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오후 서울 신당동(옛 청구동) 자택.
샌드위치로 점심을 끝낸 김종필 전 총리는 조금 쉬었다가 거실에 앉아서 손님을 맞았다.
아직도 오른팔이 조금 불편한 듯했으나 안색은 밝았고 중저음의 탁하고 굵은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검정바지에 청색 스트라이프 셔츠 그리고 연한 회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손님들에겐 커피를 내오게 했고 본인은 콜라 잔을 앞에 놓았다.
―'5·16' 전날 밤,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박 소장의 신당동 댁에 있었어요.
혁명공약을 마지막으로 손보다가 저녁 11시가 좀 넘어 내가 '갑시다,
사전에 들통이 나서 6관구 사령부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소,
그러나 30사단·33사단·제2해병여단 전부 예정대로 한강 인도교로 향하고 있으니
박 소장은 6관구에 가서 정리를 해주시죠,
저는 필요한 것을 전부 인쇄할 테니 내일 아침 5시에 광명인쇄소 앞에서 만나죠,
방송국에 같이 가십시다' 했죠.
박 소장의 지프를 같이 탔어요. 뒤에는 한웅진 준장과 내가 탔지요.
화신상회 옆에서 나는 내리고 박 소장과 한 준장은 영등포 쪽 6관구로 갔어요."
◆제발 돌아가라, 쏠 수밖에 없다
―나중에 신민당 유진산 당수의 사무실이 그 광명인쇄소 옆에 있었죠.
"직원들이 인쇄 준비를 하고 기다리더군요.
내가 그랬죠.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 공갈을 해서 마음이 내키지도 않은데 인쇄를 했다고 하시오.'
직원들이 20명쯤 있었는데, 원고를 턱 내주니까
'혁명공약? 혁명취지문?'
읽더니 얼굴들이 하얘져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고요."
―인쇄는 무사히 마쳤군요?
"나는 2층에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관 2명이 화신상회 쪽에서 올라와요.
'어? 뭔데 이 시간에 불 켜고 인쇄하나 잠깐 들어가 보자',
'사고도 아닌데 뭐 들어갈 필요가 있어?' 하면서 둘이 옥신각신해요.
인쇄소 안에 이낙선 김용태 이학수(인쇄소 사장) 등이 함께 있었는데,
나하고 이낙선이 권총을 갖고 있었어요.
내가 속으로 빌었어요.
'도리 없다, 당신들이 들어오면 쏠 수밖에 없다, 제발 그냥 가달라.'
그런데 정말 그냥 가더군요."
- ▲ 경남 진해의 저도 별장에 여름휴가를 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과
- 박종규 경호실장(뒷모습)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5·16'을 3개월 앞두고 정군(整軍)운동 끝에 예편했는데
박정희 소장과는 언제 혁명에 대한 첫 교감을 가졌습니까?
"군복 벗고 집에 가니(1961.2.15) 슬프데요.
이걸로 내 군 생활이 끝나는구나.
이틀 후 대구로 박 소장(2군 부사령관)을 만나러 갔어요.
송요찬 육참총장 등 13명이 옷 벗고 있다, 나도 옷 벗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군운동만 갖고는 안 되겠다고 했더니 박 소장이 피식 웃어요.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야 하면서요.
박 소장은 이미 만군 출신 장군들을 만나고 있었던 겁니다.
여차하면 들고 일어나자는 겁니다.
내가 '서울에서는 조직을 상당히 했습니다' 했더니,
'어 조직을 하고 있었어? 어디서?'하고 물어요.
30사단, 33사단,
그리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6군단,
육군본부,
1군 사령부 내 동기생들과
상당히 깊숙이 얘기되고 있다고 하자,
아무 말 않고 조심하라고도 않고 '으음 알았어' 하더군요.
며칠 후 박 소장이 서울로 올라왔어요."
◆거사 한 달 전 박 소장 첫 소개
―박 소장이 '혁명 지도자'로 결정된 건 언젭니까?
"동지들이 지도자는 누구냐고 자꾸 물어요.
아직 밝힐 수 없다,
때가 되면 여러분 모인 자리에 오실 거다,
지금은 모호한 상태로 놔둬라,
했죠.
9기생 강상욱 중령의
장인이 소유한 5층 건물이 충무로에 있었는데,
옥상에 29명이 모였어요.
