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인재는 똑똑한 사람, 이젠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1969년생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을 알까’ 하는
의구심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정재승 교수는?
한술 더 떴다.
놀라움과 함께 분한 마음도 들었다.
아직 마흔도 안된 이 천재과학자는 스물일곱에 KAIST 교수가 됐다.
과학과 인문학, 대중문화 등을 아우르며 맛깔나는 글로 펼쳐내는 놀라운 재주도 가졌다.
학문적 성공과 대중적 인기,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게다가 우아한 형수님과 토끼같이 예쁜 세 딸까지 뒀으니….
얼마 전엔 소설 <눈 먼 시계공>까지 내면서 새로운 장르에도 손을 뻗쳤다.
도대체 못하는 게 없는 이 사내.
그와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입 하나 믿고 사는 나 김제동’은 영락없는 ‘고민남’이 됐다.
궁금했던 걸 물으면 매번 명쾌하고 속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마디로 ‘열등감’조차 느낄 수 없는 ‘엄친아’였다.
정재승 교수는 똑똑하다. 스물일곱에 KAIST 교수가 된 수재다. 그런 그가 우리 교육은 잘못됐다고 했다.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뭔가 배우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인데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공부의 즐거움을 주는 게 교육이라고 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어떻게 하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굳이 설명하자면 특이한 쪽에 가깝죠.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과 다르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죠.
연합고사 안보고 과학고에 갔고, 대입학력고사가 보기 싫어 KAIST에 갔죠.
운전면허 시험도 대학 졸업한 뒤 딴 거니까.
과학고에서도 전 국어와 음악을 제일 잘하는 학생이었어요.
대학에서는 도서관에 가서 방학때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정해서 읽었죠.
과학분야가 아닌 책이 훨씬 많았어요.
물리학은 KAIST에서 현실감 떨어지는 친구들이 선택하는 전공이었어요.
그러다가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했고 이 분야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 포닥(포스트닥터·박사후과정)하러 갈 때도 의대 내의 정신과로 갔어요.
돌아와보니 세상이 달라져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것들이 중요해졌더라고요.
그래서 특별해 보였던 것 같아요.”
-특이한 것, 남과 다른 것을 찾는 건 반골기질과도 통하잖아요.
“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세상이 시키는 대로 충실한 교과서적 삶을 살았어요.
술·담배도 하지 않고, 커피도 안마셨고(술과 담배는 지금도 안한다) 오락실이라는 데도 대학 4학년 때 처음 가봤어요.
기존 시스템에 대해 강한 저항감과 분노를 느끼면서
일종의 ‘삐딱선’을 타게 된 것은 대학 4학년때 실연을 하고 나서죠. 어떻게 보면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는데,
전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나같지 않다는 것을 몰랐어요.
완전한 청정지대에 살았다고 해야 하나?
날 둘러싼 시스템을 충실히 따르며 살았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세상의 위선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됐죠.
이후 4~5년간 방탕의 끝을 달리면서 굉장히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탐닉했어요. 하하.”
■“학창시절 특이한 모범생… 실연 뒤 세상 위선에 반감
과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경이롭고 특별한 학문”
반바지에 편한 티셔츠, 동네형 같은 차림으로 나타난 정재승 교수는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실제로 학교에 갈 때도 그런 차림으로 가고,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을 함께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것에 상당히 과민한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참 의외다. 그런 분이 술을 못 마신다니. 대신 “술자리는 무척이나 좋아해서 안주를 엄청나게 축내고 다녔다”고.
술자리에 끼기 위해 열심히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술값을 계산했다고 한다.
나와는 정반대다. 대학시절 돈없이 술 얻어먹고 다니다보니 안주까지 축내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수년간을 보냈다.
지금도 내가 사는 술자리에서도 안주를 못먹는다.
-교수님이 쓰신 <크로스>라는 책에서 MC 유재석과 강호동의 웃음 비밀을 분석한 내용을 봤는데 괜히 거부감도 들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입장에서 웃음은 상상의 영역으로 놔둘 만한데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파헤치시니 말이에요.
그런 거 다 분석하시면 저희는 뭘로 웃기고 사나요?
“그래서 지난 2000년간 놔뒀던 것이고 이제 시작하는 거예요.
사랑이든 감정이든 웃음이든 코미디든 뭐든 사회학, 인문학, 철학이 아닌 과학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과학을 인문학과 다른 삭막한 틀로 규정지을 필요는 없어요.
인문학과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분석 도구이자 틀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는데요.
영화, 사랑, 의사결정 등 기존의 과학적 시각이 손대지 않았던 것을 바라보고 분석한 것이 <과학콘서트>를 비롯한 저의 책들이죠.”
-‘과학 대중화의 전도사’라고 붙어 있는데….
“전 그 말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과학을 할 수도, 쉽게 이해할 수도 없어요.
