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풀

이윤기 1947~2010, 1999년 8월에서 멈춘 육필연보

강개토 2010. 8. 27. 18:27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1947년 6월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두북동에서 태어났다.
1958년 4월 우보 국민학교 4학년 재학 중 대구로 이사했다.
1962년 대구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중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다.
           혼자서 하는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같은 해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2개월인가 3개월인가 다니고는 그만두었다.
1966년 대학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1967년 진학하기 위해 상경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포기하고 다시 귀향,
           입대할 날을 기다리며 대구 근교 가창에서 한 삼천평 되는 뽕나무 밭을 걸우었다.
           영미의 근현대 작가들 대부분을 영어로, 일본의 근현대 작가들 대부분을 일본어로 읽었다.
           극도의 우월감과 극도의 열등감에 휘둘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1969년 입대. 이등병 시절, 경기도 일산 고봉산 정상의 관측소에서 관측 근무를 자주 했다.
            틈틈이, 군수용품 휴지에다 '보병의 가족', '비상도로' 등의 단편을 썼다.
            당시의 휴지는 두루말이가 아닌 32절짜리 하급품 종이였다.
            일등병 시절 연대 본부가 기획한 계몽극단에 연극배우로 뽑혀 나갔다가
            당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준일 형을 만났다.
            뒷날 이분은 방송작가, 소설가가 되었다.
            이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잠재워 두었던 문학에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이분을 만나지 않았으면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1970년 신호나팔을 배워, 한동안 신호나팔수 노릇을 했다. 
            아름답게 기억하는 시절이다.

1971년 4월 월남으로 갔다. 다섯 차례의, '작전'이라고 불리는 장거리 정찰을 경험했다.
          전투 일선에서 물러선 뒤로는 발전기 기사 노릇, 도서관 사서 노릇을 2개월간 했다.
          '하얀 헬리콥터', '손님'은 발전병 노릇할 때, 철야로 돌아가는 발전기 옆에서 쓴 단편들이다.
          거대한 디젤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는 착암기 소리보다 크면 크지 작지는 않다.
          그런데도 월남에 있던 나에게는 그 소리가 고요였다.
          헬리콥터로 보급품을 전투지역으로 실어보내는 공수병(空輸兵) 노릇도 3개월간 했다.
           사서 노릇할 때는 또 미친 듯이 읽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중학교 시절에 하던 사서 노릇을, 월남 땅 전쟁터에서도 했으니.

1972년 귀국해서 임진강변 오두산 관측소에서 잔여 기간 3개월을 마저 복무하고 제대했다.
            관측병으로 시작한 군대살이를 관측병으로 끝낸 셈이다.
            이 또한 이상한 인연이다.
            관측병은 무인도의 등대수 같다.
            제대하는 날 아침, 관측소에서 대대본부까지 30~40리 되는 길을,
            막걸리 사먹어 가면서,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걸었다.
            9월부터 약 1년간, 재도급(再都給) 업자인 종매형과 도목수(都木手)인
            재종형의 그늘 아래 건설 공사장을 전전하며 '서기' 노릇과 일종의 해결사 노릇을 겸하면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서기'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나중에 내 집 짓는데 필요한 건축 기술을 여러 가지 익혔다.
             중편소설 '패자 부활'이 그 부산물이다.

1974년 수입은 많았지만 건설 공사장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
            공사장 손을 털고, 방송작가 김준일 형과 함께 일종의 해적판인 '니체 전집'의 윤문을 시작했다.
            일본어에서 중역한 모본(母本), 영어, 일본어 텍스트를 두고,
            하루에 이백 자 원고지 백여 장씩 썼다.
            말이 윤문이었을 뿐, 실제로는 완역에 가깝게 작업했다.
            아직도 남의 이름 달고 시중을 돌아다니는 이 전집을 두고 한 책임 있는 출판인은
            '제일 나은 니체 전집'이라고 해준 적도 있다.
             시작 당시의 원고료는 장당 10원이었다.
             출판사는 나중에 '실력을 인정한다'면서 17원으로 올려주었다.

1975년 청소년을 위한 잡지 '학원'을 내던 학원출판사에 기자로 들어갔다.
           양희은, 송창식, 김정호(작고), 김세환 같은 가수들을 만나고 다녔다.
           영어 잡지, 일본 잡지의 기사 번역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지금의 소설가 김상렬, 최학 교수, 시인 권오운, 원동은, 박정만(작고),
           신학대학 교수 김성영, 평론가 황현산 교수 등과 함께 근무했다.
           황홀한 시절이었다.
            대학 갓 나온 아내 권소천도 여기에서 만났다.

