과 다름이 없는 고통이다."
"부끄러운 시민으로 사죄하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아직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서 회고록은 한참 후에 쓰려고 했다"던 노 전 대통령은 마침내 피의자가 돼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이야기를 쓰는 일뿐"이라며 회고록의 목차와 구성의 초안만 잡고 운명을 달리했다. 이 회고록 초안의 최종 수정 시간은 2009년 5월 20일 오후 5시 5분. 이 세상과 결별하기 3일 전까지 자신에 대한 기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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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고재에서 펴낸 노무현 대통령의 못다 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 |
ⓒ 학고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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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스스로 꼽은 '노무현의 오류'는 독선과 아집으로 무리한 의제들을 끌고 간 일, 언론의 흔들기와 관료의 무력화, 이라크 파병과 대연정·FTA 등으로 인한 지지자들의 이반, 인기 없는 대통령의 인기 없는 정책 밀어붙이기 등이다.
무엇보다도 "보수의 나라에서 보수언론에 맞서서 국민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일을 억지로 밀어붙인 결과"로 인해 "절반의 성공도 못되는 절반의 미완성"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감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슈퍼 자본주의>의 저자 로버트 라이시의 노동전략, 토니 블레어의 <영국 개혁 이렇게 한다>, 기든슨의 책, 클린턴과 진보정책 연구소의 리포트 등을 통해 한국에서의 '제3의 길'을 고민하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대통령이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에 쓰여진 다음과 같은 문구는 그에게 조그마한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실패는 낙담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실패는 우리를 더욱 강하고, 유연하며, 현명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인류의 미래는 지속 가능할 것인가? 전쟁, 기아와 질병, 환경의 파괴, 자원의 고갈, 인간의 도덕적 역량은 스스로의 파멸을 막을 만큼 현명한 것일까?" 그가 대통령 취임 전부터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주제는 당면한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부터 민주주의의 위기와 글로벌 거버넌스까지 넓고 깊다. 그런 고민의 끝자락에는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운동'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직업, 생활비 확보 방법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 그래도 품위와 모양을 갖추어야 하는 사람, 노후 대책이 없는 사람, 친구도 고향도 다 잃어버린 사람, 거짓말 안 하고 살 수 없는 사람, 적이 많은 직업, 욕 먹는 직업, 상처가 많은 사람. 노무현의 눈에 비친 정치인과 정치인이라는 직업의 모습이다. 그 또한 이 카테고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점을 여러 차례 고백했다.
그가 퇴임한 뒤에 가장 애정을 쏟고 관심을 보였던 주제 가운데 하나가 '시민주권'이다. 그는 '시민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을 고민하면서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졌다. 제도와 정책이 중요하다, 정치·민주주의·역사를 알아야 한다, 학습하고 조직하고 행동해야 한다, 촛불은 무엇이고 6월항쟁·노사모와 무엇이 다른가, 동학농민항쟁과 프랑스 혁명은 무엇이 달랐을까, 진보의 시대는 왜 무너졌는가.
"시민운동은 땀과 용기가 필요하며 희생이 따르는 일"인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라고 그는 되묻는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가? 진보의 가치를 믿는가?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는가? 시민은 누구인가? 시민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의 미완성 회고록에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있다.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부터 많은 이들에게 함께 풀어보자며 던진 화두까지.
'성공한 역사는 있고, 성공한 대통령은 없다?'라는 주제 글 가운데 '역사의 가정?'이라는 게 눈에 띈다. "대원군이 다른 선택을 하였다면?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다면? 김구 선생이 단정에 참여했더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와 손을 잡았더라면?" 그렇다면 우리도 한 번 묻고 싶다. "만약 노무현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더라면?" 그나 우리나 정답을 알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노무현이 미처 매듭짓지 못한 회고록의 공백은 그의 몫이 아닌 우리의 몫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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