문제를 풀고 알아가는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들죠.
그렇지만 과학은 문제를 풀어내고 깨달음에서 오는 경이로운 기쁨이 커요.
과학은 모든 사람들의 생사와 삶의 방식, 우주와 자연의 진실과 밀접하게 얽혀 있거든요.
그것을 엿보는 것이 과학이죠. 그래서 저는 과학이 굉장히 특별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과학을 하는 제가 자랑스러워요.
그 벅찬 경이로움과 깨달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책을 쓰는 거죠.”
-과학과 기술 남용에 따른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대한 회의가 많잖아요.
과학이 미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뭘까요?
“지금까지 과학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편하고 풍요롭게 살아보자는 방향으로 사용됐어요.
이에 대한 반성은 있어야 해요. 앞으로의 과학기술은 인간적 가치를 높이는 기술,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기여하도록 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질주하는 과학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질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지요.
지금도 과학은 권력과 돈에 종속돼 있는데 이건 인간적 가치를 높이는 과학과 다르잖아요.
과학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합리적 사고이자 방법론으로 보고 싶어요.”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분은 무한경쟁을 추구하고 독려해온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 성공을 일궈온 완벽한 모델 아닌가.
전문대를 11년이나 다녀 “너 의대 다니냐”고 어머니로부터 핀잔 듣던 나와는 다르게 살아온 사람이다.
사회가 추구하는 완벽한 이상형으로 살아오신 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 “사회전체 이익 대변해야 진정한 지식인이죠
내가 모르는 것 없는 고수? 술·담배·골프 안하면 돼요”
“20세기엔 남보다 1.2배 똑똑하면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어요.
이젠 시대가 달라졌죠.
더 똑똑한 것 대신 다른 사람 100명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요.
자신이 아는 것을 개방하고 공유하고 협동해야만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경쟁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에요.
경쟁을 붙이는 방법으로 20세기가 굴러왔다면 지금 펼쳐진 문제들은 그런 경쟁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지금 교육은 그런 부분을 받쳐줄 수 있을까요?
“지금 교육당국이 잘못하고 있는 게 그겁니다.
시대착오적 방법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어서 걱정되는 부분이 많아요.
모두 장미가 되라고 닦달하면서, 더 빨간 장미가 되라고 닦달해요.”
-학부모 입장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호기심을 갖고 뭔가 배우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라고 봐요.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돼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는 아이들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잖아요.
평생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정반대죠.
이런 교육 시스템이 지속되는 것은,
같은 시스템 아래에서 이겨왔고 선택돼왔던 사람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 같은 시스템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교육뿐 아니라 모든 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왜 일정 부분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누어야 하는 건가요?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벗어나 우리 사회 전체의 이익을 성찰하고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스템은 지식인들에게 권력을 줬지요.
그리고 그 기득권은 내가 속한 집단을 넘어서,
전체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상식을 가진 지식인에게 주어져야 하는데 그런 상식이 없는 사람에게 기득권이 주어져 있다는 게 문제죠.
지지 여부를 떠나 노무현 대통령 같은 분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분이 자신의 권력을 역대 대통령처럼 행사했더라면 무난한 대통령이 됐을 텐데,
자신을 넘어서 다른 계급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다는 점 때문에 (노 대통령을) 참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고 보니 1주기 사회 보신 거는, 트위터에서 난리가 났던데, 정말 감동의 도가니였어요.
트위터 하면 제동씨가 대표적 연예인으로 꼽히는데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저 사실 기계칩니다.
트위터도 친한 후배가 만들어줬고 아이폰은 사용할 줄 몰라 장롱 속에 넣어놨는데
(윤)도현 형이 사용법을 알려줬을 정도예요.
“기계치가 팔로워 10만명이라고요? 완전 불공평한데요.”
그랬다.
아는 후배가 전화해서 트위터를 개설해 줄 테니 원하는 아이디를 불러보라고 했다.
금강경이라는 아이디로 만들어 달랬더니 글도 남겨야 한단다.
신문에서 이란 시위가 트위터로 중계됐다는 기사를 봤던 게 얼핏 생각나
“이란을 잊지 맙시다.
쌍용차도 잊지 맙시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라고 내처 불렀다.
이 한 줄 때문에 나는 본의아니게 ‘트위터의 선구자’가 됐다.
정 교수는 트위터로 공개토론까지 하는 초고수다.
어디 첨단문명뿐인가.
엄청난 독서가에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모르는 게 없다.
심지어 내가 출연한 <스타골든벨>도 다 보셨단다.
그걸 다 하는 시간이 어디서 날까.
“술·담배·골프를 안하면 돼요,
하하.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탐구 대상이라고 보는 거지요.”
세상 모든 것을 탐구 대상으로 보면 된다고?
에휴…, 나에겐 정 교수가 진정한 탐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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