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준의영화창고

‘밀크’-도대체 숀 펜이란 배우는

강개토 2010. 3. 3. 19:29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작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들의 면면은 실로 쟁쟁했다.

브래드 피트(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할리우드 최고 스타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미키 루크(레슬러)는 수상자가 되면 그 자체로 너무나 영화적인 휴먼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프랭크 란젤라(프로스트VS닉슨)와 리처드 젠킨스(더 비지터)는 실로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숀 펜(밀크)이 있었다.

 

 ‘밀크’를 제외한 4편의 영화를 본 상황에서, 트로피의 주인으로 마음으론 미키 루크를 응원했고 이성적으로는 리처드 젠킨스를 떠올렸다.

숀 펜은 언제나 탁월한 배우지만, 메릴 스트립이나 숀 펜 같은 사람이 주연상 수상자가 되면 그건 너무 당연해서 반칙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잖은가.

하지만 결국 승자는 숀 펜이었다.

‘미스틱 리버’에 이은 그의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이었다.

 

국내에서 1년 만에 지각 개봉하는 ‘밀크’(Milk)를 2월18일 기자 시사회 때 비로소 보게 됐다.

흐음.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연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나니, 재미가 없는 시상 내역이든 아니면 반칙처럼 느껴지든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건 그냥 소름이 오싹 끼치는 연기였으니까.

 

애인인 스콧(제임스 프랑코)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하비 밀크(숀 펜)는 카메라 상점을 운영한다.

 동성애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 게이 인권운동을 시작한 그는 여세를 몰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출마한다.

37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에 영화 연기 경력 29년째인 이 배우는 아직도 선보이지 않은 채 감춰두고 있는 얼굴이 대체 얼마나 더 있는 걸까.

‘밀크’에서 숀 펜은 그 자체로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지만, 그가 이전에 이런 연기를 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더욱 놀랍다.

 

선이 굵고 파워풀한 연기에서 특히 흡인력을 발산해온 그는

‘밀크’에서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적 연기를 통해

 대부분의 관객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하비 밀크란 실존 인물을 실제로 만나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맘에 드는 상대를 은밀하게 유혹하는 말투에서,

토론회 때 통렬하게 공박한 뒤 살짝 상대를 쳐다보며 마무리짓는 표정까지,

이 영화의 숀 펜은 하비 밀크의 인간적 품새로부터 성적 취향까지를 매순간 고스란히 담아낸다.

 

무엇보다 배우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밀크’에선 숀 펜 이외의 연기자들도 훌륭하다.

악역을 맡은 조쉬 브롤린은 불안으로 내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흡사 시한폭탄처럼 느껴지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하비의 상반된 연인들로 등장하는 제임스 프랑코와 디에고 루나도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실제 역사의 무대에서 대부분을 촬영했고 고증도 꼼꼼히 한 이 작품은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삼은 현재의 영화가 아니라,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에 유태계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정체성이 투영되었던 것처럼,

‘밀크’에는 그 자신 동성애자인 감독 거스 반 산트의 자의식이 투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반 산트의 연출은 그 어느 때보다 직설적이고 열정적이다.

그만큼 힘이 있지만, 그로 인해 영화가 투박해지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밀크’는 전기 영화나 정치 드라마로서 다소 평범한 느낌이 있다.

클라이맥스 이후 하나의 이야기를 종결짓는 방식도 관습적이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더스틴 랜스 블랙의 시나리오는 분명 성실하지만, 효율적이기도 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거스 반 산트의 최고작은 여전히 ‘엘리펀트’다.)

 

1940년대 필름 누아르 고전 ‘이중배상’의 방식을 차용,

홀로 녹음기에 기록을 남기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생활을 교직해가면서 하비 밀크 생애의 마지막 몇 년간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주력한다.

동성애자들을 위시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밀크를 영화는 그저 숭고하고 위대한 인물로만 그리진 않는다.

때로는 약속을 뒤집기도 하고 때론 전술적으로 위협을 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통해 캐릭터의 그늘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정치에 대한 그의 의지가 개인적인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잉태되었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에서 성공 못잖게 실패도 경험하는 하비 밀크의 모습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랑 역시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하긴,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얻는 것은 모두의 마음을 얻는 것 못지 않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동진 이동진닷컴 대표 lifeisntcool@naver.com

'이동진의 부메랑인터뷰', '필름 속을 걷다',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등 출간.
KBS FM <유희열의 라디 오 천국> '이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쿡TV '무비스 토커',
한국영상자료원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함께 보는 다시보기' 등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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