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기자로도 몸담아… " 어린이 문화 발전에 큰 몫" 자부심
윤석빈 기자 binys@s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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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서 시인으로,
할아버지 동시인 신현득 선생은 아동 문학계의 큰 어른이자,
신현득 선생은 시골의 초등학교 교사 시절,
1970~80년대에는 소년한국일보의 기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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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득 선생이 소년한국일보의 취재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에 쓴 기사. 1976년 11월 9일자 1면에 방정환 선생의 탄신 79돌을 맞아 금관 문화훈장을 받게 된 내용과 방정환 선생의 손자 방일수 씨 (당시 서울 금화초등 6)가 남산에 있던 소파의 동상에 훈장을 걸어 주는 사진을 함께 싣고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일간지인 소년한국일보가
"아이들에게 소년한국일보 인기는 대단했어요.
선생은 또 소년한국일보가 창간 이듬해인
1971년엔 '엄마라는 나무'란 동시로 소년한국일보가 제정한 세종아동문학상까지 받는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42세 때인 1975년에는 취재 기자로
소년한국일보에 입사해 새로운 인연을 이어 간다.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 생활을 접고 서울에 올라 왔는데,
기자로 일 해 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린이를 위한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 입사를 하기로 결심했지요."
신현득 선생은 이후
1990년 다시 시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15년 동안 기자로서
소년한국일보와 희노애락을 함께 했다.
우리나라 어린이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물론 그 중심엔 소년한국일보가 있었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소년한국일보 어린이 미술 대회와
여름 방학 캠프의 원조격인 소년한국 여름 학교,
비둘기기자 해외 취재, 소년한국 합창단의 해외 공연 등이 대표적이다.
선생은 이 가운데 여름 방학 때마다
남이섬에서 4박 5일간 펼쳐졌던 소년한국 여름 학교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밝혔다.
여름 방학이면 어린이들이 여름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 들었고,
선착순으로 뽑힌 180여 명의 어린이들은 넓고 푸른 잔디밭과 울창한 숲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다.
"그땐 전화도 제대로 없던 터라,
부모님께 편지 쓰는 시간만 되면
어린이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자신을 반성하는 편지를 쓰곤 했어요.
그때 어린이들은 이제 40대에 접어들었겠네요. 허허."
신 선생은 여름 캠프에 참가했던
순수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듯 미소를 띠며 당시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1980년대 초 비둘기 기자들을 이끌고 미국으로 해외 취재를 다녀 왔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70~80년대에
소년한국일보는 어린이 문화 발전을 위해 가장 앞장서서 많은 행사를 펼치느라 분주했어요.
다른 어린이 신문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우리만의 힘이지요."
신현득 선생은
그리고 이제는 선배로서 지켜 보고 있는 소년한국일보의 이 같은 정신은
소년한국일보가 늘 어린이 곁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많은 문인들의 동화, 동시 작품이 소년한국일보를 통해 소개되어
그 뿐이 아니에요.
신인 만화가를 발굴해 지면을 통해 소개하는가 하면,
당대에 내로라하는 만화가들의 작품을 실어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지요.
신 선생이 이제껏 15권이 넘는 동시집과 동화집을 펴내고,
바로 이와 같은 소년한국일보에 몸 담았던 15년의 세월이 자리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지금도 매일 아침 소년한국일보를 보면서
옛일을 떠오른다는 할아버지 동시인 신현득 선생은
소년한국일보 50주년은 아동 문학을 비롯한 어린이 문화 전반에 있어 큰 경사라며,
"신문에서 어린이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소년한국일보,
그래서 언제나 어린이와 호흡하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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