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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의아버지’에게 만화를 다시배우다

강개토 2008. 2. 16. 23:28
근대 풍자만화의 선구자 ‘오노레 도미에’
 
 
오노레 도미에
근대 만화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이 질문을 뒤집어보면, 근대 이전에도 만화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게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하지만 우리나라 만화계에 이러한 도식을 적용하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의 근대를 학문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꽤 있어왔으나, 그 대상이 ‘만화’라는 특정 예술장르일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구에서 만화는 풍자를 통한 ‘권력과의 싸움’을 자양분으로 삼았지만,  일제를 통해 만화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의 경우, 그 정치색은 거세될 수 밖에 없어, 단순한 '재미있는 그림'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만화가 본격적으로 정치색을 띠게 된 것 역시 그리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 못한다.

만화는 민화와 관련이 많다. 국어사전에서 '민화'를 찾아보면 '실용을 목적으로 무명인이 그렸던 그림, 소박하면서 익살스럽고 파격적인 것이 특징임' 이라고 나와있다. 즉, 사회적으로 ‘예술가’라 지칭하는 부류 외, 평범한 사람들이 그린 작품을 말한다. 원앙이 부부금슬을 기원하고, 학이 장수를 기원하는 등, 상징적 의미를 갖는 우리네 민화처럼 과거 서양의 민화 역시, 소원성취, 혹은 교화적인 내용을 담아냈다. 이를테면, 농기구를 팽개쳐 주고 잠을 자고 있는 농부를 묘사한 서양의 민화는 ‘게으름뱅이에 대한 조롱’의 의미와 함께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을
함께 표현한 것이다. 이런식으로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냈다.

▲당시 유행했던 풍자만화, 영국 수상(좌)와 프랑스 왕(우)가 지구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했다.     © 길레이
앞서 언급한 사전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자. 민화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는다 해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민화가 기본적으로 ‘고급 예술’로 굳어져 온 회화와 다른 방식으로 ‘수용’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 핵심어는 ‘대중’이다. 그렇다면 만화의 뿌리를 캐낼 때, 민화의 수용층이 넓어지게 된 과정에서 생겨난 ‘대중’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지칭하고, 어떻게 탄생했느냐,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라 하겠다. 

대중의 탄생은 서양 근대사의 시대구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구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쟁취와 관련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민중은 왕당파와 보수파의 반동적 정치행태에 대항해 피를 대가로 의회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쟁취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자리를 잡고, 언론에 힘을 보태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초기 만화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풍자적이었다. 이는 과거 민화의 속성에 '정치참여'의 소재를 덧댄 것이다.
당대의 지성이던 빅톨 위고와 에밀 지라르댕이 루이 나폴레옹을 위태하게 들고 있던 모습(좌), 지식인들의 변절을 풍자했다. 오른쪽은 당시 프랑스 총리인 튀르고가 '언론'을 몽둥이로 후려치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했다.     © 오노레 도미에

 흔히 cartoon 이라고 하는 만화는 과거 영미권에서 caricatur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프랑스어로는 캐리카튀르) 우리가 흔히 ‘인물의 표정을 소재로 한 희화’를 나타내는 캐리커쳐는 오래 전 영국에서 풍자 만화를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는 16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안니발레 카라치가 자기 후원자들의 얼굴 특징을 익살스럽게 그린 초상화의 제작 방식을 뜻하는 말인 카리카레 caricare를 어원으로 삼는다. 카리카레는 영어로 ‘물건을 싣다’는 뜻인 charge에 해당한다. 이러한 캐리커처가 대중과 만나면서 만화의 역사는 시작된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 정치풍자만화는 소비력을 갖추고 급부상하고 있던 거대한 대중을 정치적으로 계몽하는데 큰 축을 담당한다. 근대 프랑스 언론의 발달은 ‘라 카리카튀르’나 ‘라 실루에트’처럼 정치풍자만화를 주로 다룬 잡지에 큰 빛을 지고 있다. 다수 대중을 위해 많은 부수의 잡지를 출판하려면 손으로 그리는 만화보다, 판화로 제작한 만화가 필요했다. 따라서 당시 수많은 정치풍자만화가들은 거의 매일 새로운 석판화를 제작해야 했다. 민중은 내일 ‘라 카리카튀르’에 과연 어떤 만평이 실릴지 매일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200년 전 프랑스의 풍경도 요즘 독자들이 신문 시사만화를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모양이다.

