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종교적 관념이 빚어낸 커피와 커피문화는 서아시아 지방에서 ‘커피의 집’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첫선을 보인다.
그 후 런던으로 건너간 커피는 ‘커피하우스’로 변신하여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으며,
파리에서는 프랑스혁명의 거점이 된 카페의 모습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커피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착취와 인종차별에도 깊이 개입했으며,
급기야 독일에서 시민사회의 돌연변이라고 할 파시즘을 낳고 만다….
커피에 매료된 저자는 이렇게, 커피라는 상품의 역사를 현대문명의 하나의 우화로서 서술하고 있다.
“그까짓 커피 한 잔이 역사를 움직였다고?”
오늘도 세계 각국에서 비슷한 울림으로 불리는 ‘커피’는 원유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무역상품이다.
모터리제이션이 일반화된 현대산업사회에서 석유는 없어서는 안 될 원료이지만,
기호식품에 불과한 커피가 2위라니 선뜻 믿기지 않는다.
이 책은 우리 생활 속에서 흔해빠진 커피라는 상품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에 관여했는지’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400여 년에 걸친 커피의 역사를 더듬어 나간다.
널리 알려진 커피의 기원전설 중 하나는 아라비아의 산양치기 칼디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칼디가 산양 무리를 새 목초지로 데리고 갔는데,
산양들이 흥분을 해서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당황한 칼디는 근처 수도원을 찾아갔다.
수도원장 스키아들리가 조사해보니, 산양들이 어느 작은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열매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먹어보다가 한 번은 끓여서 마셔보았다.
그러자 그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수도원에서는 밤에 예배를 볼 때마다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수도사들이 있었다.
수도원장은 그 열매 끓인 음료를 그들에게 마시게 했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그 후로 수도원에서는 저녁예배 때마다 그 검은 음료를 마시게 되었다…….
커피의 원산지는 동아프리카.
그곳에서 자란 커피콩을 원료로 이슬람 수피들의 종교적 관념이 빚어낸 커피는
서아시아 지방에서 ‘커피의 집’을 통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피들은 마시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커피의 네거티브한 특성을 그대로 포지티브하게 받아들여서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신과 합일을 이루고자 커피를 마셨다.
그런 커피의 항면작용과 사교장으로서의 문화적 효능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유럽 대륙으로 전파된다.
커피가 유럽에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성지순례이다.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순례는 그 자체가 거대한 상품수송기관이자 정보전달기관이었다.
머지않아 커피의 운반과 교환에 이슬람 세계의 거상들과 유럽제국의 상인자본가가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근대 상품교환사회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세계 시장에 등장하게 된다.
그 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지로 전파된 커피는 각 나라의 문화에 포함되면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거친다.
커피교역은 처음부터 거창한 국제성을 띠었다.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알선하는 것은 상인들이다.
초기의 커피교역을 주도한 것은 모카나 아덴을 비롯한 남아라비아 소도시의 상인들이었다.
특히 옛날부터 아라비아에 살면서 상업 활동에 깊이 관여한 유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커피에 관한 노래도
17세기 예멘의 유대인 상인들 사이에서 불린
「커피와 카트」라는 것으로 아라비아 문자로 기록된 헤브라이어 노래이다.
덧붙여서 밥 딜런도 「ONE MORE CUP OF COFFEE」라는 노래에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시는 한 잔의 커피를 이스라엘 선율이 떠오르는 곡조로 노래했다.
미국의 미네소타 주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알렌 짐머맨(밥 딜런의 본명)의 핏속에는,
커피를 노래할 때는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것 같은 애절한 선율에 실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흐르는 모양이다.
“저 계곡 아래로 길을 나서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떠나기 전에 커피 한 잔만 더. 커피 한 잔 더.”
—밥 딜런, 「ONE MORE CUP OF COFFEE」
런던으로 건너간 커피는 ‘커피하우스’로 변신하여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이라 불리며 런던 시민들을 공론 형성의 장으로 불러냈다.
드라이든, 포프, 스위프트 등의 수많은 문인이 이곳을 통해 배출되었고,
「테틀러」와 「스펙테이터」 등의 신문을 발행한 곳도 커피하우스였다.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 로이드도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커피하우스는 우체국, 주식거래소,
곡물거래소의 역할뿐만 아니라 비즈니스를 위한 사무공간으로서도 한몫을 했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영국으로 건너오자 런던 시민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아라비아 말,
‘아브라카다브라’라고 쓴 부적을 가슴에 품고는
쭈뼛쭈뼛 커피하우스를 찾아가
‘커피가 페스트 예방에 좋다’는 등의 정보교환에 열을 올렸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