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살았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온 중국본토영화는 묘한 흥분을 낳는다. 중국 영화제에서 ‘쌍식기’를 봤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호우시절’은 그처럼 나에게 온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보인 ‘고원원’은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니까. 아무래도 이번엔 중국과 연결하려는 한국영화의 비즈니스 쪽이 작심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선 정우성‘이, 그리고 중국에선 ‘고원원’이 만났다면 그것은 결국 최고의 인기남녀를 배치시켜 중국과 한국에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려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중국시장을 위해, 한류의 최고의 카드를 의미하는 영화가 마침내 나온 것이다. 바로 사랑에 대한 감독의 지속적인 관심사이다. 영화는 현실을 다루지만 언제나 그 속의 인연은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호우시절’이란 제목이 나왔나 보다. 비가 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뜻인가? 영화는 사랑을 다루지만 격한 애정신을 위해 제작되지 않았다. 감독의 역량은 물론 끊임없는 자기 주제의 연장선에서 제작된 것이다. 그것이 중국이든 한국이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놀라운 감독의 뚝심이다. 그래서 보기 좋다. 다양한 장면이나 주제는 보여줄 수 있지만 자신의 색만은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때, 이름으로 충분히 작품의 매력을 읽어낼 수 있으니까.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예측력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편안함은 물론 그 내용의 일관성을 또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리라.
이런 영화 중앙엔 최고의 매력 남녀가 연기를 한다. 정우성과 고원원. 한국과 중국에서 최고의 카드를 뽑은 것이다. 언제나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어 줄줄 아는 남자, 정우성은 가을이란 시간 속에서 가장 멋지게 빛났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원원, 중국 명문대인 교통대학 출신인 이 배우는 단아한 지성미를 완벽하게 뽐낸다. 이 둘이 만나는 영화 상의 시너지 효과는 과연 이라고 표현할 만큼 매력적인 화면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 둘은 좋은 화면 상에서의 모델만을 위해 주연을 맡은 것은 아니다.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의 변질을 소재로 사용했다면 이번에 시작부터 사랑의 강점을 부각시키면서 영화의 줄거리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기본 뿌리는 비극적 돌발 사건으로 인해 마음 언저리에 담게 되는 슬픈 사연으로 언제나 치유를 기다리는 망부석의 모습이다. 누구이건 간에 고쳐주었으면 하는 기다림을 갖는, 자체 치유력으론 어쩔 수 없는 Trauma가 존재한다. 이번에 그것을 고원원이 담당한 May가 갖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정신적 고통이란 Trauma의 치유를 위해 인간적인 관계, 혹은 사랑의 복원이나 재탄생을 요구한다. May의 우울한 과거는 고원원이란 아름답고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배우에게 즐거운 춤과 우울한 내면연기를 통해 천천히 밝혀진다. 무엇인가를 기대하면서도 어딘지 자신 없이 맴돌기만 한 어느 공원 Guide의 모습은 사랑스러우면서도 감추어진 비밀로 인해 다가가기 힘든 대상으로만 남겨진다. 이전 작품이었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죽음을 앞둔 자의 주저함을 극의 중앙에 배치했다면 ‘호우시절’은 반대의 상황설정이다. 어느 죽음 이후가 문제된다. 영화의 앵글은 그의 경험의 기록과도 같은 움직임과 분명해 보이는 그의 생각을 따라서 비밀스러워만 보이는 May의 행동과 움직임을 포착해 나간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도 같은 영화는 과거를 추적해가는 탐정처럼 하나하나 비밀을 벗겨 나간다. 남자의 행동이 점점 적극적일 때, 처음엔 적극적으로 응대해 보이던 May의 조심스런 거부는 영화의 신비감을 높여 나간다. 어느덧 보이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는 May의 이상한 움직임은 그녀의 심리적 상황과 내부적 파장을 엿볼 수 있게 하지만 강한 파동을 지닌 파괴력을 보여주지 않기에 더욱 보는 이들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영화는 긴장감이 전혀 없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영화 속의 Climax는 아마도 May의 솔직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자와 중국의 여인의 거센 동적인 파장과 내부의 격렬한 마음이 충돌하면서 영화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내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허진호 감독이 원하는 신비로운 서사는 막을 내리지만 더 중요한 ‘그래서 어떻게 할까?’라는 주제의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자신을 국제적으로 알려준 ‘북경자전거’와의 인연은 이번에도 재생된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노란 자전거’로 환생한다. 자전거를 올라타는 과정에서 처음에 힘들어했던 과정은 사라지고 어느덧 편안한 얼굴의 May가 나오기 시작한다. 내적인 치유, 그리고 그 뒤편에 숨쉬고 있는 사랑이란 존재감이 이번에도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 후부터 그들의 미래는 결정된다. 그리고 어느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 줄 것 같은 마지막 기다림은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그 때의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은 다시 한 번 생각해도 매력적이다.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된다는 것이. 과거의 불행을 갖고 사는 사람에게 새로운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있지만 역시 과거의 불행으로 붙잡혀있는 사람에겐 그렇게 쉽지 않은가 보다. 그러기에 새로운 사랑에 대해 한 발짝 물러나 있을 뿐, 적극적이지도 솔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할 때의 솔직함은 상처받은 자의 고통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하지만 상처를 아물기 위해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망설일 수밖에 없는 한 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사랑하는 또 다른 한 쪽 아닐까? 그러기에 자전거를 타면서 상징되는 치유의 미학은 이 영화의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기다림은 그리움이 아닌 희망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이다.
원래 감성적인 톤을 절제한 체 객관적인 미학을 던지려는 허진호 감독 특유의 미학이 숨쉬기 때문이다. 뻔하지만 사랑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격렬한 러브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뛰어난 연기력은 필수이다. 영화의 흥미로운 폭발력이 없다고 섬세한 인간의 감정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는 연기의 절정기로 접어든 두 남녀 배우의 완승으로 끝났다.
재발견이라기보다 그들의 존재감을 보여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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