가르강튀아     © 오노레 도미에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구체제(앙시앙 레짐)를 부정한 지식인과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의 언어에 공감하며 스스로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 민중들은 왕당파와 보수파의 반동적 정치행태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혁명’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는 ‘낭만주의’의 시대였고, 예술가들은 이런 혁명의 역동성을 글로, 그림으로, 연극으로, 음악으로 표현했다. 민중의 언어는 워즈워드에 의해 시성을 부여받았고, 민중의 이미지는 오노레 도미에(1808~1879)에 의해 형상화되었다. 도미에의 붓과 칼은 당시 노동자 대중이 프랑스에서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데 큰 힘을 보탰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성취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혁명가요, 예술가이자, 평범한 파리의 서민이기도 했다.  

민화는 대중의 탄생, 그리고 이성, 계몽 등 근대적 가치의 쟁취와 함께 ‘풍자만화’로 독립된 ‘언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 지리한 서론을 접고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근대 만화의 아버지’에 대한 썰을 풀어보려한다. 이 글은 박홍규 교수가 쓴 ‘오노레 도미에(소나무, 2000)’라는 책에 많은 빛을 지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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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


도미에는 가난한 유리공이자 독학한 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도시였던 ‘파리’로 건너가 ‘혁명의 시대’를 몸소 체험한다. 당시 프랑스는 인류 최대의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대혁명’을 일궈낸 후,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그에 따른 좌절 속에서 계속되는 반동과 혁명의 혼란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민중의 힘으로 공화정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노력은 만연한 '야만' 속에서 그렇게 더디고도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파리로 간 도미에는 학교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채, 13세에 법률 사무소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 후 르누아르 밑에서 그림을 배우며 고전적인 회화와 조각, 미술작품들의 가치에 대해 눈을 떠간다. 그가 17세가 되던 1825년, 그는 도제식으로 7년동안 출판과 석판화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풍자만화가인 ‘필리봉(1800~62)’이 창간한 라 카리카튀르 지(1830년 창간, 29년에 창간되었다 1년여만에 폐간된 ‘라 실루에트’의 후속으로, 정치풍자만화 잡지인 라 실루에트는 8쪽 분량으로 10일마다 간행되었다고 한다)지에 ‘혁명의 희생자’ 등 3편의 정치풍자만화를 싣게 된다.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 만화(가운데 프랑스어로 '언론의 자유'라고 써 놓고 있다)와 왕울 괴물로 묘사하고 주변의 수구세력을 간사한 악마로 묘사한 만화     © 오노레 도미에

도미에가 이 만화를 실은 1830년 7월은 개혁과 공화정을 요구한 노동자, 학생, 소 브르주아들이 혁명에 성공, 왕정을 옹호했던 샤를 10세를 영국으로 추방시키고 루이 필립을 새 왕으로 추대, 입헌군주정을 쟁취해낸, 이른바 ‘7월 혁명’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도미에는 이후 수많은 혁명과 쿠데타, 반동, 전쟁을 겪는 혼돈의 시기에 신랄한 정치풍자로 사회를 변혁하는데 고무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도미에의 풍자만화 중 가장 유명한 ‘가르강튀아’를 보자. ‘가르강튀아’란 풍자 문학가인 프랑스와 라블레의 작품인 ‘가르강튀아’에 나오는 거인이자 대식가의 이름이다. 도미에는 ‘가르강튀아’의 이미지를 빌어 당시 프랑스의 왕을 가르강튀아로, 그 왕에게 아첨하고, 수구파를 옹호하는 교활한 정치가와 법관을 가르강튀아의 배설물 주위에 꼬이는 추한 인간군상으로 표현했다. 왕을 의미하는 가르강튀아의 머리는 ‘서양 배(快果)’ 모양이고, 그의 혀는 민중을 착취해 제 배를 채우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처럼 묘사되어 있다. 당시 민중들은 왕과 귀족, 정치인, 법관들이 천박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현된 도미에의 그림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또한 1834년에는 언론의 자유를 표현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1835년에는 괴물로 묘사된 왕과 그 주의에서 갖은 아첨을 일삼는 추악한 모리배들을 표현해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공화국', 파리 오르셰 미술관     © 오노레 도미에
도미에는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물론 조각이나, 유화, 판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스스로 7월 혁명 당시, 총을 들고 시가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직접 겪었던 시가전 풍경을 만화로 그려내기도 했다. 평범한 소시민이 총을 들고 군대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던 절절한 이유는 어떤 글보다도 그의 만화에서 잘 구현된다. 1840년대 도미에는 파리의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을 많이 그렸다. 빨래하는 아낙네, 목욕하는 사람들, 부부의 생활, 소풍 등 파리 소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판화에 새기기도 했다. 또한 40대 부터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식 회화를 그리기도 하는데, 그의 유화는 바르비종파로 유명한 밀레(Jean Francois Millet)나 역시 행동하는 화가이며 축구 광고로 패러디 되기도 했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들라크루아 (Delacroix), '악의 꽃'을 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 등이 극찬 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파리의 미술 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등, 수많은 개혁과 노동자 봉기를 옹호하는 만화를 꾸준히 그리고, 변절한 지식인들을 풍자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인생 철학을 계속해서 실천해 나갔다. 

