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신문

만화가열전 13 하승남-일간스포츠 | 입력 2005.10.18 14:16

강개토 2009. 2. 27. 21:30

 

 




[일간스포츠]

▲무명시절작업 공간이 없어 그림도구를 가지고 다방으로 10시 출근, 하루종일 앉아 그림에 매달렸다.

■진짜 용기 있는 만화가

 

하승남은 배우고 싶었지만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스승도 만나지 못했고,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작품을 스승으로 삼아 독학을 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무협만화하면 하승남이란 이미지를 구축했고, 그의 무협만화는 그림이 특별히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벌거벗은 기분으로 과거를 말해달라고. 아픈 곳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그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복했다.

유명 만화가라는 자존심으로 자신을 윤색하려 하지 않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공장을 전전한 경험, 학력미필이라는 이유로 군대마저 가지 못한 슬픔을 감추지도 않았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배움과 몇 배의 노력으로 그것을 보충해온 그의 삶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자의 것이었다.

성공이라는 단어보다는 '~ing'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하승남의 삶에서 용기를 얻을지어다.


■잠시 동안 행복했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부산 부두에서 기계를 조작하는 노동자였다.

술과 노름이 일상이어서 집은 편할 날이 없었다.

하승남이 다섯 살 때, 아버지의 행패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다.

위로 형, 누나를 하나씩 둔 4남매 중 셋째인 어린 하승남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4)였다.

소년 가장 윤복이의 일기를 옮긴 영화와 자신의 가정이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윤복이의 경우 여섯 살 때 어머니가 가출했고 자신이 무능력한 목수 아버지 대신 4남매를 이끌어야 했다.

하승남 가정과 직접적으로 비교해봐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였는데,

1960년대는 많은 가정이 소년, 소녀 가장의 손에 맡겨진 불행한 시대였다.

어머니가 두 달의 가출을 끝내고 부산시의 유명한 산동네인 수정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제들은 얼싸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약 2년 동안 행복한 시기가 찾아왔다.

1965년 아버지가

월남전 파병 기술자로 나가면서 집안 살림이 폈다.

 클린턴 의 경우처럼 하승남의 아버지도 한량 기질이 있었지만

흑백TV가 생겼을 정도였으니, 산동네에선 부자란 소리를 들었고, 저녁마다 동네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TV를 보러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갔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업 택시인 시발 택시를 대절해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가기도 했다.

초등학생인 하승남은 부산 시내에서 상영되는 영화란 영화는 모조리 섭렵했다.



가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기울었다.

3년 파병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예전 병세가 도졌고, 이사를 너무 많이 다니다 보니 어린 학승남은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그 해가 지나고 아버지는 부두에서 일감을 얻었다.

인천에서 5학년에 편입했지만 아버지 술주정을 피하기 급급했고, 나이 차가 있는 형과 누나는 직장을 찾아 집을 떠났다.

하승남은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했다.

6학년 때 운동하다 팔이 똑 부러졌는데, 어머니가 어렵사리 모은 중학교 진학비가 치료비로 사용된 것이다.

서러운 타향살이에 돈도 구해보지 못한 채, 그의 학업은 초등학교에서 멈춰서 버렸다.



■중학교를 대신해 버린 공장시절

하승남이 1970년대 초 중학교 대신 다닌 것은 과자공장이었다.

정상적인 학업은 생각할 수 없었다.

과장공장의 일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고, 하루 120원씩, 월급 3200원을 그대로 어미니에게 갖다 드렸다.

곤로를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을 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야간 중학교로 향했다.

막연히 두려웠는지, 중학교를 못 가게 된 반감이었는지,

하승남은 어머니가 등록을 시켰음에도, 학교 정문 앞에서 안 다닌다고 생떼를 썼다.

그 때는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는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를 가겠다고 주장해 대학생들이 야학 형식으로 가르치는 비정규 학교를 2년 다녔다.

낮에는 신문배달,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생활이 반복됐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검정고시를 두 번 준비했다가 포기했다.

그에겐 학교보다는 사회로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회사의 사환을 하며 공부를 하려 했는데 재정보증인을 해줄 사람이 없어 취직이 되지 않았다.

또 울었다. 그 때 학교를 완전히 포기했다.



17살 때 다닌 직장은 인천 십정동에 위치한 제5공단이었다.

만 18세가 안 돼 형의 사진을 붙이고 취직한 후 배속된 곳은 기타 생산을 위한 제재소.

아침에 걸어서 공장에 출근하면 1시간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였다.

험한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밤에 몸을 조금만 뒤척이면 몸에 쥐가 났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고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수당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새벽 5시에 조출했고 밤 12시까지 연장 근무를 했다.

월급은 3만 6000원으로 우리 사회 최저임금 수준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한 50만원 정도 되는 돈이었다.



어느 날 공장장이 조용히 부르더니 "새 기계가 들어오는데 네가 기술을 배우면 기계 기술자를 시켜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제재소는 정말 험한 노동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고 그 곳에도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동료나 선배도 많았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공장장이 오랫동안 지켜봐 온 것이다.

하승남으로선 파격적인 대우를 제안 받았으니 기뻐할 만한 일인데, 이 제안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좋은 제안임에도 마음 속에서 막연한 갈등이 일어났다.

야간학교 사건처럼 공장을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갑자기 죽어도 나가기 싫어진 것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도 없이 그는 공장을 그만두었다.



■내가 만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만화가 나를 선택했다

공장을 때려친 그는 한 달 반 동안 집에서 놀았다.

그야말로 완전히 백수 상태에서 어머니에게 서울 구경을 한 번만 하고 싶다고 졸랐다.

서울은 과거 부산발 0시 50분 차를 타고 잠깐 스쳐갔을 뿐이다.

서울에 취직하러 간 형이 집에 들렀을 때, 어머니는 콧바람이라도 쐬어 주라며 형에게 부탁했다.

1975년 7월 16일 하승남은 형을 따라 서울 땅을 밟았다.

얼마나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으면, 30년이나 된 날짜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운명이었을까. 남극성이란 만화가의 밑에서 일하던 형은 동생에게 화실을 구경시켜 준다며 불광동에 사는 만화가 김민에게 데려갔다.

김민은 < 불나비 > < 25시 > 시리즈로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있던 작가.

형은 그날 "너 만화 한 번 안 배워 볼래?"라는 말과 함께 그를 김민의 집에 내버려두고 갔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서울 구경시켜달라고 했더니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버리고 가듯 사라지는 건 뭔가.

마침 문하생이 없던 김민은 그에게 책을 한 권 내어주더니 한 번 똑같이 그려보라고 지시했다.

하승남은 보이는 대로 그렸고, 그림을 본 김민은 만화를 할 마음이 있으면 보따리 싸 가지고 오라고 했다.

무엇에 홀린 듯, 그날로 인천으로 내려가 서울에서 사용할 담요 하나와 옷 보따리를 쌌다.

만화를 어떻게 만드는 건지 몰랐지만, 탈출구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차였다.



그 당시 상황을 두고 하승남은 "알지 못하는 힘에게 이끌려 갔어요.

내가 만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만화가 나를 선택했습니다"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인생을 살다가 어떤 시점에서 돌아보면, 학창시절, 군대시절,

직장 선택과 심지어 여자 사귀기까지 모든 삶의 여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기 위한 길이었다는 일관성을 찾고 놀라게 된다.

하늘이 이렇게 되도록 예비했다는 느낌이랄까.

어릴 적부터 원하는 것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하승남이 지금 유명 만화가가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지를 펴고 운명을 개척한다는 말조차 사치스러웠던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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