거기에 박 소장을 모시고 가서 궁금하던 그분이 바로 이분이다,
했죠.
그게 1961년 4월 7일입니다.
박 소장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날이에요."
―다른 지도자는요?
"처음엔 박병권 장군도 논의됐는데,
그분은 군대 내 족청(조선민족청년단) 지도자였어요.
당시 서울에 와있던 미 CIA의 크레퍼(가명) 대령이 족청과 먼저 손을 잡았어요.
또 장도영 장군과도 접촉했고요.
장 장군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으니까 태도가 애매할 수밖에 없었죠.
우습게 됐어요.
혁명에 대해 장 장군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게 계산한 흔적이 있어요."
―박병권 장군에게도 제안했습니까?
"아니요.
그분은 크레퍼하고 접촉했는데
족청도 움직임이 상당히 활발했어요."
―그들은 어떤 방향이었습니까.
"뒤집는 쪽이었지요."
◆쿠데타라 해도 상관없다
―장도영 장군과는 5·16 전에 어떤 관계였습니까?
"혁명을 한다고 하니까
'계획서가 있느냐'면서 박 소장에게 달라고 하더래요.
내가 만든 게 있긴 있었습니다.
그러나 '뭘 믿고 주느냐, 그러다 일망타진된다' 하고 반대했어요.
박 소장이
'장 장군과 나는 남이 모를 만큼 깊은 사이야, 날 믿고 줘' 해요.
하는 수 없이 드렸죠.
그러면서
'3일 후에 반환받아 주십시오' 했는데
결국 끝끝내 내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무슨 내용인데요?
"혁명이니 뭐니 자극적인 어휘는 안 들어가고
대신 혁명 후의 정부 조직 같은 것이 만들어져 있었죠.
계획서는 경제개발을 위주로 했어요.
장면 정부와 다른 점은 경제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 조직을 만들었어요.
나중에 경제기획원이 됐죠.
또 국민운동본부도 있었는데 이것은 새마을운동으로 발전됐고 그리고 중앙정보부가 있었어요.
이것들이 주요 골자요."
―5·16은 쿠데타입니까, 혁명입니까?
"학자들은
쿠데타는
같은 세력끼리 뒤엎는 것이고,
레볼루션(혁명)은
밑에 있는 세력이 위를 뒤엎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5·16을 폄하하기 위해
쿠데타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도 그랬어요,
쿠데타건 레볼루션이건 우리나라를 근원적으로 변혁하고 발전시켰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거사 정보가 미리 새나간 경우는 없었나요?
"정보는 난무하고 있었어요.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족청이다, 박병권이다, 미국이다, 아무개다, 하도 많이 돌아다니니까 놔두었어요.
무슨 소문이 나면, 믿을 수 있는 거야 그거?
그저 돌아다니는 소리 아니야?
지들이 들고일어나면 어떡헐 텨?
뭐 그런 취급을 받았어요."
◆이집트 혁명이 '5·16'의 교과서였다
―군사혁명 때는
인쇄, 요인 체포, 중요기관 접수 같은 절차가 있을 텐데,
어디서 배웠습니까?
"매뉴얼은 없고,
이집트 혁명(1952년) 때
나세르가 나기브와 함께 정부를 장악하고,
나중에는 나기브를 쫓아내잖아요.
내가 그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또 케말 파샤(1923년 청년 장교들과 함께 터키 혁명을 일으킴)
에 관한 것도 뽑아서 읽었죠."
―5·16의 핵심은 박정희입니까 김종필입니까?
"핵심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나는 돕는 일을 한다, 내가 군복을 벗을 때도 그런 심정으로 벗었던 것이고요."
―박정희는 떠받들어졌다,
실제로 5·16을 기획하고 집행하고 성사시킨 사람은
김종필이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중앙 일은 네가 해라,
박 대통령이 그랬어요,
서울은 네가 맡아라,
네가 주가 되라,
나머지 외곽은 내가 하마,
이미 손써놨다,
이것이 합쳐진 것이지요."
☞5·16
1961년 5월16일 새벽 3시,
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육사 출신 장교들이
장면 정권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 혼란 등을 이유로
병력을 동원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장·사병 3700여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고 혁명공약 6개 항을 발표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 근무했던
김종필 중령은 박 소장을 도와 5·16의 기획·진행·뒷마무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