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강개토 2010. 10. 11. 09:06
ㆍ욕망이 부질없는, ‘말단’의 즐거움

자전거 도둑 | 신현정·애지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가면 된다/ 뒤뚱뒤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 꽥 꽥.(‘오리 한 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말단’이 되어 본 적 있을까.
자신을 기분 좋게 말단에 둘 수 있을 만큼 생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욕망의 살점 몇 덩어리를 잘라내면 그게 가능할까.
시인은 무심히 “저수지 보러” 간다.
생의 오랜 갈등이나 병마 끝에 나선 것으로 짐작되는 그 외유는 결코 유유자적이 아닐 터이다.
미처 다 못 떨친 욕망과 병마의 잔상들로 순간순간 빈혈처럼 흔들리는 숲길.
그곳에서 몇 걸음 앞서 걷는 오리떼를 발견하곤 시인은 무릎을 친다.
 
저수지를 향한 오리떼의 뒤뚱거리는 걸음들.
아무 서두를 것도 다툴 것도 없는 느긋한 걸음들.
쥐고 내치는 게 무의미해지는 공간-물속을 향한, 한 줄만으로도 넉넉한 걸음들.
 
그리하여 그 한 줄은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그것은 시인이 꽁무니에 붙어 따라가고 싶은 “싱그러운 한 줄”이다.
그러나 “그저 뒤따라가면 된다”지만, 그게 곧 나와 세상을 저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부질없는 욕망과 시시비비 따위에서 자유롭긴 하되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생의 소중한 순간에 닥치면 “급기야는 꽥꽥대고” 엉덩이를 흔들 수 있다.
그 오리 한 줄의 말단에 서 있는 시인.
머잖아 저수지의 유영을 즐길, 쥐고 내치는 일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오리 한 마리.
지병을 앓던 시인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시인의 작품을 못 읽는 안타까움을 주체하기 힘들다.
지금쯤 시인은 자유롭게 저수지의 유영을 즐기고 있을까.
말단의 소망은 이루었을까. 뼈가 시리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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