하지만 도미에는 여성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듯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예를들면, 아이를 내팽개친 채 책을 뒤적이는 여성을 남편이 뒤에서 한심하게 쳐다보는 식의 풍속만화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시대상이기도 했지만 여성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그다지 진보적이지 못했던 도미에의 모습이기도 했다. 또한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비참했던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이 적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아무래도 그의 관심사는 평범한 소시민과, 민주주의, 그리고 공화정에 대한 애정이라는, 다소 협소한 경계선 앞에서 그쳤던 듯 하다.
파리의 치과 풍경(좌), 화가의 작업을 구경하는 시민, 화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으로 봐서 '무교양'의 신사를 풍자한 그림인 듯 하다(중) 작곡에 열중한 어머니 뒤에 아이가 고꾸라져 있다. 여성에 대한 도미에의 보수적 시각을 보여준다.     © 오노레 도미에

1850년대는 독재의 시대였다. 카멜레온 같은 기회주의자였던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친위쿠테타를 일으켜 20여 년간의 독재정치를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 2공화국이다. 이 때 프랑스는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프랑스의 경제를 살려놓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가 그랬듯 그가 통치하는 시절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 때도 도미에는 수많은 풍자만화를 그려 '풍족한' 독재정권 시절의 음영을 날카롭게 표현했다. 전쟁과 식민정책에 대한 비판은 그의 주된 주제 중 하나였다. ‘제국은 평화다’ 루이 나폴레옹의 이 유명한 말은 강압에 의한 평화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물론 이는 ‘가짜 평화’를 말하는 것이며, 도미에는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 보들레르는 ‘도미에의 초상에 바치는 시’를 써 도미에와 그의 작품세계를 찬양하기도 했다. 보들레르는 도미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거리를 소개시켜주기도 했고, 도미에는 보들레르의 시집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참으로 한 풍자가로 익살꾼으로
그러면서도 그가 그리는 강력한 힘으로
악한 것과 선한 것, 그리고 권력을
자신의 심장으로 미화시켰다네...


                                      보들레르, 도미에의 초상에 바치는 시 中

그의 풍속만화는 또한 평범한 파리지앵, 파리지앤느의 생활을 묘사한 ‘발자크’의 소설 속 풍경과도 닮아있다. 실제로 발자크와 도미에는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고, 발자크는(왕당파에 가까웠지만) 그의 만화를 높이 평가했다.  

'3등 열차'(유화) 도미에는 서민들의 일상을 자주 그렸다.     © 오노레 도미에
민주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 민중의 대변자로써 그는 평생 4천 점의 석판화, 1천 점의 목판화, 250점의 유화, 200점의 소묘와 수채화, 그리고 65점의 조각을 남겼다. 4천여 점의 석판화 중 1천여점이 시사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그리고 시사문제를 다루지 않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평범한 시민의 일상, 혁명에 대한 예찬, 상실된 믿음에 대한 절망 등을 담아낸 그는, 가히 근대의 지성적 목격자라 불리울 만 할 것이다. 도미에는 국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고, 1871년 파리꼬뮌 시절, 미술가 연맹위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다간 그는 말년에 두 눈을 잃게 되기 전까지도 작품을 창작했다. 끝내 가난한 자의 편에 선 한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 위대한 화가이자 조각가, 언론인, 시사만화가인 오노레 도미에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아직도 유효한 듯 보인다.