1976년 아동 잡지를 내던 육영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면서 신춘문예를 기웃거리던 중,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입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 들은 직후에,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응모'라는 절차를 도무지 소화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길밖에는 길이 없었다.

1977년 본격적으로 번역 일을 시작했다.
            '이원기'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소책자를 번역하다
            헤밍웨이가 편집한 앤솔로지 '전장의 인간'(전4권)에 도전했다.
            최초의 역서 '카라카스의 아침'은 홍성사에서 나왔다.
            당시의 홍성사 편집주간이 정병규 형이었다.
            카를 융의 편저서 '인간의 상징'의 번역도 이해에 이루어졌다.

1978년 결혼.
             이해부터 거의 한 달에 한 권 꼴로 역서를 출간했다.
             한 해에 만오천 장 가까이 썼다.
             미국제 파카 만년필이 해마다 한두 자루씩 닳았다.

1979년 아들 '가람' 출생.
            방송작가 김준일 형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가람은 지금 미국 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

1980년 딸 '다히' 출생.
            시인 김영석 형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본적지 호적계원의 과잉 친절로 '다히'는 '다희'가 되었다.
              다희는 지금 대학 인문학부에서 철학 공부하고 있다.
              고전어(古典語)를 배우고 싶어서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1983년 출석일수를 채울 수 없어서, 신학대학의 졸업을 포기했다.
            히브리어, 헬라어(고전 그리스어), 라틴어를 시작했다.
            이 야심적인 도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해에 '이가현'이라는 이름으로 네 편의 소년소설을 어린이 잡지에 연재했다.

1985년 움베르토 에코의 첫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번역에 착수했다.
            매우 힘이 들었다.
            다음 해에 탈고했지만 여러 대형 출판사로부터 차례로 퇴짜를 맞았다.

1986년 정병규 형의 주선으로 '장미의 이름'이 출판회사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반응이 매우 좋았다.

1988년 그리스·로마 신화의 해석을 시도한 '뮈토스' 3부작을 출판회사 고려원에서 펴냈다.
            같은 해, 중단편 소설집 '하얀 헬리콥터'를, 중학교 동창생이 경영하던 영학 출판사에서 펴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 교수의 권유로 필기구를 만년필에서 워드프로세서로 바꾸었다.
             필기도구에 관한 한 일종의 친위 혁명이었던 셈.
             무려 230만 원에 달하는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젬워드'의 비용은 정병규 형이 물다시피 했다.
             번역의 속도가 곱절로 빨라졌다.
             이해까지 낸 번역서가 150권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일일이 헤아리는 것을, 올림픽 끝날 즈음에 포기했다.

1990년 출판회사 고려원에서 편집주간으로 한 해 동안 일했다.
            에코의 두번째 소설 '푸코의 추'를 번역 출간했다.
            서화숙 기자의 주선으로 한국일보에 '과학소설의 세계'를 한동안 연재했다.
            과학소설사 공부가 좋이 되었다.

1991년 연변대학 및 경북대학교 교수(1999년 현재) 이상무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국제대학의 초청을 받고,
           8월에 '초빙 연구원' 자격으로 가족과 함께 도미했다.
           조용한 대학 도시 이스트 랜싱의 아름다운 마을 '체릴 레인'의 교환교수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박사 학위를 얻을 생각이었다.
           서울대학교 정진홍 교수(종교학)께서 추천장을 써주시었다.
           당장 박사 과정에 넣어서 공부를 시켜도 좋겠다는, 분에 넘치는 추천이었다.
           당시의 국제대학 학장 임길진 박사
           (1999년 현재, KDI 대학원장, 미시건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석좌교수)로부터
           지나치게 후한 대접을 받았다.
          학자의 길보다는 소설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해 가을에 얻었다.
           (정진홍 교수님 죄송합니다.)

1992년 '장미의 이름', '푸코의 추'를 개역(改譯)했다.
            '푸코의 추'는 처음부터 다시 번역, 제목도 '푸코의 진자'로 바꾸었다.
            개역하면서 교환교수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백여 개국 학자들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설 쓰기로 되돌아가겠다고 결심, 번역의 청탁은 가능한 한 거절했다.
             최구식 기자의 추천으로 조선일보에 주간 칼럼 '동과 서의 만남'의 연재를 시작했다.

