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준의영화창고

배용균(57) 감독을 기억하는가

강개토 2008. 5. 2. 19:05

배용균 감독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영화 '달마가…'로 혜성처럼 등장, 최근 수년째 행적 묘연 궁금증

 

배용균(57) 감독을 기억하는가. 1989년 한국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

그해 8월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첫 작품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그랑프리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국내외 영화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의 옛 이름)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틈틈이 찍어낸 이 영화는 전대미문의 미스터리한 작품이었다.

연출, 촬영, 편집, 각본, 미술 등 모든 분야를 그 혼자 힘으로 해낸 것이다.

 

배 감독의 삶도 영화만큼이나 미스터리다.

 

이후 그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 외에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최소한으로나마 세상과 닿아 있던 끈마저 어느샌가 끊겼다.

 

‘달마가 동쪽으로 갔듯이 어딘가로 가지 않았겠느냐?’라는

우스갯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그의 행적은 묘연했다.

'유명인사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바탕으로 그의 행방을 쫓는 취재가 시작됐다.

 

3월 5일: 먼저 인터넷을 통해 배 감독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기 힘들었다.

‘씨네21’의 남동철 기자(현 편집장)의 기사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1989년 그는 딱 한번 관객과의 대화를 했다.

그가 국내에서 자신의 영화와 관련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고작 관객과의 대화를 참관한 것에 불과하지만 나로선 배 감독을 실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었다.

' (남 기자가 2005년 10월 8일 쓴 ‘[잊지 못할 게스트] 배용균 감독’)

남 기자는 배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인터뷰도 서면으로 진행했다.

배 감독이 기자와 직접 만나는 것을 꺼린 것이다.

40개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한 팩스가 남 기자가 그와 연결된 유일한 경험이었다.

 

3월 19일: 배용균 감독의 서울대 2년 선배인 김호득 영남대 교수와 통화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학 시절에도 배 감독은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나마 동기인 강요배(서양화가)와 박재동(만화가)과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김 교수는 배 감독이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서강대로 옮긴 걸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대구가톨릭대와는 달리 학사가 빡빡한 서강대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그만둔 걸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4월 18일: 경북고 52회 동기회 총무 김종해씨와 통화했다.

그는 “배 감독이 대구에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는 배 감독이 평소 모임에 잘 다니지 않았다고 확인해 줬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수소문을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4월 20일 : 남동철 ‘씨네 21’ 편집장과 통화했다.

배 감독에 대해 관심은 많지만 그 역시 배 감독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충무로에 나타나지 않기에 국내 영화계에서도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4월 21일: 배 감독이 몸담았던 서강대에 전화를 걸었다.

본관 교무팀 직원은 그가 2000년 2월 1일~2001년 8월 31일까지 근무했다고 확인해줬다.

대구가톨릭대 홍보팀에서는 배 감독이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재직했다고 했다.

114에 전화를 걸어 배용균이란 이름의 전화번호를 문의해 1명의 번호를 확보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동명이인이었다.

대구가톨릭대 서양화 전공 사무실에도 알아봤지만 당시 동료교수들조차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4월 23일: 수소문 끝에 배 감독의 예전 주소지(대구 남구 봉덕동 모 아파트)를 찾았다.

인터폰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경비원은 “오랫동안 비어있다고 들었다”는 말을 전했다.

우편물함은 차 있었다.

아래층 주민은 “배용균 감독 집은 맞는데 집이 한동안 비어 있다.

가끔 사모님이 왔다 가는 것 같다”고 전했다.

 

4월 24일: 경맥 52회 김종해 총무와 다시 통화를 했다.

김씨는 “수소문을 했는데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다만, 학창 시절 이야기만 들었다. 김씨에 따르면 배 감독은 고교 시절 “‘에덴의 동쪽’을 100번 이상 보자”고 했단다.

김씨는 실제로 “50번 이상은 본 것 같다.

배 감독은 영화의 분위기나 장면 하나라도 안 놓치려고 했다.

꿈을 꾸면 영화의 한 장면이 정지된 사진처럼 떠오르며 확대된다고 하더라”며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을 전했다.

 

배 감독의 삶은 은둔자의 그것이었다.

그는 그러나 2000년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언론에서 나를 은둔자라고 이름 붙인 건 세상의 편견일 수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 하는 사람의 생리상 자기 작품에 충실하자면 불필요한 일에 등 돌린 채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 그럼에도 구도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말하는 그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로 은둔자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언제나 ‘어딘가에서 다음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풍문이 들린다’는 배 감독.

그는 지금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배용균은?=1951년 11월 20일 대구 출생. 경북고(52회)를 거쳐 1976년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프랑스 파리대학 대학원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대구가톨릭대 서양화과,

2000년 2월부터 2001년 8월까지 서강대 영상대학원 영상미디어학과 부교수로 재직했다.

촬영방법이나 시나리오에 대해서 정식으로 배운 적 없이 독학으로 익혔다.

작품으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과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1995)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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