표현의 자유와 현실 참여


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와 ‘현실 참여’다.

필리봉의 그림 7월 혁명 이후 왕좌에 앉은 루이필립이 불고 있는 비누방울에 '개혁 열망'이 새겨져 있다. '개혁'을 자처하고 나선자가 그 기대를 저버릴 때, 실망하는 것은 19세기 프랑스나 21세기 한국이나 비슷한 듯 하다.     © 필리봉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프랑스의 만화가이자 언론인인 ‘필리봉’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7월 혁명 이후 ‘개혁’의 약속을 저버린 루이 필립 왕이 터지기 쉬운 비누거품을 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풍자만화(7월의 비누거품) 때문에 고소당하게 된다. 이 그림은 루이 필립의 개혁이 비누거품처럼 터지기 쉬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었다. 재판장에서 필리봉은 국왕의 얼굴이 ‘서양 배’로 변하는 과정을 그린 네 컷 짜리 그림을 제시하는데, 그의 변론이 걸작이다.

‘제 1의 그림이 국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죄가 된다면 제 1의 그림을 닮은 제 2의 그림도 죄가 되고, 제 2의 그림을 닮은 제 3의 그림도, 제 3의 그림을 닮은 제 4의 그림도 죄가 된다. 그렇다면 배를 재배한 농민들은 모두 유죄인가? 배와 유사한 형태의 물건은 모두 국왕을 모욕한 것으로 고발되어야 하는가?               
                                                                - 박홍규 '오노레 도미에' 94p

이는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표현을 구속하려는 법의 기준이 얼마나 모호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이후 ‘서양 배’는 국왕을 조롱하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인식되었고, 많은 풍자만화가들이 ‘서양 배’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필리봉은 6개월의 금고와 2천프랑의 벌금형을 받았다. 풍자만화는 기본적으로 ‘팩트’에 근거하지만 그 ‘팩트’만을 다루지 않는다.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가정된 상황’을 설정하거나 ‘환유와 제유’를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런 표현상의 특징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면 ‘정치풍자만화’는 아예 그리려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필리봉의 변론에 사용된 풍자만화     ©필리봉
필리봉의 변론은 '당신의 그림은 배를 닮았다. 배는 국왕을 닮았다. 고로 당신의 그림은 국왕을 조롱하는 것이다.'는 논리를 통쾌하게 뒤집어준 것이다. 얼마 전, 미디어오늘 이용호 화백이 YTN에 피소를 당했을 때, YTN이 제시한 근거인 ‘각인’과 ‘왜곡’은 풍자만화에 대한 세간의 몰상식한 이해력을 드러낸 해프닝일 뿐이었다. 

또한 현실 참여라 함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화는 우리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묘사할 줄 알아야 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인간군상들의 사고방식을 꿰뚫는 혜안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바로 이런 창작 행위 자체가 현실에 참여하는 특유의 방식인 것이다. 얼마 전 ‘농담을 넘어선 카툰’이라는 졸고를 통해 언급했듯 동시대를 날카롭게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궤적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것, 혹은 풍자를 통해 약한자들에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풍자만화의 모토가 되어야 한다.

만년의 도미에가 그린 '비스마르크' 시대, 유럽의 위태한 평화. '제국은 평화다'는 아포리즘에 대한 야유.     © 오노레 도미에
만화적 상상력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지만, '상상적 만화'라는 말은 왠지 어색하다. '상상력 지상주의(?)'는 본질을 빠트리기 쉽다. 물론 만화가 무조건 ‘참여’를 전제로 그려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모름지기 모든 예술은 당시 시대 상황을 정직하게 묘사 할 줄 알아야 한다. 100년 후 우리는 만화를 통해 2000년대의 복식과,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 상상력 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무리하게 왜곡하는 만화,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반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표현을 너무나 쉽게 용인해버리는 만화는 그래서 가치를 두기 힘들다.

도미에가 한 말이 있다. “만화(카리카튀르)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면서 고뇌에 허덕이는 인간의 압박된 정신에 별안간 나타난 통풍구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샹플뢰리는 또 이런 말을 한다. “만화란 평소에는 고양이처럼 잠들었다가 아무리 작은 정치적 동요에도 반응하여 그 푸른 눈을 번쩍 뜬다” 이 전통적인 격언(?)들은 현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자, ‘만화’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