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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무기, 혹은 적응의 문제

강개토 2008. 4. 10. 09:26

 

* DCINSIDE 역사갤러리 블로그(속칭 역갤블로그)의 [롱보우와 화승총에 대한 글] 하나를 보고 생각난 김에 포스트.

조선왕조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생각들 중 하나가 바로 "지나치게 문약하여 국방에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이 문치주의로 흘러 총과 같은 새로운 무기의 개발 등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결과적으로 국방력이 약해지고 망했다는 것이 이러한 생각의 기본 얼개다.

그런데, 과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단순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은 요즘 세계에서 가장 국방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나라일 것이다.

온 국민이 다 군대를 가고, 총을 들고 실전 배치된다. 온 나라가 다 전방이다보니 실제로 전투경험을 하는 사람도 많고 자연히 전사하는 사람도 많다.

국방비도 엄청나게 쏟아붇고 미국이 개발한 최신 무기는 항상 이스라엘이 먼저 구입한다.

  

여자라고 예외일쏘냐...

[관련기사] 이스라엘 여성의 군복무

그런데 이 "군사 국가" 가 패배를 당했다.

1973년의 제 4차 중동전 얘기다.

결국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전차군단과 전폭기들을 엄청나게 잃은 후였다.

이집트가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스라엘이 보유한 전폭기와 전차들은 그동안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것만으로 충분해" 라고 생각하고, 전차군단과 전폭기를 충분히 보유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집트가 이걸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지난 전쟁에서의 패배 원인을 면밀히 분석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전차와 전폭기들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전쟁을 해 볼 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 들고 나온 게 보병용 로켓포 RPG-7과 SAM 대공 미사일이었다.

당시 전차는 요즘 전차와는 달라서 철판 장갑을 썼다.

이집트 군이 보병에게 쥐어 준 로켓포는 이스라엘군의 전차를 스위스 치즈처럼 숭숭 구멍을 냈다.

반격하러 나온 이스라엘 전폭기들은 이집트군 기지에 설치된 SAM이 박살냈다.

전쟁사 불변의 법칙 - "패배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전쟁의 역사를 흔히 "무기들간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 라고 한다.

어떤 무기체계가 승리하면 한동한 이것이 주류로 사용되다가, 이를 근본부터 뒤집는 새로운 무기체계가 등장하는 것이 전쟁의 역사였다.

전쟁사학자 존 키건은 이를 "승리한 군사제도란 영광의 순간에 고착화된다." 고 표현했다.

전쟁무기는 생존에 직결된 것인 만큼, 그것에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구태여 이를 바꾸려고 하는 모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임진왜란에서 초반에 밀리고, 훗날 근대화된 군대를 지니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문약함, 국방에 관심이 없음 때문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방 문제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셀 수 없이 잦은 전란으로 많은 군사적 혁신이 이루어진 유럽과 전국시대의 칼부림을 거친 일본과 달리

조선왕조는 소수의 왜구와 여진족을 제외하면 전쟁이 별로 없는 나라였다. 따라서 기존의 무기 체계를 혁신할 필요가 없었다.

임진왜란 초기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다.

우리가 보기에 대량의 조총을 소지한 일본군에게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는 것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립의 머릿속에 있는 조총 이전의 전쟁방식에서는 기병들이 전력으로 돌격해서 적진을 유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신립은 바로 그 여진족 토벌에서 공을 세워 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치고 빠지는 여진족 경기병은 알아도, 조총의 일제사격이 뭔지 몰랐다.

이 전술은 일본에서도 최신의 전술이었으니 신립 탓은 아니다. 생에 마지막 출진에서도 그는 "기병들만으로도 충분해" 라고 생각했을것이다.

자기가 키워 놓은 정예의 함경도 기병들이 없다는 점은 좀 껄끄러웠겠지만.

결국 문제는 환경의 차이

일본군도 별로 다르지 않다. 대포는 틀림없이 조총에 비해서 압도적인 무기이고, 대단히 유용하다.

하지만 그 "전쟁과 무기에 관심이 많다는" 전국시대의 일본인들은 대포를 사용할 줄 몰랐다.

왜?
간단했다.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의 전쟁에서 커다란 대포를 끌고 다니기는 지극히 불편했고, 또 비쌌다.

그리고 대포로 부숴야 할 것도 별로 없었다. 일본의 성은 나무 울타리로 만든 산성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오즈츠(大統대통)"라 불리는 커다란 조총으로 성문을 부수기만 하면 대포 없이도 충분히 수비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건 총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크고, 조잡했다(?)

 

 

결국 대포를 쓰는 데 서툴렀던 일본 수군은 수백 문의 대포를 앞세운 조선수군에 의해 남해바다의 원혼이 된다.

이후 수백여년간 이어진 평화에 의해 일본의 군사 체계는 사쓰에이 전쟁으로 서양 무기의 뜨거운 맛을 볼 때까지 유지되었다.



* 일본의 대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글]을 읽어보시길.
Ps> 제 4차 중동전에는 돈이 연관된 후일담이 있다. 궁금하면 [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