1993년 장편소설 '하늘의 문'을 쓰기 시작했다.
            이해 겨울에 일본을 여행했다.
            조총련 간부 노릇하던 숙부의 행방을 찾아,
            오사카의 위성 소도시 후세 시[布施市] 아라카와 구[荒川區] 를 뒤지고 다녔다.
            열린책들의 홍지웅 사장이 미국 체재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94년 장편소설 '하늘의 문'을 출판회사 열린책들에서 출간했다.

1995년 당시의 민음사 이영준 주간
            (1999년 현재,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학과)의 도움으로
            '세계의 문학'에 중편소설 '나비 넥타이'를 발표함으로써 소설 쓰기의 출사표로 삼았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분에 넘치는 격려를 받았다.
             정중수 주간의 배려로 '중앙 문예' 가을호에 장편소설 '사랑의 종자'를 발표했다.
             '실천문학' 겨울호에 의해 이 소설이 '오늘의 민족문학'으로 뽑히는, 생광스러운 영광을 누렸다.
             (나의 소설이 '민족문학'에 포함되다니….)
              '문학동네'에 장편소설 '햇빛과 달빛'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96년 8월 아들 가람만 남겨둔 채 아내, 딸과 함께 일단 귀국했다.
           단편
           '뱃놀이'(세계의 문학 겨울호),
            '떠난 자리'(문학사상 8월호),
            '구멍'(문학과 사회 겨울호)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사랑의 종자'가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장편소설 '햇빛과 달빛'이 출간되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세 번째 소설 '전날의 섬'을 번역 출간했다.
1977년에 번역을 완료한 카를 융의 편저서
           '인간과 상징'이 열린책들에서 이해에 출간되었다. 

 1997년 9월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의 초청을 받고 다시 도미.
             이해에
              '갈매기'(문학사상 2월호),
               '낯익은 봄'(현대문학 4월호)을 쓰고,
               중편 '직선과 곡선'(세계의 문학 여름호)을 발표했다.
               중편 '직선과 곡선',
               단편 '사람의 성분'(작가세계 가을호)으로 연작소설 '숨은 그림 찾기'를 시작했다.
               '현대문학'에 장편소설 '뿌리와 날개'의 연재를 시작했다.
                산문집 '에세이 온 아메리카'가 '월간 에세이'를 펴내는 원장재단에서 출간되었다.
                 박해현 기자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플루타크 영웅열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98년 중단편 소설집 '나비 넥타이'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양헌석 기자의 주선으로 세계일보에 '세계사 인물기행'의 연재를 시작했다.
            중편소설
             '진홍글씨'(라쁠륨 봄호),
             단편 소설
             '세 동무'(무애 여름호),
             '오리와 인간'(세계의 문학 여름호),
              '두물머리'(문학과 의식 여름호), '
              손가락'(상상 여름호),
              '넓고 넓은 방 한 칸'(금호문화),
              '좌우지간'(황해문화 가을호)을 발표.
              6월11일 조선일보사로부터 제29회 동인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우 뜻깊은, 쉰한 번째 생일날 아침에 연보를 정리했다.

덧붙이기

6월29일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숨은 그림 찾기1(직선과 곡선)(공저, 조선일보사) 출간.
6월30일, 장편소설 '뿌리와 날개'(현대문학사) 출간. 10월9일,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월 5일,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생각의 나무) 출간.
12월8일, 중편소설 '진홍글씨'(작가정신) 단행본으로 출간.
12월10일, 청소년을 위한 신화 해설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웅진출판사) 출간.

1999년 1월부터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그리운 타부' 연재 시작.
           2월 '4대 문학상 수상작가 대표작 선곡'(공저, 작가정신) 출간.
           3월 산문집 '어른의 학교'(민음사) 출간.
           4월 '작가세계'에 장편소설 '나무 기도원' 분재 시작.
            5월 '세계의 문학'에 단편 '숨은 그림 찾기3'을 발표.
            6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개역판(민음사) 출간.
             8월. 3부작 '뮈토스'의 개정판(고려원) 출간.
 
1999년 8월 현재,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객원교수(비교문화).
            8월10일,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로 떠나는 날,
            미시건 주립대학교 '스파르타 인들의 마을 Spartan Village'에서 연보를 정리한다.

'오늘의 작가총서'(민음사)에서 발췌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