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풀

앙드레 김 흰옷 뒤엔 날개가 있었다

강개토 2010. 8. 14. 20:14

 

 불우 아동들의 '고마운 아저씨'

독특하게 디자인한 풍성한 볼륨의 하얀 옷과 파운데이션을 바른 얼굴,
그리고 머리는 검정 칠로 배색을 아우르고, 늘 여성스런 수줍음의 말투와 함께 온화한 웃음을 짓던 남자.

나이를 초월한 첨단의 신선한 감각과 창조력으로
그에겐 특별히 노년이 없는 것만 같았던 앙드레 김이 고령(75세)의 병고를 이기지 못하고
12일 오후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 디자이너로 패션계의 한 시대를 풍미한 그에게는
'최고' '인기스타' '상류층' '화려함' 등의 언사가 따라붙는다.
그의 패션쇼와 거기에 등장하는 모델, 그의 의상을 즐겨 입는다는 고객들을 일컫는 표현들은
한결같이 서민대중과 전혀 인연이 없는 것 같은 느낌뿐이다.

그러나 그의 패션 무대가 그렇게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60년대 이후 근대화시대의 그늘진 곳에 사랑을 베풀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멋과 사랑'의 주인공이었고,
특히 불우 아동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고마운 아저씨'였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앙드레 김이 패션계에 등장한 것은 5.16 혁명 이듬해인 1962년.

국가사회의 살림 형편이 변변치 못하던 그 시절,
남성 디자이너로 최초 패션쇼를 열어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그는
의상 발표회 수익금을 YWCA 건립기금으로 내놓는가 하면,
파월장병에게 김치보내기, 일선장병 위문 등 국가안보 상황에도 그 나름의 관심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그의 패션쇼는 자선을 위한 무대로 펼쳐지기 시작했는데,
70년의 무대는 특히 영친왕 이은(李垠) 씨의 부인 이방자(李方子) 여사와의 인연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방자 여사는 정박아들을 지도하는 자행회(慈行會)와,
농아와 소아마비 아동에게 편물ㆍ수예ㆍ목공예 등 기술을 가르쳐 자활을 돕는
명휘원(明暉院) 두 자선단체를 이끌고 있었다.

앙드레 김은 자선 패션쇼를 열어 이 불우 아동들을 위한 복지사업기금을 보탰고,
방한복ㆍ점퍼ㆍ티셔츠ㆍ자켓 등 손수 디자인한 실용복들을 가지고 가 그들에게 입혀 주기도 했다.

이밖에도 서울시립아동병원의 불우 아동들을 위한 패션쇼와 정박아들을 위한 만찬회를 개최하는 등
그늘 속 아동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준 그의 자선 무대는 80년대 이후로
심장병 아동 돕기, 유니세프 활동, 제3세계 빈곤퇴치 등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2005년 3월 70세 나이를 무색케 할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하던 앙드레 김. ⓒ 공감코리아

앙드레 김 패션쇼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 그러나 그의 의상을 입었다는 건 낭설

1965년에는 주한 외교관 부인들로 구성된
국제여성클럽 주최로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열린 앙드레 김 자선 패션쇼에
육영수 여사가 참석하여 패션쇼를 통한 자선사업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미국 존슨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 온 그의 부인 버드 여사가
중앙청 만찬회와 시민회관 예술제에 입고 나왔던 검은 실크 바탕에 쟁반만한 둥근 무늬로 된 연회복은
앙드레 김이 만들어 선물한 것으로, 당연히 이는 청와대의 의사를 거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앙드레 김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상류층이나 지도층 부인들이 고급 의상만을 찾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보다 잘살기 위해 근검 절약을 강조한 국가사회의 건전 분위기와
특히 부유층의 호화주택과 호화분묘 등을 청와대에서 직접 조사하는 강경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누구보다도 한복을 즐겨 입는 육영수 여사 자신이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옷감으로 한복을 지어 입었다는 사실은
육 여사의 의상에 궁금증이 많았던 여성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바도 있다.

앙드레 김은 고위층 부인들이 새마을운동의 검소한 분위기에 맞춰 수수한 옷을 많이 입었다고 하면서,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가끔 그의 의상실을 찾아오는 장관 부인들이
"사모님도 안계신 청와대에 화려해 보이는 옷을 입고 가면 미안해서 안되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10.26사태 후
앙드레 김은 육 여사가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는 이유로 신군부의 서슬 퍼런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는 김대중 씨의 부인 이희호 씨와 이회창 씨 부인 한인옥 씨가 자기 옷을 입었다고 말했으나,
그가 육 여사를 고객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일전에 필자는 육 여사의 비서관을 역임한 김두영 씨에게
앙드레 김 의상을 육 여사가 입은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김씨는 "그런 일이 없다"며 낭설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육 여사가 양장 차림을 할 때는 주변 여성들이
허리띠의 버클을 유심히 보는데 유명 메이커가 아니어서 의아해 하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적어도 자기가 육 여사를 모신 70년대 전반의 4년 동안
각계 각층의 유무명 인사들이 출입하는 청와대에 앙드레 김이 초대된 적은 없다면서,
그 이유를 육 여사가 특정 디자이너를 가까이할 경우
고위층 부인들이 그쪽으로 몰려들어 소위 '문화권력'이 발생하게 마련이며
그것이 그 디자이너에게 후환(後患)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으로 풀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앙드레 김은 1991년 돈푼깨나 있는 유명 사모님들의 극성으로 빚어진
'옷로비 사건'으로 수개월 동안 검찰 조사, 세무 조사를 받고
국민의 따가운 눈총이 쏠린 청문회에 불려나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 =(좌)1964년 당시의 앙드레 김과 (우)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자선 패션쇼 모습. ⓒ SBS-TV 화면 캡처

'백의 천사'의 멋과 사랑, 천상을 날다

하지만 한때 곤욕을 치른 그 사건이
 그의 문화예술의 품격이나, 불우 아동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온 인생행로에 흠집을 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어린이들을 사랑했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자선 패션쇼를 인간미 넘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 호감을 갖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주한 외국대사 등 고위급 외교관이 취임하면 꽃다발을 보내 축하하고,
이임할 때면 파티를 열어 석별의 정을 나눔으로써 그들을 친한파로 만든다는 평을 들을 만큼
외교역량이 여느 외교관 못지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자선 패션쇼는 인기스타들만이 아닌
주한 외교사절, 미8군사령관의 부인 등 각계의 인사들이 등장하여
무대와 관람석의 참가자들 모두에게 훈훈하기만 한 무대였다.
이렇게 자선 패션쇼 무대를 통하여
그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정감과 어우러진 한국 문화예술의 우아함을 보여준
가장 한국적이고 또한 그러기에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예술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일찍이 1968년 뉴욕에서 패션쇼를 열었을 때
폭발적인 반응과 함께 570벌의 의상을 주문받아
대한민국 디자이너가 국산 옷감으로 만든 하이패션 의상을 최초로 해외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그로부터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2005년에는 부자들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는 등, 근대화시대 이후 반세기 동안 줄곧 국가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국익에 기여하고 지조있는 문화예술인으로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훌쩍 우리 곁을 떠났다.

춘하추동 주야장창 특유의 흰 옷만을 고집하는 캐릭터로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품격을 높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는 세월 흐름을 따라 하늘길을 갔다.

이 땅의 어린이들을 사랑한 '백의(白衣) 천사' 앙드레 김.
그가 멋과 사랑에 날개를 달고 천상(天上)으로 훠이훠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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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http://www.516.or.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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