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는 정직하고 꽤 괜찮고 한결같은 사람"
배우 장미희가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장례식장에서 애절하게 흐느낀 사실이 뒤늦게 화제다.
장미희는 지난달 31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고인을 추모했다.
여배우와 '민주화운동 대부'의 조합은 왠지 낯설지만
두 사람은 20년 가까운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사이다.
장미희는 고인의 에세이집 '희망은 힘이 세다'에 김 상임고문의 인품을 극찬하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
상처와 아픔을 안으로 삭이고,또 천진한 웃음으로 그것을 밖으로 내놓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가 존경스럽다.
영화 '와호장룡'의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명제는
한갓 언설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실이 된다"고 말한다.
장미희는
고인에 대해 '정직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 '한결같은 사람'으로 평가했다.
장미희는
1993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심포지엄에서 처음으로 고인을 만났다.
장미희는
"그때 우리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편안하게 여러 문제들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참 솔직했다"
면서
"'정직하다'는 것이 내가 그에게 마음속으로 준 첫 번째 평가다"
라고 했다.
장미희는
"행사 마지막 날 술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플로어에서 춤을 출 수 있는 곳이었다.
다들 자연스럽게 춤을 거들고 있었는데, 그도 누군가에게 이끌려서 풀로어에 나왔다"
면서
"대단히 못 추는 춤이었는데, 그래도 참 매력적이었다.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스스럼없이 사람들의 동작을 조금씩 따라 하는데
그게 불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에 대한 두 번째 생각은 '꽤 괜찮은 사람이다' 하는 것이었다"
고 했다.
이 만남 이후
고인은 재야 활동을 지속하다가 정치인이 됐다.
장미희는
"그렇게 10년을 보았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체득하고, 그러나 또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면서
"그에게 붙일 수 있는 세 번째 생각은 '한결같은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주제와 생각으로 나를 놀라게 하지만,
그의 속내는 항상 같아 보인다"
고 말한다.
장미희는
"장맛이 우러나오는 그를 만나는 것은 제법 행복한 일"
이라며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그가 우리 안의 '희망'이라 말할 수 있어 또한 즐겁다"
고 했다.
이렇게
고인의 고결한 인품을 존경하던 장미희는
고인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반도재단의 자문위원을 맡으며
문화 정책에 대해 조언하는 등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왔다.
한편 고인 역시 생전 여러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장미희를 꼽은 바 있다.
"고인 신념은 평화… 그가 아름다웠던 이유"
제 가슴 속에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인이 세상을 뜬 지 나흘째인 2일 오후7시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선 일반 시민과 정치인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문화제 마지막 순서로 고인의 생전 영상이 음성과 함께 나오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민주화청년운동연합(민청련)의 상징인 두꺼비 옆에서 부인 인재근 여사와 어깨동무를 한 채 왼쪽 손을 높이 치켜든 김 고문이 그려진 현수막이 내걸렸다. 장소가 비좁아 미처 들어가지 못한 500여명은 스크린이 설치된 야외에서 촛불을 들었다. "1980년대 거리에서 저는 시위생, 고인은 연사로 집회에 참석했다" 며 "고인은 우리 세대에게 언제나 큰 형님이고 가장이었다" 고 말했다. 권해효씨의 사회로 진행된 문화제에선 문성근 국민의명령 대표, 임수경씨가 추모시를 낭송하고,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이계안 전 의원 등이 추모사를 했다. 꽃다지, 장사익, 권진원, 김원중, 노래를 찾는 사람들, 우리나라, 안치환 등의 추모 공연도 이어졌다. 인재근씨는 "(남편은)하늘나라로 가면서 다행히 비밀병기인 나를 남겨두고 갔다. 그가 하늘나라에서 '인재근을 남겨놓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가 남긴 마지막 말 '2012년을 점령하라'는 그 뜻을 이어받아 앞장 서서 열심히 싸우겠다" 고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집전으로 열린 미사엔 유가족 신도 일반시민 정치인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강론을 맡은 함세웅 신부는 "83년 민청련 결성은 목숨을 건 결단이었고, 그 때문에 김근태 형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무서운 전기고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평화 정의 지혜인데, 평화를 정의 앞에 놓은 것에 고인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의 행동 지향과 목적이 바로 평화였던 것" 이라고 했다. 마지막 날인 이날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도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 조문객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김병연(47)씨는 초등학생인 아들 윤서(10)군과 함께 빈소를 찾아 "민주화 투쟁을 하던 80년대보다 오히려 민주화 이후 삶이 더 기억에 남는 분이었다" 며 "끝까지 같은 마음으로 사셨던 김 고문처럼 아들에게도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고 말했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 손숙 전 환경부 장관, 정덕구 전 산업자원부 장관, 이인제 자유선진당 의원, 안상수 진영 한나라당 의원,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등이 찾았다. 장례위원회 측은 오후 7시 현재 누적 조문객이 3만7,000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오후 2시 15분쯤 북측이 민족화해협의회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실을 통해 유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전달해왔다" 고 밝혔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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