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

황장엽은 누구… 분단 비극의 또다른 아이콘

강개토 2010. 10. 11. 14:36
ㆍ주체사상 입안한 북 최고 엘리트… 남쪽으로 망명해
‘극과 극’의 삶

북한 주체사상을 정립한 이론가에서 북한을 가장 매섭게 비난하는 반북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그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일제에 강제징용돼 강원도 삼척탄광에서 노역하던 중 해방을 맞아 평양으로 돌아가 교사 생활을 했다.
그후 모스크바대학 유학 중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본격 공부한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에 최적화해 주체사상을 이론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황장엽 회고록>
(2006)에 따르면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사상’이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된 65년부터 체계화하기 시작한 주체사상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 독립투쟁 때부터 얘기했던 ‘자기혁명은 자기가 해야 하고,
남의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기갱생을 해야 한다’는 소박한 사고에 바탕해 있다.
 
80년에 후계자로 공식화된 김정일은
김 주석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그 후광을 이어받고자 주체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당시 남한 내 변혁 운동가들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 공로로 그는 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오른 뒤
72년부터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수행하고,
84년엔 당 국제담당 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 부위원장의 중책을 맡았다.

주체사상의 배후세력으로 남한 내에도 유명했던 황장엽이
97년 2월12일 탈북, 남한에 망명했다는 사실은 남북한 모두에 큰 사건이었다.
그가 김덕홍 전 북한 여광무역 사장과 함께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자,
남한 진보진영에는 소련 붕괴 이후 또 한 번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정권의 비사가 그의 입에서 쏟아졌다.
황장엽은 분단 이후 지금까지 최고위급 탈북자로 남아 있다.
그는 북한 사정을 가장 잘 알기에, 가장 무섭게 북한의 치부를 공격할 수 있는 인물로 통했다.

반대로 북한 내에서 그는 ‘조국’이 가장 어려울 때 떠나간 ‘배신자’였다.
돈 착복, 여자문제 등이 원인이 돼
권력핵심부의 눈 밖에 나고 탈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미확인 얘기도 흘러나왔다.
탈북후 13년간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안가에 머물러야 했다.
남한의 학계 일각에서도 그는 “과학적 분석보다 감정적인 측면이 앞선다”는 평가도 나왔다.
 
“김일성은 그를 대접해줬지만,
김정일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탈북 동기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남북 모두에도 안착하지 못한 경계인 성격이 있는 것이다.

북한 내 잘나가던 권력 엘리트였던 그가
탈북을 결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90년대 중반 북한 내 대기근이었다.
그의 회고록 곳곳에는
“나는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는 걸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북한의 권력에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는 김일성 생전에도
중국식 개혁·개방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폈지만
김일성 부자는 남한과 수교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한 중국을 마뜩지 않아 했다.
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그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숨을 거둔 순간,
그에게서 주체사상을 배웠고
또 한때 많이 의존했던 김정일은
자신의 3남 정은을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주석단에 공식 등장시켰다.
 
그 사이 황장엽이 정립한 ‘주체사상’은 역사가 됐고
그 자리를 ‘선군정치’가 메웠다.
그로선 지도 이론을 만들었던 당 창건일에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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